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없는 마산
오는 4월 28일이 ‘천상의 시인’ 천상병(千祥柄·1930~1993)의 10주기를 맞는 날이다. 이와 때를 맞춰 미망인 목순옥여사가 절명시를 발견해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전략)일생동안 시만 쓰다가/ 언제까지 갈건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일도 있었으니/ 어쩌면 나는 시인으로서는/ 제로가 아닌가싶다/ 그래서 안되는데/ 돌아가신 부모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가/ 양지는 없고
그의 삶이 바로 한편의 시
회한에 쌓인 이승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 <귀천>에 못잖은 수작이 아닌가 여겨진다. 천상병 그는 누구인가. 바로 마산 사람이다. 일본 히로시마에 태어났을망정 성장기를 보낸 곳이 마산이기에 하는 말이다. 천시인이 쓴 <천가지변(天哥之辯)>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경남 창원군 진북면 선산 아버지 무덤 밑에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싶다’고 적은 절절한 사연이 그의 사향(思鄕)문학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천시인은 해방과 함께 귀국해 마산중학(마산고)에 들어갔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떠오르는 시상을 주체치 못한 탓인지 시작에 여념이 없었다. 눈여겨본 담임교사 김춘수의 권유에다 유치환의 추천으로 중학 5학년(지금의 고2)이던 1950년 시 <강물>을 <문예>지에 발표했다. 그 후 서울대 상대 재학시절 동인지 <처녀지>를 펴내기도 했다. 50~60년대엔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4·19이전의 문학적 속죄> 등 평론을 발표해 기성작가들을 질타하는데도 주저치 않는 왕성한 활동을 보인적도 있다.
그러나 맑디맑은 영혼을 소유한 천시인이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인지는 몰라도 ‘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돌이킬 수 없는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지칠 대로 치진 그는 문우들에게 500원, 1000원씩 푼돈을 동냥해 매일 막걸리 두 되를 마셔댔다. 천시인에게 시와 술이 있었기에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71년엔 유리걸식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바람에 행려병자로 몰려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한동안 행적을 감추자 천시인을 아꼈던 문우들이 그의 시편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출간하는 일도 있었다.
이듬해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선 평생 반려자 목순옥씨를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말년에 부인이 꾸려나가는 인사동 찻집 <귀천>에서 용돈을 타다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며 유유자적하고 지냈다. 그런 그가 63세를 일기로 홀연히 귀천의 길로 오르고만 것이다. 한 생애를 그야말로 천진난만하게 살다가 이승을 하직했다. 생전, 서울대 상대를 나왔으면 선망의 적인 금융인으로 출세했을텐데도 한평생을 무직·방랑·주벽·구걸 등으로 이어져왔으니 참으로 인생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천시인은 천재였다. 문학·예술·철학을 두루 섭렵해 박식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TV에 퀴즈프로가 나올라치면 취기가 올라있는데도 한문제도 틀리지 않고 맞췄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감탄한 나머지 “구걸이나 하지말고 저기 가서 TV나 타고 와!”하면 천시인은 찌그러진 얼굴이지만 정색을 하고선 “천재는 저런 곳에 나가는 것이 아니야!”하고 쏘아붙이더라는 것이다. 술에 얽힌 일화 중에 백미는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씨 집에 식객 노릇을 할 때였다. 5살짜리 그의 딸한테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야!” 하고선 술시중을 들게했다. 이를 본 아버지가 “은혜를 모르는 놈!” 대갈일성 호통 끝에 쫓겨난 사실이 있었다.
흔한 추모제 하나 없어서야
이렇듯 세상물정 모르고 살았으니 그의 인생자체가 차라리 시였는지 모른다. 이제 천시인을 기리는 기념제전이 의정부(수락산 기슭에 한 때 살았음)와 지리산 중산리에서 열리리라 한다. 깊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개최하는 그들의 마음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런데 그의 체취가 살아있는 이곳 마산에는 추모제를 왜 열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척박하고 암울한 시대를 적응하지 못해 기상천외한 행동을 해오면서도 그 순수성만은 잃지 않았던 그를 모르고서야 그 어찌 마산인 아니 예술인이라고 하겠는가. 곧잘 관청과 내통하는 어용예술인들이 특정문인에게는 그토록 발빠른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학창시절 천시인이 산책을 즐겨하며 시심을 일궜던 마산고 뒷산 솔밭에서 알찬 행사를 할 수 있으리라고 감히 부탁하고 싶다.
경남일보[2003/04/25]
(전략)일생동안 시만 쓰다가/ 언제까지 갈건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일도 있었으니/ 어쩌면 나는 시인으로서는/ 제로가 아닌가싶다/ 그래서 안되는데/ 돌아가신 부모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가/ 양지는 없고
그의 삶이 바로 한편의 시
회한에 쌓인 이승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 <귀천>에 못잖은 수작이 아닌가 여겨진다. 천상병 그는 누구인가. 바로 마산 사람이다. 일본 히로시마에 태어났을망정 성장기를 보낸 곳이 마산이기에 하는 말이다. 천시인이 쓴 <천가지변(天哥之辯)>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경남 창원군 진북면 선산 아버지 무덤 밑에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싶다’고 적은 절절한 사연이 그의 사향(思鄕)문학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천시인은 해방과 함께 귀국해 마산중학(마산고)에 들어갔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떠오르는 시상을 주체치 못한 탓인지 시작에 여념이 없었다. 눈여겨본 담임교사 김춘수의 권유에다 유치환의 추천으로 중학 5학년(지금의 고2)이던 1950년 시 <강물>을 <문예>지에 발표했다. 그 후 서울대 상대 재학시절 동인지 <처녀지>를 펴내기도 했다. 50~60년대엔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4·19이전의 문학적 속죄> 등 평론을 발표해 기성작가들을 질타하는데도 주저치 않는 왕성한 활동을 보인적도 있다.
그러나 맑디맑은 영혼을 소유한 천시인이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인지는 몰라도 ‘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돌이킬 수 없는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지칠 대로 치진 그는 문우들에게 500원, 1000원씩 푼돈을 동냥해 매일 막걸리 두 되를 마셔댔다. 천시인에게 시와 술이 있었기에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71년엔 유리걸식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바람에 행려병자로 몰려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한동안 행적을 감추자 천시인을 아꼈던 문우들이 그의 시편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출간하는 일도 있었다.
이듬해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선 평생 반려자 목순옥씨를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말년에 부인이 꾸려나가는 인사동 찻집 <귀천>에서 용돈을 타다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며 유유자적하고 지냈다. 그런 그가 63세를 일기로 홀연히 귀천의 길로 오르고만 것이다. 한 생애를 그야말로 천진난만하게 살다가 이승을 하직했다. 생전, 서울대 상대를 나왔으면 선망의 적인 금융인으로 출세했을텐데도 한평생을 무직·방랑·주벽·구걸 등으로 이어져왔으니 참으로 인생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천시인은 천재였다. 문학·예술·철학을 두루 섭렵해 박식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TV에 퀴즈프로가 나올라치면 취기가 올라있는데도 한문제도 틀리지 않고 맞췄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감탄한 나머지 “구걸이나 하지말고 저기 가서 TV나 타고 와!”하면 천시인은 찌그러진 얼굴이지만 정색을 하고선 “천재는 저런 곳에 나가는 것이 아니야!”하고 쏘아붙이더라는 것이다. 술에 얽힌 일화 중에 백미는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씨 집에 식객 노릇을 할 때였다. 5살짜리 그의 딸한테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야!” 하고선 술시중을 들게했다. 이를 본 아버지가 “은혜를 모르는 놈!” 대갈일성 호통 끝에 쫓겨난 사실이 있었다.
흔한 추모제 하나 없어서야
이렇듯 세상물정 모르고 살았으니 그의 인생자체가 차라리 시였는지 모른다. 이제 천시인을 기리는 기념제전이 의정부(수락산 기슭에 한 때 살았음)와 지리산 중산리에서 열리리라 한다. 깊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개최하는 그들의 마음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런데 그의 체취가 살아있는 이곳 마산에는 추모제를 왜 열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척박하고 암울한 시대를 적응하지 못해 기상천외한 행동을 해오면서도 그 순수성만은 잃지 않았던 그를 모르고서야 그 어찌 마산인 아니 예술인이라고 하겠는가. 곧잘 관청과 내통하는 어용예술인들이 특정문인에게는 그토록 발빠른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학창시절 천시인이 산책을 즐겨하며 시심을 일궜던 마산고 뒷산 솔밭에서 알찬 행사를 할 수 있으리라고 감히 부탁하고 싶다.
경남일보[2003/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