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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고향'과 '향수' 의 시인 정지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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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 -정지용

국토는 빼앗겨도 민족은 살아남지만 모국어를 잃으면 민족은 소멸된다.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빼앗으려 한 것은 배달의 핏줄을 없애려 한 것인데 그 채찍을 맞으며 우리의 모국어를 날로 새롭게 씨 뿌리고 가꾼 시인들은 이 나라를 지킨 언어의 파수꾼이며 독립군이었다.

마땅히 초등학교에서부터 읽고 외야 할 지용의 시가 대학에서의 연구조차도 금지되어 땅 속에 묻혀 있음에 발만 구르던 문학동네에서 정지용 해금운동이 일어난 것은 1982년 6월이었다.
이희승.박화성.모윤숙.최정희.조경희.김동리.서정주.박두진.구상 등 문단인사와 이병도.이선근.방용구 등 학계인사 48인이 서명하여 당국에 정지용 저작물 복간을 진정한 것이다.
그 서명을 받으러 갔을 때 황순원은 "아무렴요 지용선생은 애국자이시니까요"했다.'애국자'라는 말 속에는 시인이 시로 바친 나라사랑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문공부의 소식통인 MBC의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지용 시인의 해금이 있을 것 같으니 방송출연을 준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직된 5공정부는 공안부처의 불가론을 못이겨 끝내 6공정부로 공을 넘기고 말았다.

지용은 결코 스스로 북녘을 선택할 사람이 아님을 그를 잘 아는 문단, 학계, 언론계의 인사들이 만장일치로 증언하는 데도 미적거리다가 해금된 것은 1988년 3월 31일 노태우 새 정부가 들어서고 시인 정한모가 문공부장관에 앉은 직후였다.
해금 소식이 있자마자 지용시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지용회를 만들었다.
회장에는 지용과 함께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던 방용구(龐溶九)가 맡고 문단을 비롯한 사회 각계인사, 그리고 이화여전 제자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그해 5월 15일 지용의 생일에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제1회 지용제의 막을 올린다.

옥천문화원장 박효근이 참석했다가 시인의 부활제로 올린 시의 한마당에 감동하여 시인의 고향 옥천에서도 열어달라고 간청한다.
지용회는 서둘러 김남조 등 원로 중진 시인들과 당시 인기 절정이던 박경리 원작의 KBS드라마 '토지'의 주인공 최수지를 비롯한 출연진을 두 대의 관광버스에 싣고 6월 25일 옥천으로 내려갔다.
지용이 다니던 죽향(옛 이름은 옥천)초등학교 마당에 버스가 도착하자 정지용이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이들과 시장거리의 아낙네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1902년에 그가 태어나고 자란, 허름한 함석 지붕으로 바뀐 생가도 둘러보고 읍내 산언덕에 번듯하게 지어놓은 관성회관에서 지용의 시와 노래, 그리고 춤의 한마당이 벌어지니 5백 객석의 자리가 넘쳐나고 있었다.

지용회는 시 '향수'를 변훈과 김희갑에게 따로 작곡을 의뢰해 변훈 곡은 테너 임정근이 불렀고 김희갑 곡은 박인수, 이동원이 불렀는데 대중성이 앞선 김희갑 곡이 시와 더불어 높고 멀리 울려퍼져 '향수'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불멸의 노래로 타오르게 되었고 옥천은 '향수'의 고장이 되었다.

저 시퍼렇던 유신정권의 끄트머리, 유신을 반대하는 문인.교수.언론인들이 송년회를 하던 자리에서 성래운 교수는 양성우의 시 '겨울공화국'을 암송했고 나는 '향수'를 소리 높이 외서 박수를 받았었다.
정지용을 읽지 못하게 하던 때 '향수'를 비롯한 시들을 외는 것이 자랑이던 나는 그 시가 노래로 불리면서 외야할 까닭을 잃게 되었다.
생전에 뵙지도 못한 내가 몇 해 전부터 지용회 회장을 떠맡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지용회를 이끌어온 김성우.김수남 두 명예시인이 할 일을 내게 미룬 것이다.

옥천에서는 해마다 지용제가 열리고 지용문학상도 제정되어 제1회 박두진 수상으로부터 14회까지 내려와 지난해 '정지용 탄생100년제'를 예술의 전당에서 올렸을 때는 김지하 시인이 수상했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중앙일보] 200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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