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누나야 - 월북작곡가 안성현 재조명
안성현, 그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 한 음악가의 천재적 생애를 노래비로 읽는다
김 종 / 시인
‘나주’하면‘남평’, ‘남평’하면 ‘드들강’, 분명 드들강의 풍치는 산자수명(山紫水明)이 제격이겠다. 그 강 푸른 솔밭 「탁사정」발치에 명품 조형물이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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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노래비 조감도
이름하여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노래비. 이 노래비 주인공은 나주(남평)의 풍광을 받아 성장한 불세출의 음악가 안성현(安聖鉉, 1920~2006) 선생이다.
금년 초에 선생의 노래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최정웅)가 결성되고 짜여진 일정대로 조각가가 선정되는 등 건립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아시는 것처럼 ‘엄마야…’는 이 나라 민족시인 김소월의 창작시이다. 이 시에 60여 년 전 곡을 붙여서 세인들의 운률로 회자되었다는 것은 사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터넷 통계에 소월의‘엄마야…’를 가사로 작곡한 저작권자가 24명에 이를 만큼 안성현 이후 이 시에 곡을 붙이는 일에 작곡가들이 앞 다투어 참여했던 것이다.
○ 초등학교 음악 교재에‘엄마야 누나야’실려
안성현의‘엄마야…’는 그에게 음악적 재능과 감성을 부여한 고향땅 남평 드들강 모래밭이 창작 이미지로 작용했고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을 개연성(probability)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한결 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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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악보
이 노래는 1948년 발간된 안성현 제2작곡집의 한 곡목으로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필두로‘부용산’(박기동 시),‘낙엽’(안성현 작사, 작곡)‘앞날의 꿈’(조희관 시), ‘진달래’(박기동 시),‘내고향’(조희관 시) 등 작곡가의 고향 그리는 정감에다 민족의 슬픔과 암울함을 희망의 시간으로 환치해가는 23편의 작품이 담겨져 있다.
이들 중 ‘부용산’이 지닌 음악적 호소력은 이 노래의 특별한 사연에 접하지 않고도 애수에 젖고 절절한 비감에 물결쳐 간다. 그리고 안성현의 작곡들은 해방직후 (미군정청) 발간된 초등학교 음악교재에 ‘엄마야 누나야’가, 중등 음악 교재에‘진달래’3부합창곡이, 당시 이희성 교수의 고등학교 음악 교재에 ‘봄바람’등이 올라 있었다.
특히 ‘봄바람’은 안성현이 서울로 옮겨간 뒤에 항도여중 합창단이 광주사범학교 김형구 음악교사의 인솔로 전국음악제에 출전하여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초·중·고등 각급 학교 교재에 안성현 작곡 작품이 수록되어 교육되고 그의 작품으로 출전한 합창단이 전국 음악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할 만큼 객관적 평가에 나아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매년 2차례의 작품발표회와 작곡집의 발행 등 그의 음악적 활동은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이며 특출하였다.
안성현은 1920년 7월 13일 전남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에서 태어났다. 남평초등학교를 제21회로 마치고 청소년기를 이곳 고향에서 보낸 그는 17세가 되던 1936년말 아버지 안기옥(安基玉)을 따라 함경도 함흥으로 이거해 갔다.
안성현의 아버지는 자신만의 가야금 산조를 창안할 만큼 독보적인 국악인이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머나먼 북쪽으로 주거지를 옮긴 것이다.
집안 아저씨뻘이라는 안막(安漠)은 리얼리즘 문학 비평가이며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와는 부부사이였다. 그러니까 안성현의 가계는 두루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함흥 이거 이후 안성현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東京) 도호음악학교(東邦音樂學校) 성악부(테너)를 마쳤다. 곧바로 귀국한 안성현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웃한 광주로 옮겨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 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면서 바쁘게 생활하였다.
안성현을 기록에 남긴 『신동아』(2001년 11월호)의 글은 호주에 살고 있는 윤필립 시인의 집필이며 ‘벌교〈부용산〉노래에 얽힌 사연’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글쓴이는“꽃다운 나이에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면서 쓴 시 ‘부용산’(芙蓉山)에 월북음악가 안성현이 곡을 붙이고 그 노래를 빨치산들이 즐겨 불러서 일명‘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이유로 한 평생을 쫓기고 얻어맞고 천대받다가 끝내 이역만리 호주로 떠나와야 했던 박기동(朴璣東) 시인을 소개”한다는 집필의도를 담고 있다.
박기동 시인은 1957년 목포사범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고 이루 형언할 수 없었던 가시발길의 생애가 이어졌다. 툭하면 가택수색과 연행, 구금을 당해야 했다.
1980년에 겪었던 죽음 직전까지의 사연 등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번역일을 하면서 몇 차례 시집출판을 시도했건만 ‘번번이 원고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자유의지와 더불어 다시 한 번 시창작을 시도해보겠다는 궁여지책’으로 1993년에 호주로 이민 간 사연 등을 소상히 소개하고 당초 1절 밖에 없었던 ‘부용산’의 가사가 52년 만에 2절을 추가하여 태어나게 된 사연 등도 담겨져 있다.
그러면서 박기동의 안성현과의 소식소통 유무, 안성현의 월북으로 인한 신산한 세월에 대한 소감 등등이 술회되어 있다.
○ 시보다는 곡이 워낙 절절한‘부용산’
2002년 6월 3일자 『광주타임스』에 보도된 김선기 실장의 글에는 ‘월북작곡가’라는 이유로 해서 “반세기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나주(남평)출신 ‘부용산’의 작곡가 안성현을 집중 조명 한다”면서 『신동아』가 안성현을 부분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글은 안성현의 예술과 인간을 전반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이 글은 제목부터가‘안성현 그는 누구인가?’로 시작된다. 이어 1999년 5월 29일 밤 목포의 대형 레스토랑 ‘뉴프린스’에서 가진 송광선씨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초청음악회에서 예의 ‘부용산’이 불렸고 피날레에서 목포시립합창단이 이 노래를 합창한 일, 그래서 그날 밤은 ‘부용산’ 광복음악회라 명명할 만큼 ‘부용산’의 의미부여가 약여하였다.
빨치산이 ‘부용산’을 애창하면서 그로 인해 파생된 작시자의 인생유전,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과 소녀애제자의 죽음 등이 교묘히 오버랩 되면서 시가 쓰여졌고 안성현이 몰래 박기동의 시노트를 가져다 곡을 붙인 일, 목포에서‘부용산’행사가 있은 직후인 6월 하순 작시자의 고향인 벌교에 초청된 가수 이동원이‘부용산’을 시창하고 노래비를 세운 일, 이보다 한발 앞서 ‘삶과 꿈 싱어즈’가 영남에서는 처음으로 포항공대와 포스코에다 자리를 펴고 공연한 일, 안성현 제2작곡집의 내용과 발굴 경위, 성동월 여사와의 결혼 등이 담겨졌고 지역문화예술인들에 의해 ‘부용산’이 뮤지컬로 부활되고 있다는 것 등은 이 글로 가름하기로 한다.
『신동아』, 『광주타임스』와는 달리 또 다른 문장은 안성현의 목포항도여중 제자였던 김효자 경기대 교수의 증언으로 김성우 한국일보 논설고문이 ‘부용산’의 진원지를 밝혀내고 있다.
사연인즉 안성현이 광복직후 항도여중 음악교사로 부임하고 김효자와 같은 반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아주 예쁘고 조숙한 소녀였다. 그는 늘 수석이었고 “책을 많이 읽어 자작시가 문예지에 당선된 적도 있었던 문학소녀”였다.
이 학생이 여중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박기동 시인이 애통해 하는 시를 썼고 안성현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실인즉 이보다 앞서 박기동 시인의 누이동생도 24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어‘벌교의 부용산에 장사 지내고 돌아와’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나저나 ‘부용산’은 빠른 전파력으로 이 지역 남도지방에 애창되었고 급기야 작곡자가‘월북’하고 빨치산이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면서 작시자는 크나큰 우여곡절을 겪는다.
작시자는 이 같은 사연에도 불구하고 “내 깐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에 대한 무상을 노래한 것”이라 했고 “시보다는 곡이 워낙 절절해서 당시의 시대상하고 맞아 떨어졌는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간 것”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런 애창곡이 되고 나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을만큼 작시자의 기구한 삶이 꼬리를 이어갔다.
이리 보면 역설적이게도 정든 처자가 살고 있는 남쪽 땅이 차단되어 북에서 가족 그리는 생을 마쳐야 했던 작곡가 안성현의 생애적 시간이 요행이었다 할 것인가. 안성현도 남한에서 살았다면 불온한(?) 곡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작시자 박기동과 별반 다르지 않는 시련으로 점철되었으리라.
박기동의 말마따나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좌경이라면 좌경시인일 수 있겠다”는 체념어린 단정과 “난 좌파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지한 사람”이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슨 사상 같은 것을 논하겠느냐“는 반문 앞에 차라리 두 다리 뻗고 토해내는 통곡이 상책이라 할 것인가.
○ 붉은 점이 치명적인 시대, ‘월북’표현은 신중해야
작시자든 작곡가든 자신의 창작의도와 무관한 것은 당자들과 별개이다. 작품은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전적으로 독자의 소유다. 그리고 비극의 보다 근원적인 민족적 문제가 엄존한 현실에서 박기동 시인이나 안성현 작곡자 개개인에게 사상의 올가미를 들이대는 것은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다.
사상에 붉은 점이 찍히면 그 자체로 치명적이던 시대에 숨소리도 죽이며 엎드려 대역죄인처럼 살았던 것만도 가슴 치는 회한이 되는데 개인의 문제를 함부로 좌경이니 우경이니 다루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두고만 볼 것인가.
필자는 안성현을 써낸 그간의 문장들을 들여다보고 ‘월북’문제를 포함 3가지쯤의 관심사를 살피기 위해 김재민(85. 원로음악인) 선생을 두 차례에 걸쳐 면담하였다.
노령임에도 선생은“안성현에 대해서는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마지막 모습을 증언해 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증언으로 안성현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될 일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소상하게 말해 주겠다는 자상함까지 보이셨다.
첫 번째 (2005.6.14)만남에서는 무슨 글을 쓰려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어서 별 생각 없이 안성현의 생애적인 일을 주변에서부터 순서 없이 듣고 메모했었다. 그러나 막상 메모를 정리하다 보니 안성현에 관한 글 한편을 써야 겠다 생각되어 설문을 만들었고 두 번째(2008.8.6)로 선생을 모셨다.
선생은 드리는 질문 요항을 자신의 일처럼 시종 성실하고 침착하게 짚어가며 말씀해 주셨는데 필자가 혹여 잘못 정리한 부분은 없었을까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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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안성현 작곡가
〈김재민 선생과의 설문과 대답〉
1. 이미 신동아, 남도일보, 김효자 교수 증언, 노래비 취지문 등에서 음악가 안성현 선생의 예술과 생애적 문제가 부분적, 전체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는지요?
보지 못 했다
2. 안성현은 나주(남평)가 낳은 천재음악가입니다. 이분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노래비가 선생의 고향 남평 드들강변에 세워집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은?
환영한다. 진즉 세워져서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알게 했으면 좋았겠다 했는데 이제라도 빛을 보게 되어 기쁘다.
3. 안성현 선생과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나셨는지?
1950년 5월이면 6.25직전이고 안성현 선생이 목포사회의 교직에서 떠나 서울 등지에 있을 때였는데 목여중 강당에서 이 학교 음악교사 이득주의 피아노반주로 안성현 독창 발표회를 가졌었다. 그때 안성현과는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 날의 그 무대에서 안성현은〈엄마야…〉는 부르지 않았지만 〈부용산〉,〈진달래〉,〈내고향〉등 노래가 이어질 때 성량이나 가창력은 대단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목포 학생이나 시민들 사이에는 〈부용산〉을 애창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리고 나와는 7살 연하인 내 처가 항도여중에서 안성현 선생에게 배운 제자여서 그런 차원에서도 얼마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4. 안성현 선생에 대한 인상은?
미남형이고 170Cm 정도의 체구에 인상부터가 대단히 호감을 갖게 하는 분이었다. 친절했으며 대인 관계가 원만했다. 한 마디로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그의 더 많은 음악활동을 지켜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
5. 안성현 선생에 대해 기억하시는 일들은?
안성현 선생을 1950년 5월 자신의 독창회 때 만나고 그 후 몇 차례 더 만났었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이 목포에 들어온 것은 광주보다 하루 늦은 7월 24일이었다.
목포에 진주한 인민군이 목포시내 음악교사들 소집령을 내려서 갔더니 일제 때 신사당이 YMCA회관으로 바꿔져 있었고 중년의 작가 박화성 선생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 안성현도 나왔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인민군은 계속 문인, 음악가 등등 예술인들을 부르고 목적에 맞게 배치해 지시를 내렸다. 음악인들에게는 이 공장 저 공장에 오르간을 짊어지고 가서 악보에 맞춰 인민군 노래를 가르치라 하였다.
노동자들은 저마다‘우리들 세상이다 활개 치는 판’이어서 노래 가르치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못했다. 인민군들은 모든 우선순위를 투쟁경력으로 보았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투쟁실적이 없기는 나도 안성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목포에서 피아노상을 경영하는 사람이 음악동맹위원장이었는데 안성현은 그 자보다 음악적으로 실력이 월등했지만 투쟁경력이 없어서 멸시 당하는 것을 보았다.
6.25는 계속되는 인민군의 진주로 미군이 목포 유류저장 창고를 폭격하는 일이 있었고 시민들은 피난을 가는 등 불안한 나날을 어찌 보낼까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목포시내에 함포사격이 개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공포분위기가 커져 있었다.
우리 내외가 전쟁을 피해 목포에서 20㎞쯤 떨어진 일로 농가에다 문칸방 하나를 얻어 놓고 신혼부부로 기거하고 있는데 그 집에서 안성현과 조념(趙念)을 함께 만났다.
조념은 안성현이 직장을 그만두고 뚜렷한 이유 없이 (추정컨대 음악활동을 전국적으로 넓히기 위해)서울로 옮겨가던 무렵 목포중 음악교사로 내려온 작곡자 겸 바이얼린리스트였다.
6. 안성현 선생을 마지막 보신 날은?
현재 한국에서 안성현 선생의 목포에서의 생활이나 입북할 때까지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할 사람을 내 자신뿐이라고 확신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이틀 전인 9월 15일 최승희의 딸 안성희(安聖姬)가 평양에서 내려와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길을 가던 친구가 안성희 무용발표회의 리셉션 자리에 같이 가자고 했다.
무용도 안 봤는데 참석하기가 좀 뭐하지 않느냐니까 그래도 본셈치고 참석하자해서 시간에 맞춰 가게 되었다. 강당에는 학생용 걸상으로 행사장이 차려졌고 장내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무심코 앉은 것이 주인공 안성희의 옆자리였는데 조금 떨어져서 안성현의 모습도 보였다. 내심 좋은 자리 차지했다는 생각과 안성희가 북에서 유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성희는 건강한 체구에 재치도 있었지만 어머니 최승희 처럼 예쁘지는 않았다. 안성희의 스피치 차례였다. 안성희는 과시하러 그랬는지“김장군(김일성 주석을 가리킨 듯)이 가끔씩 우리 집을 온다.
제집은 한옥인데 청소상태나 정리가 잘 돼있으면 ”오늘은 깨끗하군“ 지저분하거나 청소가 덜 돼 있으면 ”왜 이리 사노“ 등등의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김일성이 최승희를 사모해서 어울린다드라는 말이 수긍되었고 김일성도 깨끗한 것을 좋아한 사람인가보다 싶었다.
발표회와 리셉션을 마친 장내에 촛불이 꺼졌다. 깜깜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도 현관으로 나가다말고 대기하고 있던 소련제 찝차 앞의 안성현을 만났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까 ‘안성희가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가자는데 그럴까 한다’하였다.
나는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성현을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으니까 미군들이 서울로 들어갔다면 평양 길이 끊어졌을 텐데 안성현은 어찌 됐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안성희가 평양에 있다는 풍문이 들려서 안성현도 무사히 평양에 도착했겠구나 생각했었다.
7. 안성현 선생 노래비 건립에 즈음하여 선생을 좌경음악인, 월북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아주 많이 틀린 말이고 그는 순수 로맨티스트에 음악적 수준이 대단히 높은 분이었다. 당시는 4년제 음악대학이 없었고 서울음대 전신인 서울음악전문학교 밖에 없던 때로 그의 작곡집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음악수준으로 봐서 안성현은 대학 교수감이었다.
그만큼 제대로 된 음악가였다. 그리고 안성현이 평양에 가던 9월 15일만해도 ‘월북’이나 ‘월남’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때는 부산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민군치하에 접수되어 목포에서 평양을 방문하거나 다녀온다는 말은 될지 몰라도 남과 북이 서로 분단된 상황이 아니어서 이 용어 자체가 없었을 때이다.
그리고 전쟁 상황이 돌변하면서 안성현이 평양 가겠다고 나선 이틀 후인 9월 17일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예측불허의 국면이 전개된 것이다. 이런 일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리 본다면 안성현의 평양방문 시점은 대단히 불운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북한에서 붙들린 상황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억북’이라는 말이 어떨까한다.
8. 이외에도 하시고 싶은 말씀은?
안성현은 대단한 음악가였다. 지금 보니까 안성현이 1920년생이라면 그가 평양 가겠다고 나선 것이 1950년이었으니까 남한에서 30년을 살아온 셈인데 그의 음악적 성과는 정말 놀랄 만큼 대단하다.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에다 한 작품 한 작품이 한국 음악을 선두에서 이끌 만큼 앞서 있었다. 그를 평상시에 만났을 때 전혀 사상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인민군 진주 때 투쟁실적이 없다하여 음악동맹위원장에게 멸시당한 일, 가족을 남에 놔두고 음악회 일로 평양 다녀올까 한다며 북으로 간 것 등으로 미루어 볼때 그의 평양행을 ‘월북’으로 표현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경계선을 넘어서 목적삼아 어디를 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지역을 필요에 의해서 다녀오는 방문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안성현의 인간이나 예술을 성의있게 추적, 정리한 김선기 등의 글을 대하면 대단히 공들였다 싶지만 한국 근대사의 최대 비극인 이데올로기로 인한 ‘월북’의 문제가 숙제로 남았고 필자는 이에 겸하여 안성현이 지닌 음악적 인간적 도저함이나 노래비 건립의 의의를 말하고자 한다.
이들 문제는 어느 면에서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일 수도 있겠지만 김재민 선생의 증언에 힘입어 엮어가는 것이다.
○ 전원적 서정성으로 가족애를 노래한‘엄마야…’
참고로 김재민 선생은 1924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한 음악인이다. 광주사범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당시 ‘묻지마라 갑자생’으로 일본군에 징용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온 선생은 1946년 7월 광주대성초교에 복직되고 다시 1947년 4월 벌교중 음악교사로 부임하여 당시 벌교출신이며 목포항도여중 국어교사인 박기동 시인을 이 시인이 고향 방문하는 길에 만날 수 있었다. 박시인은 첫인상에도 마른 체구에 가냘픈 모습이었다고 한다.
선생은 그 곳에서 여순사건 직전인 9월 구례중으로 옮겨 근무하다가 1948년 2월 목포사범학교로 전근하였고 6.25 한 달 전인 5월 자신보다 4살 위인 성악가 겸 작곡가 안성현을 만난다. 김재민은 안성현을 마지막 본 1950년 9월 15일까지 몇 차례 더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선생은 광주대성여고 교장을 끝으로 교직을 마칠 때까지 이 지역 광주·전남의 교육자와 원로음악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고 퇴직 후는 시창작, 시낭송에도 관여하는 등 노익장으로 후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김재민 선생도 많이 틀린 말이라고 했지만 안성현의 ‘월북설’은 다시금 설득력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상성과 관련된 일은 확실하게 들이대는 상대적 증거나 논리가 없으면 대충 말한 것이 시간이 가면서 정설로 굳어지게 된다.
이유는 괜히 말해봐야 신상에 이로울 것이 없고 골치 아픈 일로 오라 가라 하면 성가시니까 아예 모른 체 덮어두고 지나가는 것이다.
안성현은 자신의 최우선을 음악 활동에 두었던 듯 하다. 그는 교직을 버리고 자신을 초빙하고 평소 각별히 아껴주던 조희관 교장을 떠나 음악활동을 위해 서울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작품 발표회의 일로나 목포에 내려올 만큼 자신의 창작적 열정이 적극적이고 뜨거웠다. 그러던 그가 인민군의 목포 진주이후 소집에 응하고 음악동맹위원장으로부터 ‘투쟁경력 없음’으로 멸시를 감내해야 했었다.
그러나 김재민 선생도 지적했듯 기회가 되니까 음악회일로 평양에 갔고 예기치 못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의 호전을 기다리다가 ‘억북’(抑北)된 것이 분단으로 이어지고 혈육의 단절에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1.4후퇴 때 월남한 어느 지식인(75)의 증언으로는 전쟁은 밀리고 밀어내기로 예측불허의 상황이 반복되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문화예술인이나 지식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한다. 그리고 그 같은 상황에서 남하하는 일은 총살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안성현은 내 발로 찾아간 평양에서 새장의 새처럼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안성현은‘엄마야…’에서 보듯 전원적 서정성으로 수채화 같은 가족애를 노래할 만큼 인간적인 로맨티스트였다. 그런 그에게 본인도 모르는‘월북’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졌다.
어느 나라 공주가 궁궐에서 새를 한 마리 날려 보냈다. 그런데 그 말이 다시 공주의 귀에 들려왔을 때는 “공주는 천 마리 새를 날려 보낸 사람 ”이 되어 있었다.
명확한 증거나 목격자 없이 떠돌아다니는 막연한 소문은 당사자의 명운에 억울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안성현을 계기로 북쪽에 들어간 일에 대한 용어들을 살핀 결과 납북, 억북, 방북, 입북, 월북 등으로 나뉠 수 있었다.
안성현이 평양에 들어간 때만해도 남과 북은 경계선이 없었으므로 이들 모두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굳이 용어로 표현한다 할 때 개연성이 보다 큰‘방북’ 내지는 ‘입북’에서 ‘억북’되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납북’은 처음부터 거리가 멀고 ‘월북’ 또한 타당성이 약한 용어이다.
○ 안성현의 천재성, 드들강 풍광과 만나고 있다
다음 안성현 음악활동의 도저함에 대해서는 김재민 선생이 답한 설문 7번의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안성현은 순수 로맨티스트였고 음악적 수준이 대단한 분이었다는 말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실력의 정도를 감 잡게 한다 이미 초.중.고등학교 등 각급 학교 음악교재에 그의 작곡작품이 수록되어 실력의 객관성이 판명된 터였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주변의 보살핌을 받고 있고 작품 활동에 어려움이 없으니까 그쯤의 직장생활이나 창작활동에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에 흐르는 음악적 열정은 적당 적당한 활동으로 자신을 묶어둘 만큼 한가롭지가 않았다.
당시야 4년제 음악대학이 없었던 때이지만‘음악수준으로 봐서’전국 어디에 내놔도 대학 교수감이라는 평가에 나아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향각지의 우수 선생들을 수소문해서 끌어들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일대에 평판이 자자한 안성현”이라 할 만큼 교육자로써도 욕심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해방직후 광주에서부터 처음으로 음악회를 갖는 등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쳤던 제대로 된 음악가였다.
화투판에서도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 싶은데 화투에서 이기고 지는 것, 운이 7할이면 뒤집는 표가 3할이라는 뜻이다. 사람 사는 데에도 이 같은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안성현이 음악회일로 평양에 가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등 전쟁이 커지는 상황을 어찌 사람의 차원에서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안성현의 평양방문은 그 시점부터가 불운한 운명이 작용했었다.“한 마디로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그의 더 많은 활동을 지켜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김재민 선생의 말이 지울 수 없는 환청처럼 울려온다.
셋째로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노래비가 잘 정돈된 나주 남평의 드들강 수변공원에 세워지는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이는 일이다. 이 일은 처음 안성현 선생의 고향 남평에서 최정웅 위원장을 비롯한 지인들의 애향심이 모태가 되어 자연스럽게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건립의 일을 본격착수하게 된 것이다.
나주는 예로부터 멋과 예술이 소중했던 생명의 땅, 역사의 고장이다. 영산강 물줄기가 굽이를 만들어 나주평야의 너른 들녘을 적시고 이 평야의 오지랖에서 등 다숩고 배부른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런 때문인가.
영산강 수면 위를 날개쳐 나는 갈매기, 오색천을 나부끼던 황시리 젓배의 영상도 이 땅에 남다른 영감을 보태면서 나주는 천혜의 복된 땅으로 당당한 자존심과 아름다운 풍속을 지어갈 수 있었다. 어찌 감탄할 일이 손꼽아 한 둘이겠는가.
마한의 깊은 뿌리가 백제를 거쳐 고려 조선조로 흐르는 동안 나주의 정신적 미감은 휘어 도는 무지개 자락처럼 꿈을 만들고 환상을 만들었다.
안성현의 노래비는 수려한 땅 나주의 풍경에 명품 유적 하나를 보태는 일이다. 한 천재 음악가의 재능에서 꽃피어난 오선지의 보표들이 드들강의 강폭에 수량을 더하고 더더욱 큰 울림으로 파문지게 할 것이다.
마치나 코펜하겐에 세워진 안델센의 인어공주상이 수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 잘 사는 덴마크를 만들어 가듯이 안성현의 노래비가 나주를 찾고 남평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미감과 감탄을 지배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아갈 때‘엄마…’노래비에서 발원된 안성현의 음악적 천재성은 이 지역 드들강 풍광을 아우르면서 영산강과 만나고 드넓은 해양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니 안성현의 영감 푸른 음표들이 행복한 낙원 나주에서 하늘의 별무리, 지상의 꽃들로 피어날 것이다.
- 한 음악가의 천재적 생애를 노래비로 읽는다
김 종 / 시인
‘나주’하면‘남평’, ‘남평’하면 ‘드들강’, 분명 드들강의 풍치는 산자수명(山紫水明)이 제격이겠다. 그 강 푸른 솔밭 「탁사정」발치에 명품 조형물이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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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노래비 조감도
이름하여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노래비. 이 노래비 주인공은 나주(남평)의 풍광을 받아 성장한 불세출의 음악가 안성현(安聖鉉, 1920~2006) 선생이다.
금년 초에 선생의 노래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최정웅)가 결성되고 짜여진 일정대로 조각가가 선정되는 등 건립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아시는 것처럼 ‘엄마야…’는 이 나라 민족시인 김소월의 창작시이다. 이 시에 60여 년 전 곡을 붙여서 세인들의 운률로 회자되었다는 것은 사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터넷 통계에 소월의‘엄마야…’를 가사로 작곡한 저작권자가 24명에 이를 만큼 안성현 이후 이 시에 곡을 붙이는 일에 작곡가들이 앞 다투어 참여했던 것이다.
○ 초등학교 음악 교재에‘엄마야 누나야’실려
안성현의‘엄마야…’는 그에게 음악적 재능과 감성을 부여한 고향땅 남평 드들강 모래밭이 창작 이미지로 작용했고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을 개연성(probability)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한결 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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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악보
이 노래는 1948년 발간된 안성현 제2작곡집의 한 곡목으로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필두로‘부용산’(박기동 시),‘낙엽’(안성현 작사, 작곡)‘앞날의 꿈’(조희관 시), ‘진달래’(박기동 시),‘내고향’(조희관 시) 등 작곡가의 고향 그리는 정감에다 민족의 슬픔과 암울함을 희망의 시간으로 환치해가는 23편의 작품이 담겨져 있다.
이들 중 ‘부용산’이 지닌 음악적 호소력은 이 노래의 특별한 사연에 접하지 않고도 애수에 젖고 절절한 비감에 물결쳐 간다. 그리고 안성현의 작곡들은 해방직후 (미군정청) 발간된 초등학교 음악교재에 ‘엄마야 누나야’가, 중등 음악 교재에‘진달래’3부합창곡이, 당시 이희성 교수의 고등학교 음악 교재에 ‘봄바람’등이 올라 있었다.
특히 ‘봄바람’은 안성현이 서울로 옮겨간 뒤에 항도여중 합창단이 광주사범학교 김형구 음악교사의 인솔로 전국음악제에 출전하여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초·중·고등 각급 학교 교재에 안성현 작곡 작품이 수록되어 교육되고 그의 작품으로 출전한 합창단이 전국 음악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할 만큼 객관적 평가에 나아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매년 2차례의 작품발표회와 작곡집의 발행 등 그의 음악적 활동은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이며 특출하였다.
안성현은 1920년 7월 13일 전남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에서 태어났다. 남평초등학교를 제21회로 마치고 청소년기를 이곳 고향에서 보낸 그는 17세가 되던 1936년말 아버지 안기옥(安基玉)을 따라 함경도 함흥으로 이거해 갔다.
안성현의 아버지는 자신만의 가야금 산조를 창안할 만큼 독보적인 국악인이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머나먼 북쪽으로 주거지를 옮긴 것이다.
집안 아저씨뻘이라는 안막(安漠)은 리얼리즘 문학 비평가이며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와는 부부사이였다. 그러니까 안성현의 가계는 두루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함흥 이거 이후 안성현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東京) 도호음악학교(東邦音樂學校) 성악부(테너)를 마쳤다. 곧바로 귀국한 안성현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웃한 광주로 옮겨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 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면서 바쁘게 생활하였다.
안성현을 기록에 남긴 『신동아』(2001년 11월호)의 글은 호주에 살고 있는 윤필립 시인의 집필이며 ‘벌교〈부용산〉노래에 얽힌 사연’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글쓴이는“꽃다운 나이에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면서 쓴 시 ‘부용산’(芙蓉山)에 월북음악가 안성현이 곡을 붙이고 그 노래를 빨치산들이 즐겨 불러서 일명‘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이유로 한 평생을 쫓기고 얻어맞고 천대받다가 끝내 이역만리 호주로 떠나와야 했던 박기동(朴璣東) 시인을 소개”한다는 집필의도를 담고 있다.
박기동 시인은 1957년 목포사범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고 이루 형언할 수 없었던 가시발길의 생애가 이어졌다. 툭하면 가택수색과 연행, 구금을 당해야 했다.
1980년에 겪었던 죽음 직전까지의 사연 등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번역일을 하면서 몇 차례 시집출판을 시도했건만 ‘번번이 원고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자유의지와 더불어 다시 한 번 시창작을 시도해보겠다는 궁여지책’으로 1993년에 호주로 이민 간 사연 등을 소상히 소개하고 당초 1절 밖에 없었던 ‘부용산’의 가사가 52년 만에 2절을 추가하여 태어나게 된 사연 등도 담겨져 있다.
그러면서 박기동의 안성현과의 소식소통 유무, 안성현의 월북으로 인한 신산한 세월에 대한 소감 등등이 술회되어 있다.
○ 시보다는 곡이 워낙 절절한‘부용산’
2002년 6월 3일자 『광주타임스』에 보도된 김선기 실장의 글에는 ‘월북작곡가’라는 이유로 해서 “반세기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나주(남평)출신 ‘부용산’의 작곡가 안성현을 집중 조명 한다”면서 『신동아』가 안성현을 부분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글은 안성현의 예술과 인간을 전반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이 글은 제목부터가‘안성현 그는 누구인가?’로 시작된다. 이어 1999년 5월 29일 밤 목포의 대형 레스토랑 ‘뉴프린스’에서 가진 송광선씨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초청음악회에서 예의 ‘부용산’이 불렸고 피날레에서 목포시립합창단이 이 노래를 합창한 일, 그래서 그날 밤은 ‘부용산’ 광복음악회라 명명할 만큼 ‘부용산’의 의미부여가 약여하였다.
빨치산이 ‘부용산’을 애창하면서 그로 인해 파생된 작시자의 인생유전,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과 소녀애제자의 죽음 등이 교묘히 오버랩 되면서 시가 쓰여졌고 안성현이 몰래 박기동의 시노트를 가져다 곡을 붙인 일, 목포에서‘부용산’행사가 있은 직후인 6월 하순 작시자의 고향인 벌교에 초청된 가수 이동원이‘부용산’을 시창하고 노래비를 세운 일, 이보다 한발 앞서 ‘삶과 꿈 싱어즈’가 영남에서는 처음으로 포항공대와 포스코에다 자리를 펴고 공연한 일, 안성현 제2작곡집의 내용과 발굴 경위, 성동월 여사와의 결혼 등이 담겨졌고 지역문화예술인들에 의해 ‘부용산’이 뮤지컬로 부활되고 있다는 것 등은 이 글로 가름하기로 한다.
『신동아』, 『광주타임스』와는 달리 또 다른 문장은 안성현의 목포항도여중 제자였던 김효자 경기대 교수의 증언으로 김성우 한국일보 논설고문이 ‘부용산’의 진원지를 밝혀내고 있다.
사연인즉 안성현이 광복직후 항도여중 음악교사로 부임하고 김효자와 같은 반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아주 예쁘고 조숙한 소녀였다. 그는 늘 수석이었고 “책을 많이 읽어 자작시가 문예지에 당선된 적도 있었던 문학소녀”였다.
이 학생이 여중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박기동 시인이 애통해 하는 시를 썼고 안성현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실인즉 이보다 앞서 박기동 시인의 누이동생도 24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어‘벌교의 부용산에 장사 지내고 돌아와’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나저나 ‘부용산’은 빠른 전파력으로 이 지역 남도지방에 애창되었고 급기야 작곡자가‘월북’하고 빨치산이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면서 작시자는 크나큰 우여곡절을 겪는다.
작시자는 이 같은 사연에도 불구하고 “내 깐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에 대한 무상을 노래한 것”이라 했고 “시보다는 곡이 워낙 절절해서 당시의 시대상하고 맞아 떨어졌는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간 것”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런 애창곡이 되고 나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을만큼 작시자의 기구한 삶이 꼬리를 이어갔다.
이리 보면 역설적이게도 정든 처자가 살고 있는 남쪽 땅이 차단되어 북에서 가족 그리는 생을 마쳐야 했던 작곡가 안성현의 생애적 시간이 요행이었다 할 것인가. 안성현도 남한에서 살았다면 불온한(?) 곡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작시자 박기동과 별반 다르지 않는 시련으로 점철되었으리라.
박기동의 말마따나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좌경이라면 좌경시인일 수 있겠다”는 체념어린 단정과 “난 좌파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지한 사람”이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슨 사상 같은 것을 논하겠느냐“는 반문 앞에 차라리 두 다리 뻗고 토해내는 통곡이 상책이라 할 것인가.
○ 붉은 점이 치명적인 시대, ‘월북’표현은 신중해야
작시자든 작곡가든 자신의 창작의도와 무관한 것은 당자들과 별개이다. 작품은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전적으로 독자의 소유다. 그리고 비극의 보다 근원적인 민족적 문제가 엄존한 현실에서 박기동 시인이나 안성현 작곡자 개개인에게 사상의 올가미를 들이대는 것은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다.
사상에 붉은 점이 찍히면 그 자체로 치명적이던 시대에 숨소리도 죽이며 엎드려 대역죄인처럼 살았던 것만도 가슴 치는 회한이 되는데 개인의 문제를 함부로 좌경이니 우경이니 다루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두고만 볼 것인가.
필자는 안성현을 써낸 그간의 문장들을 들여다보고 ‘월북’문제를 포함 3가지쯤의 관심사를 살피기 위해 김재민(85. 원로음악인) 선생을 두 차례에 걸쳐 면담하였다.
노령임에도 선생은“안성현에 대해서는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마지막 모습을 증언해 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증언으로 안성현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될 일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소상하게 말해 주겠다는 자상함까지 보이셨다.
첫 번째 (2005.6.14)만남에서는 무슨 글을 쓰려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어서 별 생각 없이 안성현의 생애적인 일을 주변에서부터 순서 없이 듣고 메모했었다. 그러나 막상 메모를 정리하다 보니 안성현에 관한 글 한편을 써야 겠다 생각되어 설문을 만들었고 두 번째(2008.8.6)로 선생을 모셨다.
선생은 드리는 질문 요항을 자신의 일처럼 시종 성실하고 침착하게 짚어가며 말씀해 주셨는데 필자가 혹여 잘못 정리한 부분은 없었을까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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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안성현 작곡가
〈김재민 선생과의 설문과 대답〉
1. 이미 신동아, 남도일보, 김효자 교수 증언, 노래비 취지문 등에서 음악가 안성현 선생의 예술과 생애적 문제가 부분적, 전체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는지요?
보지 못 했다
2. 안성현은 나주(남평)가 낳은 천재음악가입니다. 이분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노래비가 선생의 고향 남평 드들강변에 세워집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은?
환영한다. 진즉 세워져서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알게 했으면 좋았겠다 했는데 이제라도 빛을 보게 되어 기쁘다.
3. 안성현 선생과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나셨는지?
1950년 5월이면 6.25직전이고 안성현 선생이 목포사회의 교직에서 떠나 서울 등지에 있을 때였는데 목여중 강당에서 이 학교 음악교사 이득주의 피아노반주로 안성현 독창 발표회를 가졌었다. 그때 안성현과는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 날의 그 무대에서 안성현은〈엄마야…〉는 부르지 않았지만 〈부용산〉,〈진달래〉,〈내고향〉등 노래가 이어질 때 성량이나 가창력은 대단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목포 학생이나 시민들 사이에는 〈부용산〉을 애창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리고 나와는 7살 연하인 내 처가 항도여중에서 안성현 선생에게 배운 제자여서 그런 차원에서도 얼마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4. 안성현 선생에 대한 인상은?
미남형이고 170Cm 정도의 체구에 인상부터가 대단히 호감을 갖게 하는 분이었다. 친절했으며 대인 관계가 원만했다. 한 마디로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그의 더 많은 음악활동을 지켜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
5. 안성현 선생에 대해 기억하시는 일들은?
안성현 선생을 1950년 5월 자신의 독창회 때 만나고 그 후 몇 차례 더 만났었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이 목포에 들어온 것은 광주보다 하루 늦은 7월 24일이었다.
목포에 진주한 인민군이 목포시내 음악교사들 소집령을 내려서 갔더니 일제 때 신사당이 YMCA회관으로 바꿔져 있었고 중년의 작가 박화성 선생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 안성현도 나왔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인민군은 계속 문인, 음악가 등등 예술인들을 부르고 목적에 맞게 배치해 지시를 내렸다. 음악인들에게는 이 공장 저 공장에 오르간을 짊어지고 가서 악보에 맞춰 인민군 노래를 가르치라 하였다.
노동자들은 저마다‘우리들 세상이다 활개 치는 판’이어서 노래 가르치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못했다. 인민군들은 모든 우선순위를 투쟁경력으로 보았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투쟁실적이 없기는 나도 안성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목포에서 피아노상을 경영하는 사람이 음악동맹위원장이었는데 안성현은 그 자보다 음악적으로 실력이 월등했지만 투쟁경력이 없어서 멸시 당하는 것을 보았다.
6.25는 계속되는 인민군의 진주로 미군이 목포 유류저장 창고를 폭격하는 일이 있었고 시민들은 피난을 가는 등 불안한 나날을 어찌 보낼까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목포시내에 함포사격이 개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공포분위기가 커져 있었다.
우리 내외가 전쟁을 피해 목포에서 20㎞쯤 떨어진 일로 농가에다 문칸방 하나를 얻어 놓고 신혼부부로 기거하고 있는데 그 집에서 안성현과 조념(趙念)을 함께 만났다.
조념은 안성현이 직장을 그만두고 뚜렷한 이유 없이 (추정컨대 음악활동을 전국적으로 넓히기 위해)서울로 옮겨가던 무렵 목포중 음악교사로 내려온 작곡자 겸 바이얼린리스트였다.
6. 안성현 선생을 마지막 보신 날은?
현재 한국에서 안성현 선생의 목포에서의 생활이나 입북할 때까지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할 사람을 내 자신뿐이라고 확신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이틀 전인 9월 15일 최승희의 딸 안성희(安聖姬)가 평양에서 내려와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길을 가던 친구가 안성희 무용발표회의 리셉션 자리에 같이 가자고 했다.
무용도 안 봤는데 참석하기가 좀 뭐하지 않느냐니까 그래도 본셈치고 참석하자해서 시간에 맞춰 가게 되었다. 강당에는 학생용 걸상으로 행사장이 차려졌고 장내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무심코 앉은 것이 주인공 안성희의 옆자리였는데 조금 떨어져서 안성현의 모습도 보였다. 내심 좋은 자리 차지했다는 생각과 안성희가 북에서 유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성희는 건강한 체구에 재치도 있었지만 어머니 최승희 처럼 예쁘지는 않았다. 안성희의 스피치 차례였다. 안성희는 과시하러 그랬는지“김장군(김일성 주석을 가리킨 듯)이 가끔씩 우리 집을 온다.
제집은 한옥인데 청소상태나 정리가 잘 돼있으면 ”오늘은 깨끗하군“ 지저분하거나 청소가 덜 돼 있으면 ”왜 이리 사노“ 등등의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김일성이 최승희를 사모해서 어울린다드라는 말이 수긍되었고 김일성도 깨끗한 것을 좋아한 사람인가보다 싶었다.
발표회와 리셉션을 마친 장내에 촛불이 꺼졌다. 깜깜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도 현관으로 나가다말고 대기하고 있던 소련제 찝차 앞의 안성현을 만났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까 ‘안성희가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가자는데 그럴까 한다’하였다.
나는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성현을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으니까 미군들이 서울로 들어갔다면 평양 길이 끊어졌을 텐데 안성현은 어찌 됐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안성희가 평양에 있다는 풍문이 들려서 안성현도 무사히 평양에 도착했겠구나 생각했었다.
7. 안성현 선생 노래비 건립에 즈음하여 선생을 좌경음악인, 월북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아주 많이 틀린 말이고 그는 순수 로맨티스트에 음악적 수준이 대단히 높은 분이었다. 당시는 4년제 음악대학이 없었고 서울음대 전신인 서울음악전문학교 밖에 없던 때로 그의 작곡집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음악수준으로 봐서 안성현은 대학 교수감이었다.
그만큼 제대로 된 음악가였다. 그리고 안성현이 평양에 가던 9월 15일만해도 ‘월북’이나 ‘월남’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때는 부산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민군치하에 접수되어 목포에서 평양을 방문하거나 다녀온다는 말은 될지 몰라도 남과 북이 서로 분단된 상황이 아니어서 이 용어 자체가 없었을 때이다.
그리고 전쟁 상황이 돌변하면서 안성현이 평양 가겠다고 나선 이틀 후인 9월 17일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예측불허의 국면이 전개된 것이다. 이런 일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리 본다면 안성현의 평양방문 시점은 대단히 불운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북한에서 붙들린 상황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억북’이라는 말이 어떨까한다.
8. 이외에도 하시고 싶은 말씀은?
안성현은 대단한 음악가였다. 지금 보니까 안성현이 1920년생이라면 그가 평양 가겠다고 나선 것이 1950년이었으니까 남한에서 30년을 살아온 셈인데 그의 음악적 성과는 정말 놀랄 만큼 대단하다.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에다 한 작품 한 작품이 한국 음악을 선두에서 이끌 만큼 앞서 있었다. 그를 평상시에 만났을 때 전혀 사상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인민군 진주 때 투쟁실적이 없다하여 음악동맹위원장에게 멸시당한 일, 가족을 남에 놔두고 음악회 일로 평양 다녀올까 한다며 북으로 간 것 등으로 미루어 볼때 그의 평양행을 ‘월북’으로 표현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경계선을 넘어서 목적삼아 어디를 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지역을 필요에 의해서 다녀오는 방문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안성현의 인간이나 예술을 성의있게 추적, 정리한 김선기 등의 글을 대하면 대단히 공들였다 싶지만 한국 근대사의 최대 비극인 이데올로기로 인한 ‘월북’의 문제가 숙제로 남았고 필자는 이에 겸하여 안성현이 지닌 음악적 인간적 도저함이나 노래비 건립의 의의를 말하고자 한다.
이들 문제는 어느 면에서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일 수도 있겠지만 김재민 선생의 증언에 힘입어 엮어가는 것이다.
○ 전원적 서정성으로 가족애를 노래한‘엄마야…’
참고로 김재민 선생은 1924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한 음악인이다. 광주사범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당시 ‘묻지마라 갑자생’으로 일본군에 징용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온 선생은 1946년 7월 광주대성초교에 복직되고 다시 1947년 4월 벌교중 음악교사로 부임하여 당시 벌교출신이며 목포항도여중 국어교사인 박기동 시인을 이 시인이 고향 방문하는 길에 만날 수 있었다. 박시인은 첫인상에도 마른 체구에 가냘픈 모습이었다고 한다.
선생은 그 곳에서 여순사건 직전인 9월 구례중으로 옮겨 근무하다가 1948년 2월 목포사범학교로 전근하였고 6.25 한 달 전인 5월 자신보다 4살 위인 성악가 겸 작곡가 안성현을 만난다. 김재민은 안성현을 마지막 본 1950년 9월 15일까지 몇 차례 더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선생은 광주대성여고 교장을 끝으로 교직을 마칠 때까지 이 지역 광주·전남의 교육자와 원로음악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고 퇴직 후는 시창작, 시낭송에도 관여하는 등 노익장으로 후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김재민 선생도 많이 틀린 말이라고 했지만 안성현의 ‘월북설’은 다시금 설득력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상성과 관련된 일은 확실하게 들이대는 상대적 증거나 논리가 없으면 대충 말한 것이 시간이 가면서 정설로 굳어지게 된다.
이유는 괜히 말해봐야 신상에 이로울 것이 없고 골치 아픈 일로 오라 가라 하면 성가시니까 아예 모른 체 덮어두고 지나가는 것이다.
안성현은 자신의 최우선을 음악 활동에 두었던 듯 하다. 그는 교직을 버리고 자신을 초빙하고 평소 각별히 아껴주던 조희관 교장을 떠나 음악활동을 위해 서울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작품 발표회의 일로나 목포에 내려올 만큼 자신의 창작적 열정이 적극적이고 뜨거웠다. 그러던 그가 인민군의 목포 진주이후 소집에 응하고 음악동맹위원장으로부터 ‘투쟁경력 없음’으로 멸시를 감내해야 했었다.
그러나 김재민 선생도 지적했듯 기회가 되니까 음악회일로 평양에 갔고 예기치 못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의 호전을 기다리다가 ‘억북’(抑北)된 것이 분단으로 이어지고 혈육의 단절에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1.4후퇴 때 월남한 어느 지식인(75)의 증언으로는 전쟁은 밀리고 밀어내기로 예측불허의 상황이 반복되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문화예술인이나 지식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한다. 그리고 그 같은 상황에서 남하하는 일은 총살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안성현은 내 발로 찾아간 평양에서 새장의 새처럼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안성현은‘엄마야…’에서 보듯 전원적 서정성으로 수채화 같은 가족애를 노래할 만큼 인간적인 로맨티스트였다. 그런 그에게 본인도 모르는‘월북’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졌다.
어느 나라 공주가 궁궐에서 새를 한 마리 날려 보냈다. 그런데 그 말이 다시 공주의 귀에 들려왔을 때는 “공주는 천 마리 새를 날려 보낸 사람 ”이 되어 있었다.
명확한 증거나 목격자 없이 떠돌아다니는 막연한 소문은 당사자의 명운에 억울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안성현을 계기로 북쪽에 들어간 일에 대한 용어들을 살핀 결과 납북, 억북, 방북, 입북, 월북 등으로 나뉠 수 있었다.
안성현이 평양에 들어간 때만해도 남과 북은 경계선이 없었으므로 이들 모두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굳이 용어로 표현한다 할 때 개연성이 보다 큰‘방북’ 내지는 ‘입북’에서 ‘억북’되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납북’은 처음부터 거리가 멀고 ‘월북’ 또한 타당성이 약한 용어이다.
○ 안성현의 천재성, 드들강 풍광과 만나고 있다
다음 안성현 음악활동의 도저함에 대해서는 김재민 선생이 답한 설문 7번의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안성현은 순수 로맨티스트였고 음악적 수준이 대단한 분이었다는 말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실력의 정도를 감 잡게 한다 이미 초.중.고등학교 등 각급 학교 음악교재에 그의 작곡작품이 수록되어 실력의 객관성이 판명된 터였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주변의 보살핌을 받고 있고 작품 활동에 어려움이 없으니까 그쯤의 직장생활이나 창작활동에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에 흐르는 음악적 열정은 적당 적당한 활동으로 자신을 묶어둘 만큼 한가롭지가 않았다.
당시야 4년제 음악대학이 없었던 때이지만‘음악수준으로 봐서’전국 어디에 내놔도 대학 교수감이라는 평가에 나아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향각지의 우수 선생들을 수소문해서 끌어들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일대에 평판이 자자한 안성현”이라 할 만큼 교육자로써도 욕심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해방직후 광주에서부터 처음으로 음악회를 갖는 등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쳤던 제대로 된 음악가였다.
화투판에서도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 싶은데 화투에서 이기고 지는 것, 운이 7할이면 뒤집는 표가 3할이라는 뜻이다. 사람 사는 데에도 이 같은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안성현이 음악회일로 평양에 가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등 전쟁이 커지는 상황을 어찌 사람의 차원에서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안성현의 평양방문은 그 시점부터가 불운한 운명이 작용했었다.“한 마디로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그의 더 많은 활동을 지켜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김재민 선생의 말이 지울 수 없는 환청처럼 울려온다.
셋째로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노래비가 잘 정돈된 나주 남평의 드들강 수변공원에 세워지는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이는 일이다. 이 일은 처음 안성현 선생의 고향 남평에서 최정웅 위원장을 비롯한 지인들의 애향심이 모태가 되어 자연스럽게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건립의 일을 본격착수하게 된 것이다.
나주는 예로부터 멋과 예술이 소중했던 생명의 땅, 역사의 고장이다. 영산강 물줄기가 굽이를 만들어 나주평야의 너른 들녘을 적시고 이 평야의 오지랖에서 등 다숩고 배부른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런 때문인가.
영산강 수면 위를 날개쳐 나는 갈매기, 오색천을 나부끼던 황시리 젓배의 영상도 이 땅에 남다른 영감을 보태면서 나주는 천혜의 복된 땅으로 당당한 자존심과 아름다운 풍속을 지어갈 수 있었다. 어찌 감탄할 일이 손꼽아 한 둘이겠는가.
마한의 깊은 뿌리가 백제를 거쳐 고려 조선조로 흐르는 동안 나주의 정신적 미감은 휘어 도는 무지개 자락처럼 꿈을 만들고 환상을 만들었다.
안성현의 노래비는 수려한 땅 나주의 풍경에 명품 유적 하나를 보태는 일이다. 한 천재 음악가의 재능에서 꽃피어난 오선지의 보표들이 드들강의 강폭에 수량을 더하고 더더욱 큰 울림으로 파문지게 할 것이다.
마치나 코펜하겐에 세워진 안델센의 인어공주상이 수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 잘 사는 덴마크를 만들어 가듯이 안성현의 노래비가 나주를 찾고 남평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미감과 감탄을 지배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아갈 때‘엄마…’노래비에서 발원된 안성현의 음악적 천재성은 이 지역 드들강 풍광을 아우르면서 영산강과 만나고 드넓은 해양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니 안성현의 영감 푸른 음표들이 행복한 낙원 나주에서 하늘의 별무리, 지상의 꽃들로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