정목일 시, 조두남 곡 '고별의 노래'
‘선구자’ ‘그리움’ 등 불멸의 국민 가곡을 남긴 작곡가 조두남(趙斗南) 선생과의 만남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분은 타계 전 몇 년 동안 뇌졸중으로 병석에 계셨다. 이때 그분은 심한 언어장애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데다 손마저 마비되어 피아노를 칠 수도 없었다. 작곡가에게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것은 곧 절망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분은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그분께서 타계하시기 전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그분 댁을 방문했다. 당시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던 까닭으로 댁에 자주 드나들어 어느덧 정이 들어 있었다.
마산만이 바라다 보이는 아파트 거실에 달빛이 밀려와 있었고 오랜 투병생활로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그분은 앙상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두 손을 잡으며 맞아주셨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 깊게 패인 두 눈에는 외로움과 어떤 간절함이 뒤섞인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때 나는 이 노작곡가를 바라보며 속으로 빌고 있었다.
“부디 이 작곡가에게 마지막 불멸의 명곡을 남길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내 마음속에서 ‘선구자’의 노래가 울리고 까닭도 모으게 눈물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조두남 선생이 젊은 시절, 만주 용정에서 지낼 때, 한 젊은이가 불쑥 찾아와 이 시를 내 놓으며 작곡을 부탁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곡이 완성되고 온 겨레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건만, 그때의 젊은이는 영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술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선생님을 소파에 앉혀드리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 쪽에서 흘러온 달빛이 거실의 피아노를 비춰주고 있었다. 병들어 지친 노작곡가와의 대좌(對坐)-. 달빛이 흐르는 거실의 고요, 덩그렇게 놓인 피아노 한 대, 멀리 찬 박으로 달빛을 실은 은파(銀波)가 거실가지 밀려 왔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일어서셨다. 그리고 피아노 앞 의자에 앉으시는 것이었다. 오래 동안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는 피아노가 거기에 있었다. 피아노 위를 앙상한 흰 손이 부르르 떨며 쓰다듬고 있었다. skl는 그분께 다가가 피아노 뚜껑을 열어드렸다. 달빛을 받아 흰 목련꽃처럼 피어 있는 건반이 눈부셨다. 그분은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건반 위를 어루만지며 눌러보고 계셨다. 피아노가 떨며 가느다랗게 비명처럼 또는 흐느낌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그분의 눈에선 북 바치는 눈물이 넘쳐 올라 얼굴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분은 분명히 가슴속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악상(樂想)을 피아노로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이 마비되고 말도 할 수 없어 오선지에 곡을 옮길 수도 피아노를 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분이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있었음을…. 조두남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의 장면이 퇴색된 흑백 사진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조두남 선생은 운명하셨다. 영결식은 마산의 한 성당에서 있었는데 그분이 남기신 ‘선구자’와 ‘그리움’이 울려 퍼져 참석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어느 날, 조두남 선생의 수제자로 한국음악협회 경남지회장인 작곡가 김봉천 씨가 찾아와 악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 조두남 선생의 유작(遺作)입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유작이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곡(曲)만 완성된 채, 가사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니 정 선생이 써주시는 것이 좋을 듯해서......”
“아니, 왜요? 유명한 시인의 가사를 붙여야 이 노래에 걸맞지 않습니까?”
놀라서 되묻는 나에게 김봉천 선생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평소에 늘 만나고 가까웠던 분들 중에서 가사를 쓰는 것이 그분을 위하는 것일 테지요.”
유작곡(遺作曲) 악보에는 ‘고별의 노래’라는 제목이 씌어져 있었다. 아! 그분은 벌써부터 모두와의 고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악보를 보며,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여 이 순간은 아무 말도 하지 마오 / 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만 볼 뿐/ 마음 속 별떨기 새겨진 사랑 고이 간직하리라/ 잘 가오 잊지 마오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
이렇게 해서 나는 조두남 선생의 유작 ‘고별의 노래’에 가사를 붙이게 됐다. 가슴 속으로 이 노래를 불러보며 그분과 그리고 그날의 고별을 생각한다. 진실한 사랑만이 고별의 아름다운 선물이며 가슴속에 간직할 수 있는 보석이 아닐까.
글 : 작사가 정목일
(월간문학,현대문학으로등단, 작품집 <沈香> 외)
이글은 수필애호가들의 쉼터(supil.linuxtop.co.kr)에서 옮겨왔습니다.
그분은 타계 전 몇 년 동안 뇌졸중으로 병석에 계셨다. 이때 그분은 심한 언어장애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데다 손마저 마비되어 피아노를 칠 수도 없었다. 작곡가에게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것은 곧 절망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분은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그분께서 타계하시기 전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그분 댁을 방문했다. 당시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던 까닭으로 댁에 자주 드나들어 어느덧 정이 들어 있었다.
마산만이 바라다 보이는 아파트 거실에 달빛이 밀려와 있었고 오랜 투병생활로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그분은 앙상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두 손을 잡으며 맞아주셨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 깊게 패인 두 눈에는 외로움과 어떤 간절함이 뒤섞인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때 나는 이 노작곡가를 바라보며 속으로 빌고 있었다.
“부디 이 작곡가에게 마지막 불멸의 명곡을 남길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내 마음속에서 ‘선구자’의 노래가 울리고 까닭도 모으게 눈물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조두남 선생이 젊은 시절, 만주 용정에서 지낼 때, 한 젊은이가 불쑥 찾아와 이 시를 내 놓으며 작곡을 부탁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곡이 완성되고 온 겨레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건만, 그때의 젊은이는 영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술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선생님을 소파에 앉혀드리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 쪽에서 흘러온 달빛이 거실의 피아노를 비춰주고 있었다. 병들어 지친 노작곡가와의 대좌(對坐)-. 달빛이 흐르는 거실의 고요, 덩그렇게 놓인 피아노 한 대, 멀리 찬 박으로 달빛을 실은 은파(銀波)가 거실가지 밀려 왔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일어서셨다. 그리고 피아노 앞 의자에 앉으시는 것이었다. 오래 동안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는 피아노가 거기에 있었다. 피아노 위를 앙상한 흰 손이 부르르 떨며 쓰다듬고 있었다. skl는 그분께 다가가 피아노 뚜껑을 열어드렸다. 달빛을 받아 흰 목련꽃처럼 피어 있는 건반이 눈부셨다. 그분은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건반 위를 어루만지며 눌러보고 계셨다. 피아노가 떨며 가느다랗게 비명처럼 또는 흐느낌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그분의 눈에선 북 바치는 눈물이 넘쳐 올라 얼굴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분은 분명히 가슴속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악상(樂想)을 피아노로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이 마비되고 말도 할 수 없어 오선지에 곡을 옮길 수도 피아노를 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분이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있었음을…. 조두남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의 장면이 퇴색된 흑백 사진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조두남 선생은 운명하셨다. 영결식은 마산의 한 성당에서 있었는데 그분이 남기신 ‘선구자’와 ‘그리움’이 울려 퍼져 참석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어느 날, 조두남 선생의 수제자로 한국음악협회 경남지회장인 작곡가 김봉천 씨가 찾아와 악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 조두남 선생의 유작(遺作)입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유작이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곡(曲)만 완성된 채, 가사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니 정 선생이 써주시는 것이 좋을 듯해서......”
“아니, 왜요? 유명한 시인의 가사를 붙여야 이 노래에 걸맞지 않습니까?”
놀라서 되묻는 나에게 김봉천 선생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평소에 늘 만나고 가까웠던 분들 중에서 가사를 쓰는 것이 그분을 위하는 것일 테지요.”
유작곡(遺作曲) 악보에는 ‘고별의 노래’라는 제목이 씌어져 있었다. 아! 그분은 벌써부터 모두와의 고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악보를 보며,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여 이 순간은 아무 말도 하지 마오 / 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만 볼 뿐/ 마음 속 별떨기 새겨진 사랑 고이 간직하리라/ 잘 가오 잊지 마오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
이렇게 해서 나는 조두남 선생의 유작 ‘고별의 노래’에 가사를 붙이게 됐다. 가슴 속으로 이 노래를 불러보며 그분과 그리고 그날의 고별을 생각한다. 진실한 사랑만이 고별의 아름다운 선물이며 가슴속에 간직할 수 있는 보석이 아닐까.
글 : 작사가 정목일
(월간문학,현대문학으로등단, 작품집 <沈香> 외)
이글은 수필애호가들의 쉼터(supil.linuxtop.co.kr)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