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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자서전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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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지난 24일 85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故) 오현명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행복한 성악가였다.

아름다운 우리 말에 가락을 붙인 가곡을 유난히 사랑해 '한국 가곡의 전도사'로 불리던 그의 이름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확실히 각인시킨 가곡은 변훈의 '명태'다.

그가 당당한 풍채에서 나오는 묵직한 바리톤 베이스의 저음으로 부르는 '명태'는 한국적인 해학과 재치를 한껏 드러내며 가곡의 새로운 매력을 선사했다.

'명태'하면 오현명, 오현명 하면 '명태'일 정도로 오현명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지만 오현명은 '명태'를 처음 접했을 때 노래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25일 발간된 그의 유고 자서전 '노래나그네 오현명 자서전-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세일음악문화재단 펴냄)에서는 '명태'와 오현명의 인연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

6.25 동란 중 대구에서 공군정훈음악대 대원으로 활동할 무렵의 오현명에게 UN군 제7군단의 연락장교로 복무하고 있던 변훈이 찾아온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담은 종이뭉치를 오현명에게 수줍게 던져주고 갔고, 그중에 바로 '명태'가 들어있었다.

"'악보를 보니, 그게 아무래도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야, 이거 무슨 노래가 이래?'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멜로디 같지도 않은 멜로디가 그 가사와 함께 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정겹게 느껴지게 되었다"

부산의 해군정훈음악대로 옮긴 오현명은 1952년 늦가을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부산의 한 극장에서 열린 '한국 가곡의 밤'에서 '명태'를 처음 불렀다고 회고했다.

당시 홍난파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 익숙해 있던 음악가와 청중들은 이 노래를 듣고 '노래 같지도 않은 엉터리'라는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랬던 이 노래는 1964년 10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있었던 대학생을 위한 대음악회를 계기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오현명은 회고록에서 "변훈의 '명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노래에 깃들어 있는 한국적인 익살과 한숨 섞인 자조와 재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며 "명태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냄새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그런 곡이다. 그 곡에서는 젊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들의 자조 섞인 신세를 명태에 비유한 한탄조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남긴 회고록에는 한국 가곡의 '전도사'로 나서게 된 계기도 상세히 설명돼 있다.

1963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김성태, 김순애, 윤이상, 김달성 등이 쓴 우리의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연 그는 "그 이전까지 독창회라고 하면 레퍼토리의 거의 전부를 외국 가곡이 차지했었다. 물론 나도 그런 통속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게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실제로는 그 내용도 모르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막말로 하자면 상대 여자의 성격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내 심장을 찔렀던 것이다"

책의 서문에는 그가 임종 직전까지도 노래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음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내 잠자는 머리맡에는 지금도 스스로 그려 작성한 10여 곡의 노래의 악보가 놓여 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독창회를 하겠다는 희망으로 2007년 4월 준비한 것들입니다. 그때의 희망은 그 사이에 '디미누엔도(점점 여리게)' 일변도의 진행을 해왔지만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욕구는 꺼질 줄을 모릅니다"

오현명의 회고록에는 이밖에 만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 가족과 친구, 제자들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 가곡과 오페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생생한 사진과 함께 수록됐다.

한편, 원로성악가 박상원, 박수길, 이규도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아 성악인장으로 치러지는 27일 장례식에서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피아니스트 정진우가 조사를 읽고, 제자들이 조가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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