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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한국가곡의 시대적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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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의 예술가곡

시와 음악의 결합으로 예술가곡은 탄생한다. 영혼이 깃든 시는 좋은 음률을 불러오므로 서로 다른 분야인 시와 음악이 합치되면서 제3의 예술인 '가곡'이 탄생되며 이는 더욱 강한 미학을 발휘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곡은 특히 우수하다. 작곡가들은 문학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시들을 노랫말로 선택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혼은 시와 일치가 되어 시어가 내포하는 바까지 혼이 깃든 음악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한국의 예술가곡은 1920년대 창가로부터 출발하여 30-40년대를 거치면서 예술미를 더해간다. 50년대 부터는 우리가락을 차는 움직임이 활발했으며 70년대 이후부터는 20세기 현대작곡법을 지향하는 곡으로 등장했다.
한편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작곡가 제2세대인 젊은 작곡가 세대와 대학생을 비롯한 작곡가 제3세대가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기악곡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예술가곡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따라서 6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가곡 작품활동은 주로 원로작곡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2. 창가에서 예술가곡으로
- 태동(19세기 말에서 1920년 이전)

한국에서 서양음악 이론이 처음으로 소개된 문헌은 조선시대 헌종 때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1788~?)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이다. 그는 여기에서 중국과 조선 고금의 사물을 고증하는 가운데 「성음위악변증설(聲音爲樂辨證說)」을 위시하여 음악에 관한 글을 17편 실었으며 이와 함께 서영음악의 기초이론을 소개하였다.

서양음악이 한국에 실질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1884년을 전후로 해서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아펜젤러(1858~1902)는 1885년에 배재학당을, 스크랜턴(1856~1922)은 1886년에 이화학당을, 언더우드(1859~1916)는 1886년에 경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최초로 근대교육을 실시하면서 음악을 창가(唱歌)라는 교과목으로 커리큘럼에 포함시켰다. 이때의 교육내용은 주로 찬송가와 부르기 쉬운 외국민요였다고 한다.

'창가'라는 단어의 어원은 1879년 일본에서 신교육령과 함께 문부성에서 소학창가집을 발간하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창가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시조, 잡가, 가사 등의 전통적인 형식이나 음률에서 벗어나 서양식 악곡형식과 함께 서양식 창법으로 부르는 노래를 뜻했으며, 초기의 창가는 개신교의 찬송가를 모범으로 하였다. 그러나 노랫말은 종교적인 데서 탈피하여 구한말의 민족적 비통함과 절망감, 또는 독립정신 등을 담은 사회참여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창가의 변천에 대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창가의 발생(1886~1890년경)

개신교 학교의 교과과정에 찬송가 및 외국민요를 비롯한 서양음악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부르기 시작함

②1890~1910년경의 창가

기존의 찬송가 선율에 노랫말만 세속적인 내용으로 지어 불렀다. 구한말의 민족적 슬픔, 독립정신, 애국가
운동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③1905년 김인식의 '학도가' 1906년 최남선의 '철도가' 1911년경의 안창호의 거국가(去國歌) 등 발표

④1920년대, 창가에서 예술가곡으로

창가가 예술가곡, 동요, 유행가로 분화되기 시작한 시기임

3. 1920년대의 예술가곡
- 초기의 예술가곡

한국의 예술가곡은 어린시절에 기독교 계통의 교육기관이나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해방 후까지 한국의 교육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음악가들에 의해 태어났다. 아래의 네 곡은 모두 이들의 초기작품에 속한다. 단순한 창가조에서 예술가곡으로의 발돋움은 이와같이 당시의 최고 지성인이며 선각자였던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획기적 발전이었다.

이때의 예술가곡의 특징으로는

①선율의 형태나 선율에 따라 화성적으로 받쳐주는 피아노 반주에서 당시의 찬송가 및 외국민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②작곡자는 선율의 흐름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띠고 있어 노랫말의 악센트를 깊히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이 때의 작품으로는 홍난파 봉선화 (1920), 박태준 동무생각(1922), 현제명 고향생각(1922), 김세형 야상(夜想)(1925)등이 있다.

4. 1930~40년대의 예술가곡
- 우리가곡의 성숙기


1930년대에 들어서면 앞 시대에서 활약을 시작한 홍난파, 박태준, 현제명 외에 채동선, 이흥렬, 김동진, 나운영 등 한국 최고의 서정 작곡가들의 활동이 시작된다. 물론 1940년대에도 이들의 활동은 계속되며, 김성태, 임원식의 낭만적인 작품들도 함께 합류한다.
현재까지 국민들에게 애창되며 연주회의 주요 레파토리로 등장하는 한국의 예술가곡이 정착되는 기틀이 이 때 마련되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테너 이인범(작고), 소프라노 이관옥(작고), 소프라노 김천애(작고), 바리톤 오현명, 테너 안형일 같은 원로성악가들이 이때부터 우리가곡의 전파자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예술가곡의 경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시기의 작곡가들은 현재까지도 우리 음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원로 작곡가들이며 해방 후 한국 음악교육을 이끌어 온 주역들이다.

②시대배경이 일제 시대였던 만큼 짙은 애수를 띤 서정가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두남의 '선구자(1932)'는 독립투사의 영혼을 달랜 곡으로 씩씩한 기운이 감돌며, 김동진, 나운영, 김순애 등이 10대에 작곡한 '봄이오면'(1931), '아 가을인가'(1936), '네잎 클로우버'(1938)등을 비롯한 몇몇 곡들은 밝고 맑은 정서가 흐르며 임원식의 '아무도 모르라고'(1940)와 나운영의 '달밤'(1946) 등에서는 낭만적인 정취가 보인다.
1940년대부터는 우리고유의 소리를 찾으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조두남의 '새타령'(1940)과 '접동새'(1940), 운이상의 '고풍의상'(1945?), 그네(1945?) 등이 있다.

③노랫말로 사용된 시는 이은상의 시가 가장 많았으며 박목월, 김안서, 김동환, 김동명 등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시인들의 작품들이 많았다.

  가)1930년대의 작품
      홍난파 -- 성불사의 밤, 장안사, 사랑, 봄처녀, 옛동산에 올라
      채동선 -- 그리워
      현제명 -- 그집앞
      이흥렬 -- 바위고개, 어머니의 마음, 코스모스를 노래함
      조두남 -- 제비
      김동진 -- 봄이오면 , 가고파

  나)1940년대의 작품
      현제명 -- 희망의 나라로
      이흥렬 -- 꽃구름속에
      김성태 -- 동심초, 산유화
      김대현 -- 자장가
      임원식 -- 아무도 모르라고
      나운영 -- 아 가을인가, 달밤
      김순애 -- 네잎클로버




5. 1950~1960년대의 예술가곡
-한국의 가락을 찾아서

195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예술가곡이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나 작곡기법적으로나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띤다. 이 시기에 작고된 예술가곡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뉘어진다.

①6.25 동란을 배경으로 한 변훈의 '떠나가는 배'(1953)를 비롯해서 민족의 애환을 담은 애조 띤 가락의 가곡들이 널리 불려졌다.

②김순애의 '4월의 노래'(1953)와 '그대있음에'(1964), 김규환의 '님이 오시는지'(1966), 윤용하의 '보리밭'(1952),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1953), 장일남의 '비목'(1963) 등과 같은 개인적 정서를 노래하거나 분단된 북녘땅을 그리워 하는 서정적인 가곡들이 활발히 작곡되어 매스컴에 의해 널리 불려졌다.

③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953)와 같은 예술성을 보유한 한국적 찬송가들이 40년대 말부터 작곡되기 시작하여 찬송가이자 예술가곡으로 애창되었다.


④1950년대 초반부터는 의식적으로 한국의 가락을 찾는 움직임이 돋보인다. 변훈의 '명태'(1952)는 중간부에 장타령을 연상케하는 가락이 섞여있으며 정회갑의 '입맞춤'(1960)은 판소리와 같은 선율과 해학적 분위가가 보인다. 또한 노랫말은 이름있는 시인에서부터 아마추어 시인, 작곡자의 자작시까지 넓은 폭을 보여준다.

6. 1970년대의 이후의 예술가곡
-작곡기법의 다양성, 음악회용 음악으로

1970년대 이후에도 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김연준의 '비가'(1970)와 같은 애조 띤 곡조가 꾸준히 작곡되었고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김동진의 '목련화'(1974)나 김연준의 '청산에 살리라' 등처럼 서정적이고 긍정적인 곡조는 전 시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풍요로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 시대와 큰 차이가 없으나, 김동진의 '가고파 후편'(1973)이 전편과 비교되듯이 악곡의 내부로부터 편안함과 자신감이 내 비쳐지고 있다. 이는 일제시대, 6.25 동란 등 민족의 어려움을 거쳐서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찾은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작곡가나 시인들 역시 그들의 연령이 대부분 50대로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위치에서 정열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곡의 흐름에 긍정적이며 꿋꿋한 기상이 깃들게 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이 시기에 나타난 두 번째 특징은 민요나 판소리 등 한국 고유의 전통곡을 원본을 거의 다치지 않고서 예술가곡으로 승화시키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백경환의 '거문도 뱃노래'(1977?)와 전인평의 '화초장타령'(1991)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은 전통의 미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밸칸토 창법으로 부르는 '진 한국적인 예술미'를 발휘한다.

70년대에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작곡가 제2, 제3세대들에 의해서 서양의 20세기 현대기법을 사용한 가곡들이 대거 출현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예술가곡은 서양의 고전 낭만주의적 작곡이론에 의거한 전통적 악곡형식에서 벗어나 무조주의, 음렬주의, 아방가르드 쪽으로 향하였다. 이런 현대적 곡들은 아직 대중의 호응을 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우라는 우리시대의 변화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70년대 이후에 작곡된 소위 실험적 현대적 작품들은 아직 공적으로 악보가 출판.배포되어 있는 것이 드물고 작곡가 자신들이 악보를 개인 소장하고 있는 상태가 보편적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경향이 대중의 기호와 거리가 있어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곡이 드물며 어떤 곡이 걸작인지에 대하여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끝]

참고문헌 : 김미애 저 [한국예술가곡] / 내마음의노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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