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노래'에 비친 시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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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목월
"사람은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플라톤은 말했고 바이런은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지거나 불행해져야 한다"고 했다. 왜 인류는 시인을 낳고 시인은 시를 쓰며 사람들은 시를 읽는가라는 물음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시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일 것이다.
조국도 혁명도 종교도 가난도 배신도 모두 시 속에서는 사랑의 모습으로 꽃피워진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사랑에 빠지면 어떤 시를 낳는가를 우리는 박목월에게서 배운다.
목월은 '문장'지에 추천 받을 때 평소 좋아하는 시인 수주(樹州)변영로의 아호인 수자에서 나무목(木)자를 따고 소월(素月)김정식에서 달월(月)자를 따서 지은 것이 본명 영종(泳鍾)을 누르고 그의 이름으로 굳혀져 있다.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계성중학3학년 때 열여섯살 나이로 잡지 '어린이'와 '신가정'에 동요 '통딱딱 통딱딱'이 당선되어 동요시인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고 경주에서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던 때 기차여행에서 만난 충남 공주 처녀 유익순이 우연하게 직장 동료의 처제여서 불국사에서 다시 만나는 기연으로 혼담이 싹터 결혼하게 된다.
시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고 아홉식구의 가장이어야 했던 목월이 6.25 전쟁을 전후한 궁핍의 세월을 어떻게 넘어왔는가를 1964년 시'가정'에서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19문 반의 신발이 왔다"고 차마 쏟아내기 어려운 아버지 숨은 얼굴을 드러낸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로 이땅의 아이들에게 동심을 키워준 동요시인 박영종, 그리고 청록파의 3가시인으로 가장 많은 명편의 시들을 써냈으며 문학지가 없고 더구나 시전문지가 없어 후배 시인들이 고통을 받을 때 재산가도 엄두를 못내는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발행,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늘토록 30년을 이어오도록 큰 몫을 해낸 시인 박목월에게도 아름답고도 아픈 사랑이 있었다.
대구로 피란 내려가서 있던 53년 봄. 목월은 교회에서 서울의 명문여대생 H를 만난다. 시인과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와의 만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해 환도와 함께 H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목월은 H의 태도가 존경을 넘어서 이성의 사랑으로 싹트는 기미가 있자 후배시인에게 H를 잘 설득할 것을 부탁한다.
명동문예살롱에서 H는 목월이 보낸 시인에게 "나는 사랑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막무가내였다.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때 목월은 어디론가 잠적하게 된다. H와 제주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뒤에 알려지고 그 사랑의 도피생활이 넉달째 들어섰을 때 부인 유익순 여사가 제주를 찾아간다. 새로 지은 목월과 H의 겨울 한복과 생활비로 쓸 돈봉투를 들고.
끝내 목월은 H와 헤어지고 서울로 돌아온다. 김성태곡으로 널리 애창되는 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는 그 H를 두고 지은 것이다.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바로 아내와 아들,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두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한다.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고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붓을 놓고 갔다. 그 하늘 구만리 기러기 울어예는 뜻을 내사 알겠네.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중앙일보] 2003-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