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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오후여담>보리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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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09-02-04 38면  총03면  오피니언·인물    1132자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박화목이 1951년에 지은 시 ‘옛 생각’ 전문이다. 작곡가 윤용하는 이를 건네받은 지 3일 만에 곡을 붙여 ‘보리밭’으로 제목을 바꿔 달았다고 한다.

단칸방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1965년에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윤용하와 2005년에 81세로 타계한 박화목이 각각 29세와 27세의 나이에 불후의 명가곡 ‘보리밭’을 만든 것은 6·25 전쟁 와중이었다. 종군 음악가와 종군 작가로 활동하던 두 사람이 후세에 남길 만한 가곡 한 곡을 함께 만들자는 데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각각 황해도 은율과 황주 출신으로 8·15 광복 후 월남해 시대적 고민과 고통까지 서로 나누며 지낸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리라.

보리밭이 아름답고 서정적인 것은 보릿고개가 상징하는 궁핍의 시대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푸른 보리밭을 통해 봄·생명·희망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인 사실도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겨워던 시절이나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해나가야 할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30년 넘게 보리밭을 주로 그려와 ‘보리밭 화가’로 일컬어지는 한국 화단의 중진 이숙자 화백이 보리밭에 각별한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제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살아나 찬란한 봄을 열 뿐만 아니라 겨울을 나는 동안 밟아주어야 낟알을 더 튼실하게 맺는 경이로운 생명력이 더없이 아름답게 비친다는 것이다. 보리가 파도를 이루는 밭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보리밭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전라(全裸)의 여인 역시 이 화백이 즐겨 그리는 이유 또한 “보리밭은 언제 봐도 싱그러운 생명력과 로맨스를 지녔기 때문에 생명이 잉태하는 이미지를 살려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봄이 시작된다는 절기인 입춘(立春)이 4일, 오늘이다. 추위 속에서도 들녘의 보리는 더 파릇파릇해지고 있다고 한다. 보리밭이 생명과 희망의 봄을 맞이하듯이 경제의 봄, 교육의 봄, 법과 질서의 봄 등을 맞이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 제자리에서 제 역할에 더욱더 충실해야 할 때다.

김종호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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