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악계의 살아있는 역사 - 테너 김신환 그를 말하다
여든을 바라보는 거장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고 빛났다. 그리고, 그의 미소도 또한 여전히 부드럽고 친근했다. '문화저널21'에서는 테너 김신환 선생을 만나 이야기 나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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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한국 성학회 회장, 세종 문화회관 사장 역임, 영남대 학장 역임, 한국 시립 오페라단 단장 역임등 얼마나 많은 말들을 나열해야 선생을 소개할수 있을까? 그의 이력과 학력, 국내 외 수상경력과 연주경력을 모두 쓰자면, 그리고 이태리 금년의 온정상, 이태리 빤빠니니 문화상, 이태리 대통령 훈장과 까발리에레(기사) 작위를 받는 등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그의 얘기를 쓰자면 아마 책 몇권은 족히 나올 것이다.
그 뿐인가. 세계적인 각종 유명 콩쿨을 휩쓸고, 또 그 콩쿨들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등 선생의 끊임없는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하고, 그의 이름 앞에 절대로 빠질수 없는 말은 바로 '이태리 벨칸토 창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국내 유일의, 최고의 성악가' 라는 것이다.
그 뿐인가. 세계적인 각종 유명 콩쿨을 휩쓸고, 또 그 콩쿨들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등 선생의 끊임없는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하고, 그의 이름 앞에 절대로 빠질수 없는 말은 바로 '이태리 벨칸토 창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국내 유일의, 최고의 성악가' 라는 것이다.
그의 성악가로서의 인생은 다소 특이하게 시작됐다. 1946년 경기고 재학 시절에 이 인선 선생( 한국 최초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제작) 께 처음 사사 받으면서 시작되었고 특이하게도 서울대 문리대로 진학해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도 여전히 성악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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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저널21
선생은 그 시절을 잠시 회상하였다. " 그 때는 무조건 노래가 좋았어. 내가 1950년도 초에 전시 육군 군악 학교를 졸업하고, 또 해군 정훈 음악대에서도 활동했는데 거기에는 지금의 내노라하는 유명 성악가들이 다 모여 있었지. 그 중에서 내가 제일 막내격이었어. 그런데 막내인 내가 중요한 오라토리오 solo는 거의 도맡아서 하고 있었지.
1953년 초 어느날 나운영 선생이 날 찾아와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를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시는거야. 그래서 왜 나한테 부탁하시냐고 했더니 내 소리는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표현하는게 참 좋다고 하면서 불러달라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그 노래를 가장 먼저 부르게 되었지."
그는 1955년에 파리 소르본느 대학으로 가서 음성학을 시작으로 10년동안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1958년에는 '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에 합격했다. 이 음악원은 각 국립 음악원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1등들만 모여서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 곳이다.
또, 프랑스 유학시절과 이태리 유학시절 동안 독일 리트와 프랑스 예술가곡계의 거장 샤르 빤제라 ( Charles Panzera), 세계적인 테너 디스테파노의 선생이자 ' Bel Canto Italiano'의 저자인 아드리아노 또끼오(Adriano Tocchio),세계적 피아니스트 파바레또( Favaretto-테발디, 질리 등의 반주자), 깜뽀갈리아니( Campogagliani-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사사받음). 이반 만또바니 (Ivo Mantovani), 쥬세뻬 데 쁠라또 ( Giuseppe de Plato) 등 수많은 세계적인 거장들에게 사사받고, 각종 유명한 국제 콩클의 1위를 휩쓸었다.
선생은 이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 자그마한 동양인이 콩클에 나오기만 하면 1위를 하니까 다들 신기하게 봤어. 그리고 1977년 부터 1983년 까지 이태리 스칼라 극장에 솔리스트로 뽑혀서 활동할 때는 아주 굉장했지. 그 때는 그 유명한 레오누치랑 같이 오디션 보고 활동하면서 ' 세빌리아의 이발사' 의 주역으로 내가 뽑혔어. 이게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냐면 전세계 매스컴이 떠들썩 하고 일본에서는 초청을 할 정도였어."
©문화저널21
기자는 갑자기 디 스테파노, 마리아 델 모나코 등 전설적인 인물부터 근래의 까레라스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단순히 알고 지내는 정도가 아닌, 아주 친근한 관계를 갖고 있는 선생의 사적인 얘기가 궁금해 져서, 그 중의 한 가지를 부탁했다.
" 마리아 델 모나코는 내가 이태리에 가면 어디에 있든지 당장 나한테 달려왔어. 한번은 내가 밀라노에 갔을 때인데 그때가 모나코가 죽기 몇년 전이었어. 그가 투병생활 하고 있을때지. 그런데도 이태리 남쪽 지방에 있다가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 몸으로 거의 하루종일 기차를 타고 나한테 왔어.
그래서 거기에서 같이 지내면서 모나코 운동 시키느라고 같이 조깅도 하고 그랬지. 한참 뛰다가 그에게 용기를 주느라고 내가 일부러 뒤쳐지고 하면 그가 아주 의기양양해 하면서 좋아하곤 했어. 그 모습이 생생한테 몇년 뒤에 죽었지." 선생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면서 앞으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문화저널 21에 선생의 에피소드들을 부탁했더니 아주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번엔 선생이 영남대 학장과 서울 시립 오페라단 단장을 맡고 있을때의 얘기를 들어봤다.
© 문화저널21
" 그 때는 지방이랑 서울에서 동시에 일하느라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 특히 시립 오페라 단을 1985년에 창단해서 13년간 맡았는데, 그 때 많은 대형 오페라를 한국에서 초연시켰고, 최현수, 고성현 등 그때 발굴해서 키운 수많은 성악가들이 지금은 아주 유명한 스타가 되었지.
그 땐 사람들이 나한테 ' 스타 제조기' 라고 부를 정도였어. 그런데, 난 스타 제조기가 아니고, 내 스승인 이 인선 선생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어. 이 인선 선생님은 한국 최초의 오페라 제작자이고,
한국 오페라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하신 분이야. 그 뜻을 계승해서 나도 한국 오페라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내 사비까지 다 쓰면서 몸을 아끼지 않았어. 또, 단장인 나는 절대로 무대에 서지 않고, 오직 다른 성악가들 에게만 기회를 주었어. 그때도 나는 왕성하게 활동 할 때여서 얼마든지 내가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수 있었지만, 내가 뒤에서 뒷받침해 준다는 철칙은 꼭 지켰지. "
이렇게 이 인선 선생의 한국 오페라를 위한 희생 정신은 김신환 선생에게 까지 이어져, 그 시기는 바로 한국 오페라계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선생은 오랜 외국 생활로 기존 한국 성악계의 텃새 속에서도 당당히 1978년 ' 세종 문화 회관 개관 연주회' 에 초청받아 연주를 하였다. 세종 문화 회관 과의 인연은 2002년까지 이어져 2002~2004년 까지 세종문화회관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기간 중에 선생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음향 보정 장치를 넣어서 극장을 리모델링 한것과, 리모델링후 2003년 말에 3개월간 ' 재 개관 Festival' 공연을 기획했는데, 이 3개월 간의 공연들은 지금도 ' 전무후무한 공연'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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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전문 경영인이 아닌 예술인으로서 세종문화 회관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극장으로 만들기 위해, 또 예술가들의 권익과 대우를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 세종문화 회관에서 가수들 공연은 왜 안되냐고 난리였어. 그런데 극장은 파이프 오르간도 있고, 또 여러가지로 체육관이나 다른 용도의 극장과는 시설이 아주 틀려. 그런데, 소리의 위력은 어느정도냐 하면 소리를 크게 내면 천장의 전구가 깨질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하거든. 그 소리를 극장에서 낸다고 생각해봐. 여러가지 요란한 전자 악기들, 또 계속해서 터지는 각종 폭죽들...
그런 공연을 하게 되면 최고의 악기와 시설로 갖추어진 극장이 망가지게 되겠지. 그래서 대중음악 공연은 안된다는 거야. 그런데 이 미자나 패티 김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요란한 공연을 안하잖아. 그래서 그 사람들 정도는 괜찮다고 했었지. "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기자는 클래식만 예술이고 대중음악은 예술이 아니냐고 하는 논란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자는 또, 성악계가 유난히 어려운 이 시기에 성악회 회장을 맡은 선생에게 계획을 물어보았다. " 내가 레슨 받았던 이태리 깜뽀갈리아니 선생이 1983년에 이태리 TV 방송에 나와서 이렇게 말했어. 앞으로 성악의 중심은 이태리에서 타민족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아마 한국이 될것이다 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국엔 우수한 성악가들이 아주 많아. 그런데, 아직 하나가 안되어있어. 나는 한국 성악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서 성악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좋은 공연을 많이 기획해서 한국 성악계의 위상을 높이는게 내 계획이야. 또, 이 성악회라는 기구를 통해 오페라 진흥 공사를 만들어서 ' 성악의 집' 을 만드는게 내 꿈이지. 영화, 문학 등 다른 분야는 이런게 다 되어 있는데, 성악계는 아직 안되어 있어."
© 문화저널21
마지막으로 기자는 선생에게서 빼놓을수 없는 벨칸토 (Bel Canto) 에 대해 물었다. " 벨칸토는 한마디로 노래를 최대한 아름답게, 소리를 정화시켜서 부르는 거야. 벨칸토 시대후에 성악가의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베르디에 반발해서 ' 사실주의' '현실주의' 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말하듯이, 소리지르 듯이 노래를 하는거야. 한 마디로 사실주의는 벨칸토를 파괴시키고 연극적인 면을 살려서 노래하는 거지.그러다가 지금은 이태리가 다시 옛날의 벨칸토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
그리 짧지않은 시간동안 기자의 질문의 한결같이 답해주는 선생의 모습에서 기자는 선생의 열정과 자상함을 동시에 보았다. 그리고, 끝으로 이 거장의 뒤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성악가들에세 선생은 아주 강하게 자신의 신념을 말하였다.
" 성악도 자기 수양의 세계가 필요하고,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해. 그저 소리만 내는 사람은 소리쟁이에 불과해. 성악가는 절대 소리쟁이가 되어서는 안돼."
문화저널21 / 음악전문 정원주 기자/ 사진 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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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한국 성학회 회장, 세종 문화회관 사장 역임, 영남대 학장 역임, 한국 시립 오페라단 단장 역임등 얼마나 많은 말들을 나열해야 선생을 소개할수 있을까? 그의 이력과 학력, 국내 외 수상경력과 연주경력을 모두 쓰자면, 그리고 이태리 금년의 온정상, 이태리 빤빠니니 문화상, 이태리 대통령 훈장과 까발리에레(기사) 작위를 받는 등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그의 얘기를 쓰자면 아마 책 몇권은 족히 나올 것이다.
그 뿐인가. 세계적인 각종 유명 콩쿨을 휩쓸고, 또 그 콩쿨들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등 선생의 끊임없는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하고, 그의 이름 앞에 절대로 빠질수 없는 말은 바로 '이태리 벨칸토 창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국내 유일의, 최고의 성악가' 라는 것이다.
그 뿐인가. 세계적인 각종 유명 콩쿨을 휩쓸고, 또 그 콩쿨들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등 선생의 끊임없는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하고, 그의 이름 앞에 절대로 빠질수 없는 말은 바로 '이태리 벨칸토 창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국내 유일의, 최고의 성악가' 라는 것이다.
그의 성악가로서의 인생은 다소 특이하게 시작됐다. 1946년 경기고 재학 시절에 이 인선 선생( 한국 최초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제작) 께 처음 사사 받으면서 시작되었고 특이하게도 서울대 문리대로 진학해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도 여전히 성악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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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저널21
선생은 그 시절을 잠시 회상하였다. " 그 때는 무조건 노래가 좋았어. 내가 1950년도 초에 전시 육군 군악 학교를 졸업하고, 또 해군 정훈 음악대에서도 활동했는데 거기에는 지금의 내노라하는 유명 성악가들이 다 모여 있었지. 그 중에서 내가 제일 막내격이었어. 그런데 막내인 내가 중요한 오라토리오 solo는 거의 도맡아서 하고 있었지.
1953년 초 어느날 나운영 선생이 날 찾아와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를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시는거야. 그래서 왜 나한테 부탁하시냐고 했더니 내 소리는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표현하는게 참 좋다고 하면서 불러달라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그 노래를 가장 먼저 부르게 되었지."
그는 1955년에 파리 소르본느 대학으로 가서 음성학을 시작으로 10년동안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1958년에는 '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에 합격했다. 이 음악원은 각 국립 음악원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1등들만 모여서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 곳이다.
또, 프랑스 유학시절과 이태리 유학시절 동안 독일 리트와 프랑스 예술가곡계의 거장 샤르 빤제라 ( Charles Panzera), 세계적인 테너 디스테파노의 선생이자 ' Bel Canto Italiano'의 저자인 아드리아노 또끼오(Adriano Tocchio),세계적 피아니스트 파바레또( Favaretto-테발디, 질리 등의 반주자), 깜뽀갈리아니( Campogagliani-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사사받음). 이반 만또바니 (Ivo Mantovani), 쥬세뻬 데 쁠라또 ( Giuseppe de Plato) 등 수많은 세계적인 거장들에게 사사받고, 각종 유명한 국제 콩클의 1위를 휩쓸었다.
선생은 이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 자그마한 동양인이 콩클에 나오기만 하면 1위를 하니까 다들 신기하게 봤어. 그리고 1977년 부터 1983년 까지 이태리 스칼라 극장에 솔리스트로 뽑혀서 활동할 때는 아주 굉장했지. 그 때는 그 유명한 레오누치랑 같이 오디션 보고 활동하면서 ' 세빌리아의 이발사' 의 주역으로 내가 뽑혔어. 이게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냐면 전세계 매스컴이 떠들썩 하고 일본에서는 초청을 할 정도였어."
©문화저널21
기자는 갑자기 디 스테파노, 마리아 델 모나코 등 전설적인 인물부터 근래의 까레라스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단순히 알고 지내는 정도가 아닌, 아주 친근한 관계를 갖고 있는 선생의 사적인 얘기가 궁금해 져서, 그 중의 한 가지를 부탁했다.
" 마리아 델 모나코는 내가 이태리에 가면 어디에 있든지 당장 나한테 달려왔어. 한번은 내가 밀라노에 갔을 때인데 그때가 모나코가 죽기 몇년 전이었어. 그가 투병생활 하고 있을때지. 그런데도 이태리 남쪽 지방에 있다가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 몸으로 거의 하루종일 기차를 타고 나한테 왔어.
그래서 거기에서 같이 지내면서 모나코 운동 시키느라고 같이 조깅도 하고 그랬지. 한참 뛰다가 그에게 용기를 주느라고 내가 일부러 뒤쳐지고 하면 그가 아주 의기양양해 하면서 좋아하곤 했어. 그 모습이 생생한테 몇년 뒤에 죽었지." 선생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면서 앞으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문화저널 21에 선생의 에피소드들을 부탁했더니 아주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번엔 선생이 영남대 학장과 서울 시립 오페라단 단장을 맡고 있을때의 얘기를 들어봤다.
© 문화저널21
" 그 때는 지방이랑 서울에서 동시에 일하느라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 특히 시립 오페라 단을 1985년에 창단해서 13년간 맡았는데, 그 때 많은 대형 오페라를 한국에서 초연시켰고, 최현수, 고성현 등 그때 발굴해서 키운 수많은 성악가들이 지금은 아주 유명한 스타가 되었지.
그 땐 사람들이 나한테 ' 스타 제조기' 라고 부를 정도였어. 그런데, 난 스타 제조기가 아니고, 내 스승인 이 인선 선생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어. 이 인선 선생님은 한국 최초의 오페라 제작자이고,
한국 오페라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하신 분이야. 그 뜻을 계승해서 나도 한국 오페라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내 사비까지 다 쓰면서 몸을 아끼지 않았어. 또, 단장인 나는 절대로 무대에 서지 않고, 오직 다른 성악가들 에게만 기회를 주었어. 그때도 나는 왕성하게 활동 할 때여서 얼마든지 내가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수 있었지만, 내가 뒤에서 뒷받침해 준다는 철칙은 꼭 지켰지. "
이렇게 이 인선 선생의 한국 오페라를 위한 희생 정신은 김신환 선생에게 까지 이어져, 그 시기는 바로 한국 오페라계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선생은 오랜 외국 생활로 기존 한국 성악계의 텃새 속에서도 당당히 1978년 ' 세종 문화 회관 개관 연주회' 에 초청받아 연주를 하였다. 세종 문화 회관 과의 인연은 2002년까지 이어져 2002~2004년 까지 세종문화회관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기간 중에 선생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음향 보정 장치를 넣어서 극장을 리모델링 한것과, 리모델링후 2003년 말에 3개월간 ' 재 개관 Festival' 공연을 기획했는데, 이 3개월 간의 공연들은 지금도 ' 전무후무한 공연'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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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전문 경영인이 아닌 예술인으로서 세종문화 회관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극장으로 만들기 위해, 또 예술가들의 권익과 대우를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 세종문화 회관에서 가수들 공연은 왜 안되냐고 난리였어. 그런데 극장은 파이프 오르간도 있고, 또 여러가지로 체육관이나 다른 용도의 극장과는 시설이 아주 틀려. 그런데, 소리의 위력은 어느정도냐 하면 소리를 크게 내면 천장의 전구가 깨질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하거든. 그 소리를 극장에서 낸다고 생각해봐. 여러가지 요란한 전자 악기들, 또 계속해서 터지는 각종 폭죽들...
그런 공연을 하게 되면 최고의 악기와 시설로 갖추어진 극장이 망가지게 되겠지. 그래서 대중음악 공연은 안된다는 거야. 그런데 이 미자나 패티 김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요란한 공연을 안하잖아. 그래서 그 사람들 정도는 괜찮다고 했었지. "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기자는 클래식만 예술이고 대중음악은 예술이 아니냐고 하는 논란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자는 또, 성악계가 유난히 어려운 이 시기에 성악회 회장을 맡은 선생에게 계획을 물어보았다. " 내가 레슨 받았던 이태리 깜뽀갈리아니 선생이 1983년에 이태리 TV 방송에 나와서 이렇게 말했어. 앞으로 성악의 중심은 이태리에서 타민족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아마 한국이 될것이다 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국엔 우수한 성악가들이 아주 많아. 그런데, 아직 하나가 안되어있어. 나는 한국 성악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서 성악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좋은 공연을 많이 기획해서 한국 성악계의 위상을 높이는게 내 계획이야. 또, 이 성악회라는 기구를 통해 오페라 진흥 공사를 만들어서 ' 성악의 집' 을 만드는게 내 꿈이지. 영화, 문학 등 다른 분야는 이런게 다 되어 있는데, 성악계는 아직 안되어 있어."
© 문화저널21
마지막으로 기자는 선생에게서 빼놓을수 없는 벨칸토 (Bel Canto) 에 대해 물었다. " 벨칸토는 한마디로 노래를 최대한 아름답게, 소리를 정화시켜서 부르는 거야. 벨칸토 시대후에 성악가의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베르디에 반발해서 ' 사실주의' '현실주의' 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말하듯이, 소리지르 듯이 노래를 하는거야. 한 마디로 사실주의는 벨칸토를 파괴시키고 연극적인 면을 살려서 노래하는 거지.그러다가 지금은 이태리가 다시 옛날의 벨칸토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
그리 짧지않은 시간동안 기자의 질문의 한결같이 답해주는 선생의 모습에서 기자는 선생의 열정과 자상함을 동시에 보았다. 그리고, 끝으로 이 거장의 뒤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성악가들에세 선생은 아주 강하게 자신의 신념을 말하였다.
" 성악도 자기 수양의 세계가 필요하고,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해. 그저 소리만 내는 사람은 소리쟁이에 불과해. 성악가는 절대 소리쟁이가 되어서는 안돼."
문화저널21 / 음악전문 정원주 기자/ 사진 최재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