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화[소월의 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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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은 보러 갈 수 없다. 암울한 식민지의 한 가운데서 고독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아편을 술에 타서 폭음한 뒤 끝내 이승을 떠난 그의 이북 고향을 찾아갈 수는 없다. 눈물과 한과 고독과 애수에 젖어서 살다간 우리의 「국민시인」 김소월(본명 김정식·1902∼1934)의 흔적은 아쉽지만 이남에서나마 더듬어볼 수밖에 없다.
노래로 된 시를 따지자면 소월을 능가할 시인은 없다. 그의 시 수십편이 노래로 불려지고 있고,심지어 어떤 노래는 그냥 유행가인줄로만 알았다가 뒤늦게 소월의 시임을 알고 무릎을 치는 경우도 있다.
「실버들」이란 노래가 그렇고,한 그룹사운드에 의해 불려진 「세상 모르고 살았구나」가 그렇고,「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으로 시작되는 「부모」라는 노래도 그렇다. 「산유화」나 「개여울」 「초혼」 「못잊어」 등 잘 알려진 노래는 물론 부지기수다. 사정이 이러하거늘 소월의 문학적 배경이 갈 수 없는 이북 땅이라 한들,어찌 그를 이 기행에서 배제할 수 있는가.
코스모스와 붓꽃,사루비아가 단풍나무 그늘아래 서로의 자태를 겨루고 있는 화단 안쪽으로 교사의 창문이 반쯤 열려 있다. 노란 주전자 하나가 가을볕을 쬐고 있는 창턱을 넘어 하교해버린 학생들이 떠들던 여운이 텅 빈 운동장으로 새어나온다. 소월의 추억도 전후 이남으로 옮겨온 오산학교 교정으로 같이 따라왔을까.
소월이 안서 김억을 만나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들어 빛나는 시편들을 대부분 창작했던 오산학교는 비록 명칭은 오산중고등학교로 바뀌고 장소 또한 낯선 서울땅(용산구 보광동)으로 옮겨졌지만 교정 한 켠에는 그의 시혼을 기리는 시비가 고즈넉이 서 있다. 오래된 화강암 위에 시선이 박히자 「진달래꽃」이 저 혼자 소리 내어 바라보는 이의 가슴속으로 쳐들어온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 영변에 약산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소월은 1902년 외갓집(평북 구성군 서산면)에서 태어나 백일잔치 후 고향(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산리)에 돌아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부친이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한 뒤 정신질환자가 돼서 가정에는 한쪽에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훗날 평론가들이 소월의 눈물과 한을 이야기할 때는 이 대목을 주로 언급하기도 한다.
소월은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민족정신을 강하게 일깨워줬던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선생이 설립한 학교로,소월 외에도 춘원 이광수,고당 조만식,안서 김억,다석 유영모,이중섭 등이 인연을 맺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소월은 이 학교에 4학년까지 다닌 뒤 배재고등학교로 편입,그곳에서 졸업했지만 소월시를 개화시킨 요람이 오산학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소월이 오산학교에서 김억을 만난 것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오산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민요시를 한창 시험하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월은 이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비로소 시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소월시 명작의 대부분은 이때를 전후하여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 //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 꽃이 좋아 / 산에서 / 사노라네 // 산에는 꽃 지네 / 꽃이 지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지네』
소월의 많은 시들이 노래로 불려지고 있지만 가곡으로 된 것중에서 가장 애창되는 「산유화」 전문이다. 도쿄음악학교에서 수학한 뒤 홍난파 현제명의 영향을 받은 악풍으로 민족시인의 서정성을 잘 살려낸 김성태씨가 작곡한 노래다. 청년기의 우수와 재기가 한껏 발산되는 시절에 소월은 「산유화」를 비롯해 수많은 시편을 쓰고 지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과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과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을 목놓아 부르기도 하고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며 목가적인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산새도 오리나무 / 위에서 운다」고 토로한다.
소월의 시에서 명시적인 항일의식이나 민족의식은 발견되지 않지만 평자들은 어린 시절 부친이 일본인들에게 죽도록 맞아 정신이상자가 된 성장환경과 식민지시절 오산학교에서 일깨워진 민족의식 등을 근거로 그의 시가 단순한 눈물과 애수의 축적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평론가 유종호씨는 소월이 『전래적 구비문학에 대한 청각적 충실과 외래어 쓰기가 돌림병처럼 퍼져가던 시절에 단 한번도 외래어를 쓰지 않고 나라말의 기층어휘로 시를 썼던 우리의 귀한 「터줏시인」』이라며 『그는 젊음이 과도하게 또 불필요하게 억압되던 시절에 젊은 영혼의 실상을 터놓고 노래하여 그것을 문학적으로,또 도덕적으로 정당화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소월의 죽음은 쓸쓸했다. 서울로 유학해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불행히도 관동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하고 조부의 엄명을 받아 귀향한다. 1925년 주변의 권유로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출간하고,「개벽」을 비롯해 「영대」「조선문단」 등의 문예지와 신문에도 시를 발표하며 한동안 활발한 시작활동을 벌였지만 지금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시들은 대부분 그 이전에 쓰여진 것들이다.
이후 소월은 고향에 머무르기도 하고 평양으로 이사간 숙모댁에도 가 있었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처가가 있는 구성면 남시로 이사가서 동아일보지국을 9년여동안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인생을 노래하던 순결했던 때와는 달리 「돈타령」과 「생과 돈과 사」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물밀듯 밀려오는 허무속에서 끝내 시인은 길을 잃었다. 그는 읍내 장에 나가 아편을 산 뒤 술에 타서 아내와 더불어 취하도록 마신 뒤 잠이 들었고 이튿날 아침에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싸늘한 몸이 되었다.
소월의 시혼이 깃들인 교정의 코스모스길을 어린 오산학생 하나가 홀로 걸어간다. 가을 햇볕은 이미 서늘하게 식어갈 무렵인데 어린 소년은 무거운 책들을 배낭에 구겨넣고 그것도 모자라 또하나의 가방을 손에 들고 힘겹게 걸어간다. 일찍이 저 나이쯤의 소월이 시혼을 불태우던 서정을 알기나 할까. 민족시인 김소월은 당대의 좌절과 소외와 울분속에서 차라리 자신을 모두 잊어버리라고 토로했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정작 그 시편을 노래로 만들어 기리고 있으니,세월이 야속하긴 야속하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못 잊어」중에서)
1996-10-13 세계일보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