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조지훈의 '나그네','완화삼''에 관한 문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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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지훈
얼어붙었던 모국어의 강물이 광복의 햇살을 받아 소리내며 풀리고 있었다. 언론.출판.문화는 일제가 단말마적으로 포악을 부리던 태평양전쟁 속에서 숨죽인 채 떨고 있다가 활짝 기지개를 켜며 새 조국건설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해방되던 1945년은 을유년, 그 해를 새기는 뜻으로 을유문화사가 이름을 내걸고 정지용.이상화.신석초등 말과 글을 빼앗겼던 암흑 속에서도 광채나는 시의 혼을 일깨웠던 시인들의 시집부터 출판을 서두른다.
그 책들 가운데 46년 6월 6일자로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삼인시청록집(三人詩靑鹿集)'이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 '청록파'라고 하는 가장 확실한 에콜의 봉우리를 치솟게한 이 시집의 출판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새로 문을 연 을유문화사는 윤석중.조풍연이 편집책임을 맡고 있었고 신인인 박두진이 직원으로 입사했는데, 윤석중이 박두진에게 시집을 내줄테니 시를 가져 오라고 했다.
박두진이 시집에 실을 만한 시가 열 편 남짓 밖에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친구들 것이라도 한 권 시집 분량의 시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다. 박두진은 박목월.조지훈 등 '문장'지에 함께 등단한 신진 시인들에게 연락했으나 모두 형편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다시 수정안이 나온 것이 그러면 세 사람의 시라도 한 권으로 묶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아진 것이 박목월의 '윤사월''나그네'등 15편, 조지훈의 '완화삼''승무'등 12편,박두진의 '향현''묘지송'등 12편, 합해서 39편이었다.
다음은 시집의 이름을 어떻게 붙일 것인가였다. 이 대목에서 윤석중은 세 사람을 뽑아준 스승인 정지용이 이미 '백록담(白鹿潭)'을 내었으니 거기에 짝을 맞춰 젊은 '청록집'으로 하자고 했다는 것이고, 박두진은 아니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두 분의 말이 다 옳은 것일 수도 있다. 시집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놓고 선택하는데 박두진의 제안에는 '청노루'에서 딴 '청록집'이 들어있었을 터이고 윤석중의 채택에는 정지용의 '백록담'과 짝을 이루는 쪽에서 각인이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문장'은 39년 2월 1일 창간되어 41년 4월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되기까지 통권27호를 내며 활발한 창작과 우수한 신인배출로 일제강점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예전성기를 이뤘던 순수문예지였다. 편집 겸 발행인은 김연만(金練萬)이었지만 실제로 편집과 운영은 이태준(李泰俊)이 도맡아 했었다.
정지용은 청록파 세 시인 이외에도 이한직.김종한 등을 추천해 시단에 내보냈는데 우연히 세 사람의 호흡이 맞았던지 3인시집이 문학사의 한 유파로 남게 된 것이다.
박두진은 39년 6월호에 '향현''묘지송'을, 40년 1월호에 '의(蟻)''들국화'를 발표해 가장 먼저 등단했고, 조지훈은 39년 4월호 '고풍의상'으로 초회 추천은 앞섰으나 40년 2월호 '봉황수'로 박두진보다 한 달 늦게 나왔고 박목월은 '길처럼'이 39년 9월호에, '연륜'이 40년 9월호에 각각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추천되어 시단의 새 별이 되었다.
지훈은 막 추천 과정을 마친 40년 경주에 있는 목월에게 만나러 가겠다는 전보를 친다. 목월은 '조지훈 환영'의 깃발을 들고 경주역으로 마중나가서 1주일을 함께 술과 유흥으로 지낸다.
그때 '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달린 시 '완화삼(玩花衫)'을 지훈은 준다. "구름 흘러가는/물길은 7백리/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는 강마을 타는 저녁 노을이여".
이에 목월은 '나그네'로 화답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보다 아름다운 만남, 아름다운 한때가 어디 있을까.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중앙일보] 2003-01-20
<감상하기>완화삼 / 조지훈 시/정운진 곡/소프라노 박미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