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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추억[조병화의 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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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여름 가고/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추억」 전문)

겨울해는 짧다. 저수지 뒤편 낮은 산맥너머로 오후5시도 되기 전에 해는 저무는데 난실리 버스정류장 꼭대기에는 석양도 아랑곳없이「꿈」이 휘날린다. 편운 조병화(75)시인이 고향마을 가꾸기에 앞장서면서 지어놓은 정류장이고,그가 고향마을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꿈」을 깃발에 아로새겨 시멘트 구조물 위에 꽂아놓았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시인이 태어나서 여덟살때까지 살았던 유년의 모태. 이곳에는 시인이 주창한 종교가 있고 그 종교의 대상인 어머니가 누워있다.시인 조병화는 얼핏 보기에도 부족한 것 없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세계시인대회에서는 계관시인의 호칭을 얻었고,대학에서는 부총장과 재단이사장까지 맡았으며,한국시인협회 회장에다 문협이사장을 거쳐 지금은 예술원 회장자리에 앉아서 얼마전에는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영예인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았다.난해한 문학적 평가이전에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베스트셀러 시인도 거쳤다. 그 자신 또한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길을 걸을 만큼 지나온 생에 대해 한 점 후회가 없다고 공언한다.
그러한 그가 시만 쓰면 고독을 이야기하고 눈물을 흘리고,죽음에 대해 말한다.사랑에 목말라 하고 먼저 떠나간 벗에 대한 그리움으로 파이프를 꺼내 문다.한시라도 바삐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아무 고통없이 안착하기를 소망한다.그리고 「잊어야 한다」고,「헤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거린다.
그가 쓴「추억」은 작곡가 김성태씨가 가곡으로 만들었고,성악가 백남옥씨가 맑고 높은 목청에 담아서 대중의 가슴을 慰撫했다.「꿈」을 외치는 시인이 「잊어버리자」고 중얼거리는 역설적인 시행은 왜 뭇 생명의 가슴에 파문을 만들어 내는가.

『잊어버려야 한다/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인사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흘러가는 한줄기 속에/나도 또 하나 작은/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하루만의 위안」중에서)

시인의 고향 난실리는 경기도 안성군과 용인군의 군계 선상에서 안성군 쪽에 한 발을 옮겨놓은 곳에 있다. 시인이 높은 목청으로 전화를 통해 말해준 지리를 좇아 달리다보니 그가 말한 「꿈」의 깃발을 언뜻 지나쳤다.황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후진한 뒤 왼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들어간다.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주섬주섬 주변을 챙겨보니 시인이 세워주었다는 「난실1리 경로회관」팻말이 보인다.커다란 통유리가 달린 방안에는 노인들 10여명이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창 밖 저수지의 일몰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시인 조병화를 아십니까』 노인들이 두서없이 너나들이로 알은 체를 하고 나선다.그중 한 노인이 앞장서서 열쇠꾸러미를 들고 시인의 문학관으로 안내한다.

이어령씨가 문화부장관시절 이 동네를 문화마을로 지정하고 「편운동산」에다 나랏돈을 투자해 세워준 문학기념관이 그것이다. 냉기가 서늘하게 온몸을 파고드는 문학관 안에는 한 시인이 태어나서 살아온 모든 족적이 다양한 기록물로 안치돼 있다.따라온 노인의 손주가 시인이 젊은시절 애지중지했던 바람빠진 럭비공 하나를 만지자 노인은 큰소리로 나무란다.시멘트철골조 2층 건물,그 건물의 2층을 뚜벅뚜벅 낭하에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니 방명록이 있다.곁에 놓인 검정색 사인펜은 말라붙은 지 오래지만 방명록에는 시인을 사랑하는 문학도들의 헌사가 다사롭게 누워있다.행복한 시인 조병화.남들은 일제시대때 징용에 끌려가고,누구는 옥사를 하고,또 어떤 사람은 절필을 했다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생을 갈무리하며 타고난 길을 걸었다.난실리의 한학자이자 이 지역의 소지주였던 부친이 두 아내를 사별하고 세번째 맞아들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조병화는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그는 유년기를 이렇게 이야기한다.실로 친구가 그리 없는 유년기였다.더구나 집에선 거의 혼자생활이었다. 말할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형님 누나들이 모두 나보다 나이들이 많아서 어려웠다.

1962년 막내 아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혼신의 사랑을 베풀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조병화는 이듬해 어머니 묘소 옆에 「편운제」라는 묘막을 짓고 메마른 담쟁이덩쿨이 휘감고 있는 하얀 회벽의 오석에 이렇게 새겨넣었다.「어머니 말씀,살은 죽으면 썩는다 어머니 진원행심 1882∼1962를 위하여 이 산막을 세움」. 편운제 동쪽에 모친의 묘소가 박모(땅거미)의 햇살아래 누워있다.헤어지자고,잊어버리자고,이승의 모든 그리움과 아픔을 잊어버리자고,울면서 시를 쓰는 시인의 종교가 저수지에 떠 있는 피빛 노을을 바라보며 말없이 누워있다.미움도 사랑도 그리움도 진정 잊어버릴 수 있다면 잊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세속적으로 충만한 유복의 길을 걸어온 조병화 또한 인간의 근원적인 숙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그는 시인이었다.


『텅 빈 우주를 하나의 사원으로 삼아/ 스스로의 곧은 신념을 사제로 받들어/ 스스로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길잡이로/ 어머님이 가시던 그 길을 따르고 있다// 지상에 수없이 만들어진/ 사찰이나,예배당이나,교회나,성당이나,/ 그 사잇길을』(「종교문답」 전문)

세계일보 96.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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