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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북의 봉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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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균 논설위원(문화칼럼)[세계일보] 1995-12-30 05면


 ◎「장기려 박사 순애보」 분단이 낳은 슬픔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수절의 남편」으로 살다 간 장기려 박사는 별세하기 얼마전 미국의 조카로부터 선물을 전해받는다. 북의 늙은 아내가 보낸 카세트 테이프였다. 거기에는 젊은 날 아내와 함께 곧잘 합창하던 노래 「울밑에 선 봉선화」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통일이 될 때까지 죽지 말고 꼭 살아달라」는 애절한 육성도 동봉해 있었다.

애수의 가곡 「봉선화」는 나라를 잃었을 때는 식민지 백성의 비통한 절규로 방방곡곡을 울렸지만 여인들에게는 그저 참고 살아가는 인종의 부덕으로 부르는 서럽고도 어여쁜 노래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노래가 오래도록 여러사람에게 애창되는 것은 그 곡이 지닌 민족정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 「울밑에 선 봉선화」는 3절에 이르러면 슬픔을 넘어 묵묵히 체념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여인의 한을 잔잔하게 담는다. 『북풍한설 찬바람에/네 형체가 없어져도/평화로운 꿈을 꾸는/너의 혼은 예 있으니/화창스러운 봄바람에/회생키를 바라노라』가 그 구절이다. 울밑에 갇혀 꽃은 시들고 아름답던 모습이 사라져버린 봉선화는 곧 남편을 남으로 보낸 수많은 북의 아내들의 상징이다.

60대 이상이 지니고 있는 어릴 적의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추억은 액자속에 걸린 낡은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모습이다.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여 이듬해까지 곱게 간직하던 여인들은 이제 가고 없다. 저만치 가버린 세월의 탓도 있지만 그 시절 아낙네들의 삶이란 「울밑에 선 봉선화」처럼 드러나지 않게 살다 갔기 때문이다.

장박사의 거처에는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한장은 평양에서 함께 찍은 30대 중반의 아내모습이고 또 한장은 80대의 늙은 아내 사진이다. 봉선화가 한창 무성하던 때의 모습과 이미 시들었지만 「평화로운 꿈」을 버리지 않은 인자한 표정의 사진을 함께 진열한 것이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장박사는 혼자몸으로 다섯남매를 기른 아내의 고생을 항상 생각했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열흘후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남으로 왔다. 장박사가 탄 군용차를 보고 쫓아오는 아들에게 『곧 돌아올테니 기다려라』고 타이른게 가족과의 마지막이었다. 「열흘간의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주위사람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서 혼자 산다』고 했다. 감히 하느님이 찍지워준 아내를 버리고 어떻게 재혼할 수 있느냐고 주위의 권고도 거절했다.

지금 우리사회는 부부가 서로 배신하고 부정한 행위를 일삼는 풍토가 만연해서 이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모두 사랑이 메마른 탓이다. 한 가정을 지탱하는 힘은 오직 사랑이어야 한다. 자그마치 40년이 넘도록 북에 남겨둔 아내를 그리고 살다간 장박사의 순애보는 이 시대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북의 가족을 그리며 재혼을 마다하고 여생을 보내는 이산가족은 많지 않다. 혜촌 김학수 선생은 우리의 민속을 작품으로 재현해서 알리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혜촌선생이 북에서 피난온 후 팔순이 되도록 40년넘게 수절하면서 작품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장박사처럼 통일이 되면 마치 출장을 왔다 가는 것처럼 툭툭 털고 일어나 아내곁으로 가기 위해 집 한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림을 그려서 얻은 수입은 모두 고아와 불우한 이웃을 위해 바쳤다. 지금까지 그가 기른 불우청소년은 수없이 많지만 박사학위를 받은 지도적 인물만도 40명이 넘는다. 얼마전 작고한 L장관도 혜촌선생이 뒷바라지한 불우했던 소년이었다.

수년전 북한을 방문한 미국국적의 어느 목사가 역시 혜촌선생 부인의 사진을 가져왔다. 몰라보게 변한 아내의 모습을 보고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목사 역시 혜촌선생이 기른 양아들이었다. 사랑을 강조하고 부부는 평생을 해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시 남북회담이 열릴 때마다 가족상봉을 기다렸다. 그들의 꿈은 왜 실현될 수 없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 북한은 외부의 원조가 없으면 모두 굶어죽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안으로 빗장을 더 단단히 잠그고 한사코 문을 열지 않는다. 이 지구상에서 같은 민족,아니 혈육을 나눈 부모형제끼리 만날 수 없는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 장박사 말고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산가족들이 한을 품고 눈을 감을지 모른다. 연로한 탓으로 설사 몇년후에 교류가 있다 해도 그 때는 모두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

이념의 모진 바람으로 꽃은 떨어지고 「낙화로다 늙어졌다」고 눈물지우며 남쪽 하늘을 바라다 보는 북의 마지막 봉선화가 꿈에도 그리는 가족과 만나기를 빈다. 이 세상의 사랑을 저 세상으로까지 이어가겠다는 신앙이 보통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세속적인 사랑이란 우선 만나는 것이다. 올해도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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