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이은상 시/박태준 곡]
〈사우(思友)〉는 타향살이와 일제 강점하의 조국에서 수시로 엄습해 오는 고향 생각과 친구에 대한 추억을 애조적으로 옲은 가곡이다.
가사는 4계절의 고향 풍경을 4절에 각각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서술했다. 철따라 새롭게 바뀌는 고향 풍경을 영화를 보듯이 차례로 그려 타향살이의 시름에 겨운 모든 이의 향수를 달래 준다.
이 가곡이 작곡된 것은 1922년 어느 날 밤 마산 바닷가에서 였다. 당시 작곡가 박태준(朴泰俊)과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마산 창신학교에서 각각 음악과 국어를 가르치는 동료 교사 사이였다. 뜻이 맞고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같이 했던 두 사람은 퇴근 후 자주 학교에서 가까운 합포만(合浦灣) 바닷가를 산책했다.
그 날도 어스름한 초저녁. 갯 냄새가 바람에 실려오는 길을 두 젊은 예술가는 걷고 있었다. 박태준이 22세, 노산은 19세의 피끓는 청년들이었다. 암울한 시대상과 예술을 얘기하던 중 갑자기 작곡가의 뇌리에 악상이 스쳐 갔다. 급히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오선지에 멜로디를 옮겼다. 그리고 다음날 노산에게 곡을 보여 주고 그에 맞는 가사를 지어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노산은 고향 풍경을 가사로 썼는데 이 가곡이 바로 〈사우〉 이다.
노래는 보통 시가 먼저 씌어지고 그 시를 작곡가가 선택해서 작곡을 하는 것이 순서인데 홍난파의 〈봉선화〉와 박태준의 〈사우〉는 그 반대로 먼저 작곡이 된 셈이다. (이 가곡은〈동무 생각〉으로 제목이 바뀐 때도 있다.)
1986년 19월 작고한 박태준은 1900년 대구 남성로 157번지에서 출생했다. 계성중학과 숭실전문을 졸업한 그는 노산의 모교이며 노산의 선친이 설립한 창신학교에서 1921∼1923년에 걸쳐 교편을 잡았다. 이 때 노산은 잠시 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두 사람은 세 살 차이지만 예술가로서의 공감대와 이해의 폭이 같은 젊은 친구였다. 두 사람은 공동 작업으로 1922년경에 〈미풍〉〈님과 함께〉〈소나기〉등의 가곡과 창신중고교에서 현재도 불리는 교가를 지었다.
돈독한 우의는 결국 인척 관계로까지 발전해 박태준은 노산의 고종사촌 동생 김봉렬(金鳳烈)씨와 결혼했다.
작고하기 전 박태준은 "고향 얘기는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나는 일이 없지만 주소는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집을 더듬는 일은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대구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남성로로 가 주세요" 했더니 운전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무데나 내려 주었다. 또 택시를 타고 역시 "남성로 가자" 해도 마찬가지. 할 수 없이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한참만에 노인을 찾아 붙잡고 물었다. "약전골목이 남성로라예" 그제야 운전기사는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불럭을 돌아서 차를 세워 준 곳은 처음에 차를 탔던 곳의 길 건너였다.
남성로라는 이름보다 '약전골목'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전국에서 옛날부터 유명한 약령시장 거리, 바로 그 곳이다.
거리 양옆에는 한약재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입구에서부터 바람에 실려오는 갖가지 약초 냄새가 진하게 코에 스친다. 가게마다 약초의 녹용·녹각 등을 큰 함지박에 담거나 푸대에 담아 가게 안팎에 수북이 쌓아 놓고 있다. 예전에는 며칠에 한 번씩 장이 섰지만 지금은 상설시장으로서 전국의 한약재가 모였다가 다시 도매가 이루어져 전국에 판매되는 한약재의 집산지이며 도매시장 장터이다. 지금도 이 거리는 옛날만큼 명성은 없지만 서울에서도 좋은 약재를 싸게 찾는 발길이 잦다. 인삼 냄새, 녹용 냄새가 가득한 이 거리에서 박태준은 어린 시절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꿈의 고향, 음악의 고향 집은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없어 애써 찾은 발길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아무리 물어도 그 157번지가 지금의 어디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지번(地番)은 이미 수십년 전 도시계획으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대구시청의 옛 시내 지도를 조회해서 확인한 결과 약전 골목 입구 네거리 안치과의원 앞길임을 알았다.
"이향숙 저 가곡의 고향(한국문원)"
대구가 낳은 인물 박태준
* 이 글은 대구광역시 공식 홈에 실린 글을 일부 편집.보완한것입니다.(2003년 6월 17일)
박태준(朴泰俊)은 작곡가이자 합창지휘자.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법을 배워〈가을밤〉·〈골목길〉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동요의 초창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졸업 후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선구적 시인 이은상(李殷相)과 함께 〈미풍〉·〈님과 함께〉·〈소나기〉·〈동무생각〉·〈순례자〉등의 예술가곡 형태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작곡형식으로는 1920년대 초반에는 진취적이고 시의 선택도 유절가곡에서 자유스러운 형태를 채택하여 우리나라 예술가곡류의 효시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24년에서 1931년까지 모교인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오빠생각〉·〈오뚝이〉·〈하얀밤〉·〈맴맴〉등의 우리나라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932년 이후, 그는 미국의 더스커럼대학과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합창지휘를 배웠다. 귀국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민족항일기 말에는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전문적 합창단인 한국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단하여 1973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며 합창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가를 설치하여 기독교음악교육의 초석을 쌓고,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학장 및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이후 1973년까지 남대문교회의 성가대를 지휘하고, 또한 1968년 이후 한국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울음악제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동요 등 150여 곡으로, 정돈되고 아름다우면서 격정이 내재되어 있다.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작곡)이 되고 예술원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고마우신 선생님상, 소파상 등을 받았으며, 후학양성과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구성악회 주관으로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에 흉상을 건립하였다
가사는 4계절의 고향 풍경을 4절에 각각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서술했다. 철따라 새롭게 바뀌는 고향 풍경을 영화를 보듯이 차례로 그려 타향살이의 시름에 겨운 모든 이의 향수를 달래 준다.
이 가곡이 작곡된 것은 1922년 어느 날 밤 마산 바닷가에서 였다. 당시 작곡가 박태준(朴泰俊)과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마산 창신학교에서 각각 음악과 국어를 가르치는 동료 교사 사이였다. 뜻이 맞고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같이 했던 두 사람은 퇴근 후 자주 학교에서 가까운 합포만(合浦灣) 바닷가를 산책했다.
그 날도 어스름한 초저녁. 갯 냄새가 바람에 실려오는 길을 두 젊은 예술가는 걷고 있었다. 박태준이 22세, 노산은 19세의 피끓는 청년들이었다. 암울한 시대상과 예술을 얘기하던 중 갑자기 작곡가의 뇌리에 악상이 스쳐 갔다. 급히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오선지에 멜로디를 옮겼다. 그리고 다음날 노산에게 곡을 보여 주고 그에 맞는 가사를 지어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노산은 고향 풍경을 가사로 썼는데 이 가곡이 바로 〈사우〉 이다.
노래는 보통 시가 먼저 씌어지고 그 시를 작곡가가 선택해서 작곡을 하는 것이 순서인데 홍난파의 〈봉선화〉와 박태준의 〈사우〉는 그 반대로 먼저 작곡이 된 셈이다. (이 가곡은〈동무 생각〉으로 제목이 바뀐 때도 있다.)
1986년 19월 작고한 박태준은 1900년 대구 남성로 157번지에서 출생했다. 계성중학과 숭실전문을 졸업한 그는 노산의 모교이며 노산의 선친이 설립한 창신학교에서 1921∼1923년에 걸쳐 교편을 잡았다. 이 때 노산은 잠시 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두 사람은 세 살 차이지만 예술가로서의 공감대와 이해의 폭이 같은 젊은 친구였다. 두 사람은 공동 작업으로 1922년경에 〈미풍〉〈님과 함께〉〈소나기〉등의 가곡과 창신중고교에서 현재도 불리는 교가를 지었다.
돈독한 우의는 결국 인척 관계로까지 발전해 박태준은 노산의 고종사촌 동생 김봉렬(金鳳烈)씨와 결혼했다.
작고하기 전 박태준은 "고향 얘기는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나는 일이 없지만 주소는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집을 더듬는 일은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대구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남성로로 가 주세요" 했더니 운전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무데나 내려 주었다. 또 택시를 타고 역시 "남성로 가자" 해도 마찬가지. 할 수 없이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한참만에 노인을 찾아 붙잡고 물었다. "약전골목이 남성로라예" 그제야 운전기사는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불럭을 돌아서 차를 세워 준 곳은 처음에 차를 탔던 곳의 길 건너였다.
남성로라는 이름보다 '약전골목'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전국에서 옛날부터 유명한 약령시장 거리, 바로 그 곳이다.
거리 양옆에는 한약재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입구에서부터 바람에 실려오는 갖가지 약초 냄새가 진하게 코에 스친다. 가게마다 약초의 녹용·녹각 등을 큰 함지박에 담거나 푸대에 담아 가게 안팎에 수북이 쌓아 놓고 있다. 예전에는 며칠에 한 번씩 장이 섰지만 지금은 상설시장으로서 전국의 한약재가 모였다가 다시 도매가 이루어져 전국에 판매되는 한약재의 집산지이며 도매시장 장터이다. 지금도 이 거리는 옛날만큼 명성은 없지만 서울에서도 좋은 약재를 싸게 찾는 발길이 잦다. 인삼 냄새, 녹용 냄새가 가득한 이 거리에서 박태준은 어린 시절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꿈의 고향, 음악의 고향 집은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없어 애써 찾은 발길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아무리 물어도 그 157번지가 지금의 어디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지번(地番)은 이미 수십년 전 도시계획으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대구시청의 옛 시내 지도를 조회해서 확인한 결과 약전 골목 입구 네거리 안치과의원 앞길임을 알았다.
"이향숙 저 가곡의 고향(한국문원)"
대구가 낳은 인물 박태준
* 이 글은 대구광역시 공식 홈에 실린 글을 일부 편집.보완한것입니다.(2003년 6월 17일)
박태준(朴泰俊)은 작곡가이자 합창지휘자.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법을 배워〈가을밤〉·〈골목길〉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동요의 초창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졸업 후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선구적 시인 이은상(李殷相)과 함께 〈미풍〉·〈님과 함께〉·〈소나기〉·〈동무생각〉·〈순례자〉등의 예술가곡 형태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작곡형식으로는 1920년대 초반에는 진취적이고 시의 선택도 유절가곡에서 자유스러운 형태를 채택하여 우리나라 예술가곡류의 효시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24년에서 1931년까지 모교인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오빠생각〉·〈오뚝이〉·〈하얀밤〉·〈맴맴〉등의 우리나라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932년 이후, 그는 미국의 더스커럼대학과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합창지휘를 배웠다. 귀국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민족항일기 말에는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전문적 합창단인 한국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단하여 1973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며 합창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가를 설치하여 기독교음악교육의 초석을 쌓고,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학장 및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이후 1973년까지 남대문교회의 성가대를 지휘하고, 또한 1968년 이후 한국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울음악제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동요 등 150여 곡으로, 정돈되고 아름다우면서 격정이 내재되어 있다.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작곡)이 되고 예술원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고마우신 선생님상, 소파상 등을 받았으며, 후학양성과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구성악회 주관으로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에 흉상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