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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정지용의 고향 옥천 - 하늘에도 땅에도 시인의 그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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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지용(1902∼?)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박인수 교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부른 노래 '향수'를 통해서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어느 봄날 저녁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노래는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주위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며칠동안 '향수'를 흥얼거렸다.
그 후 열병을 앓는 것처럼 묘한 감상에 젖어 시인의 행적을 더듬었다. 그러나 '향수'의 시상을 떠오르게 했던 시인의 고향을 찾을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리움의 장소는 가급적 가슴에 담아두자. 세월이 지나면 그리던 것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곳만은 여전히 시간이 정지된 곳으로 믿고 싶었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사랑해버려 시인의 고향을 이미 마음에 완전히 담아버린 처지였기에.

옥천(沃川). 기름지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 시인의 고향은 그곳에 있었다. 덕유산 무주 구천동에서 시작된 금강이 대청댐으로 흘러들어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예로부터 땅이 비옥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톨게이트를 지나 옥천에 들어섰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상상하던 기자에게 옥천은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닌' 낯선 곳이다. 다소 어리둥절할 정도로 마을에는 규모있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100여년 전 이곳에서 태어났던 시인은 지금 없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옥천을 그리며 '향수'를 써냈던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 7월 "문 안(서울)에 갔다 오마"하고 모시적삼 차림으로 나섰다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다. '전쟁 중 월북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평양감옥으로 이전 중 사망했다'는 등의 무성한 소문만이 나돌 뿐이었다.

그 후 40여년 동안 누구도 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의 시 역시 꽁꽁 묶여 버렸다. '향수' '백록담' 등 주옥같은 시들이 수록된 그의 시집 출판은 번번이 무산되고, 그 조판 지형(紙型)은 창고에 묵히는 수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이지러진 역사가 한 시인의 운명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슴 아픈 과거다.
옥천 톨게이트 앞에는 '시인 정지용이 꿈에도 잊지 못하여 향수로 읊은 고향 옥천'이라는 대형 입간판이 우뚝 서있다. 88년 지용의 시가 해금되면서 모든 것이 변한 것이다. 당시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울과 옥천에서 '지용제'를 열었다. 1회 지용제에 참가했던 옥천문화원 박효근 전 원장은 "시인을 그리던 사람들은 정지용 이름 석자와 그의 시를 가슴이 터져라 외쳐대며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그 후 매년 옥천에서는 시인의 생일인 5월15일을 전후해 지용제가 열렸다. 문인들은 옥천에 모여들어 그의 시를 낭송했고, 마을 사람들은 시를 노래로 만들어 군민 합창제를 열고 백일장을 열어 시인을 그리워했다. '열굴 하나가 손바닥 둘로 폭 가리우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 감을밖에'(호수). 마을 사람들처럼 눈을 감고 지용을 가슴에 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듯 낮아진 하늘. 멀리 시인이 다녔던 옥천공립보통학교(죽향초등학교)가 보인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밝게 웃으며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 속에 소년 지용이 섞여있을 것만 같다. 운동장 오른편의 고색창연한 목조 건물이 지용이 수업을 받던 보통학교 건물이다. 이곳에서 지용은 어떤 생각을 하며 자랐을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며 달렸을까.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고 밤마다 가보려 벼르고 벼르는 꿈을 키웠을까. 그의 흔적이 못내 아쉬워 발길을 떼기 어렵다.
초등학교 담을 돌아 나가 지용로를 5분쯤 걸어가면 지용의 생가(사진)를 만날 수 있다. 지용의 생가는 낮은 초가담장 너머 초가집 2채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세트장같이 어색한 모습이다.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시인의 생가는 74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 94년 말 집이 경매에 넘어가 완전히 형체도 없이 사라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다행히 옥천문화원과 지역주민.문학단체가 모여 '정지용 생가 복원위원회'를 결성,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가를 재현했다.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던 지용의 생가는 96년 7월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주변은 우뚝우뚝 솟은 건물들로 '향수'에서 읊었던 농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집을 휘돌아나가는 실개천도 시멘트로 단장돼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형체는 잃었어도 시인의 고향은 옥천 사람들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 누구나 '향수'를 읊고 다니는 고향을 가진 시인 정지용은 행복한 사람이다. 어느새 성큼 어둠이 내려 앉았다. '하늘에는 성근별'. '서리 까마귀 우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위로 지용의 향기가 스쳐간다. kjs043@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3-04-30


<감상하기> 정지용 시/채동선 곡/소프라노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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