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노래[김노현 시/김노현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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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이 넘어서 만학으로 음악을 전공한 후 의욕을 불태웠던 김노현이 작사.작곡한 '황혼의 노래'는 평남 대동군의 봄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회상하며 낙화암에서 지은 노래이다.
어스름 해가 지는 황혼녘, 그의 머리속에는 다시는 가볼 수 없는 꿈의 고향이, 마음이 저리도록 그리워진 심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멜로디는 애수적이라기 보다는 적극적이고 밝은 편에 속한다.
작곡가이자 치과의사였던 김노현이 이 곡을 작사.작곡한 것은 1970년 봄. 울적하고 고향생각이 사무칠 때마다 찾아가는 부여 낙화암에서였다.
낙화암과 그 절벽 밑을 흐르는 백마강은 그의 향수를 달래주기에 충분한 절경이다. 그는 동네에 있는 대동강과 그 강에 면한 부벽루, 청루벽과 능라도 반월섬에서 매일 같이 놀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백마강과 그 강에 우뚝 솟은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는 대동강을 닮은 것 같아 이곳에 오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곤 했다.
어느 봄날 낙화암에 올라서서 백제가 망할 때의 삼천 궁녀가 꽃처럼 몸을 날려 백마강에 투신한 한 서린 정경을 상상하다가 지금쯤 진달래 피고 아지랑이가 피고 있을 고향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해가 서쪽 수평선에 잠기는 황혼녘이라 애수는 더욱 짙었다. 나이로 보아서도 인생의 황혼에 선 그로서는 더욱 고향이 그리워졌다.
시인도 아니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시를 그대로 토해냈다. 그리고 곡을 붙였다. 악보를 정리한 곳은 전쟁 후 살아 온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169의 10 자택겸 병원(인성치과)에서였다. '황혼의 노래' 초연은 1975년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성악회의 회원발표에서였다. 성악가이자 의사이며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던 박성태씨가 불렀다. 그후 엄정행, 신영조, 박인수, 백남옥, 강화자 씨등이 불러 방송과 레코드로 소개되었다. 그는 낙화암이란 가곡도 '황혼의 노래'와 같은 무렵 작사. 작곡했다. 착수에서 완성까지 2-3일이 걸렸다.
'백제의 영웅호걸 칼 끝이 꺽일 때/ 꽃같은 가냘픈 몸 치맛자락 휘날리며/ 사자수 푸른 물결에 떨어진 꽃들아....로 이어지는 가사인데 백제가 멸망할 때 적군에 몸을 더럽힐까 스스로 목숨을 던진 정절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가곡 50여곡과 성가20곡, 현악 4중주곡과 오페라 '심청전', '사랑과 죽음'을 작곡했다.
실향민인 김노현은 1920년 9월 20일 김재조(치과의사)와 어머니 조재만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숭실전문학교와 경성치전(현 서울대 치대)을 졸업했고 집안은 부유했다. 그는 숭실중학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성악가가 되기 위해 성악가 박원정, 숭실전문 교수인 루스 부인(선교사), 그리고 이화전문 교수인 일본인 성악가에게 지도를 받았다.
숭실중학을 졸업한 후 음악을 계속하고 싶어서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철회하고 서울로 올라와 부친의 모교인 경성치전에 입학했다. 1940년대의 초반은 그에게 파란만장한 고난기였다. 1942년 10월 학생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는 학교에서 학생회 총회장, 기독학생회장, 음악부장을 역임해 자연히 일제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고, 왜경의 감시 대상이었다. 왜경에 잡혀가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1년간 징역을 살았다. 만기 출옥할 때는 일본인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그의 밥에 콜레라균을 투입해 그 밥을 먹고 출감한 날로부터 두달 동안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 약도 발달하지 못했던 때라 치료가 용이하지 않았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던 절망상태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만약 살려주시면 일생동안 음악으로 주님께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일주일간을 사선을 넘나들며 간절히 기도한 끝에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회음악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가 되고 싶었으나 부친의 반대로 대학을 졸업한 후 치과병원을 개업했지만 노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성악활동에만 적극적으로 메달렸다.
그가 운영하던 인성치과의 의사는 그 자신뿐이었지만 음악에 관한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병원을 비웠다. 하고픈 일을 하면서 후회없이 산다는 신념이다.
1987년 9월 25일 그는 류관순기념관에서 김노현 가곡의 밤을 가져 '두고온 고향' 등 21곡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성악회 회장, 한국벨칸토회 회장, 작곡가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3년 4월 25일 별세한 그의 유족으로는 출가한 외딸 혜정씨와 부인김성식 여사가 있다.
이향숙 저 가곡의 고향, [한국문원] 발췌
<감상하기>김노현 시/김노현 곡/테너 신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