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시/최영섭 곡]
-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탄생
1961년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그때도 이미 작곡 실력을 인정받아 여기저기 작곡 의뢰가 많았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61년, KBS는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제작을 기획했는데 이때 KBS의 동요작곡가 겸 PD인 한용희에게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조국의 산하를 愛讚(애찬)하고 6·25 11주년을 맞아, 멀리 중국·러시아·북한 등지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뜻 있는 곡이어야 했다. 당시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KBS 電波(전파)뿐이었다. 최영섭은곧 바로 한상억을 찾았다.
『선생님, 뭐, 강산을 주제로 한 좋은 詩가 없습니까?』
『왜 없겠어. 밤낮 강과 산, 바다에 관한 詩만 써온 내가…. 염려 마. 그렇잖아도, 당신이 가곡에 써 먹을 詩를 부탁할 때가 됐지 싶었어. 준비해 놓은 게 있어. 1주일 이내로 줄게』
약속대로 그 1주일 후 詩를 받았다. 詩 「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의 가슴을 진하게 두들겼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러면서 선율이, 막힘 없이 떠올랐다.
하룻밤 만에 곡을 끝냈다. 그뿐인가 피아노 반주곡, 관현악 반주까지 작곡을 끝냈다.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을 거듭하는 최영섭으로서는 「하룻밤에」 작곡을 끝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운 금강산」 만큼은 단 한번의 가필도 없었다. 신들린 듯 긁었다』「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이 작곡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11곡 중 하나였다. 당시 작사료는 2000원, 요즘돈 35만원 정도였다.
한상억은 광복 전 이미 금강산은 너더댓 번이나 다녀 와서 금강산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詩人 한상억의 관심사는 평생 산과 강, 바다였다. 그리고 「눈내리는 밤의 초가」, 「대숲에 이는 바람」, 「봄날, 산등성이에 피는 꽃들」을 미치게 사랑했다. 갈데 없는 서정시인이었다.
최영섭은 본인의 작품 600여 곡 중에서 한상억의 가사가 60곡쯤 되며 특히「그리운 금강산」은 작곡가 최영섭의 오늘이 있게 한 1등 공신이라고 말한다.
- 작사자 한상억의 작고
1994년 6월 어느 날. 아침 8시께 작곡가 崔永燮에게로 전화가 걸려 왔다. 지난밤의 폭주로 아직 머릿속이 띵했다.
『여보세요』
『여기, LA입니다. 최영섭 선생님 되십니까?』
『예, 그래요』
『저는, 한상억씨 아들입니다』
『아이, 그렇습니까. 반가워요. 한선생님, 건강 괜찮으시죠?』
『…. 저, 저의 아버님이 지난밤에 돌아가셨습니다』
최영섭은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쥔 손아귀가 스르르 풀어져 나갔다. 아니 불과 열흘 전, 함께 서울 여의도 뷔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던 그가 죽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상억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자. 최영섭의 단짝이자 세상살이의 길동무가 쓰러진 것이다.
40년 전, 작사자 한상억과 작곡자 최영섭은 「그리운 금강산」을 만들면서 「남북통일에의 염원」을 가득히 담았다. 그러나 40년이 흐른 지금도 남북통일은 한갖 신기루일 뿐이다.
이 가곡의 작곡 당시 서른 안팎이었던 최영섭은 이제 일흔 둘이 됐다. 작사가 한상억은 이 세상에 없다. 무심한 세월만 흘렀을 뿐이다.
『「그리운 금강산」이 오랫동안 우리 국민들의, 애창가곡 1위여서 물론 기쁘다. 그러나 정작, 작곡자인 나는 실상 이 노래가 하루라도 빨리 「흘러간 옛 노래」가 되길 바랐다. 통일이 돼 동강난 조국의 산하가 하나로 이어져, 「아, 옛날, 이런 슬픈 노래도 있었구나」하는, 과거형이 됐으면 했다』
- 한상억과 최영섭의 만남
작곡가 최영섭과 詩人 한상억과의 인연은 1953년께, 인천에서 시작됐다. 그때까지도 6·25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절절했다. 그때 최영섭은 스물 넷, 한상억은 서른 여덟이었다.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여기다 한국음악협회 인천지부장, 인천교향악단 지휘자, 인천시 합창단 지휘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문화계 인사 모임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한상억이 대뜸 최영섭에게 물었다.
『고향이 어디죠?』
『강화 화도면입니다만…』
『역시…, 아까 얘길 하는 걸 들으니, 꼭 내 고향 말씨 같아 물었는데, 맞구만요. 반가워요.
난, 바로 그 이웃 동네 양도면에서 태어났소. 아~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한상억은 부자였다.
인천상업학교 출신으로 은행원도 하고 정미소도 가지고 있었다. 교사로 어렵게 사는 최영섭을 物心양면으로 도왔다.
최영섭이 음악회 개최 등으로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얼마간 보탰다. 한상억은 기독교인으로 장로였다. 그런데도 최영섭이 『선생님, 술이나 한 잔 하시죠』하면 두말없이 응했다. 술은 안 마셔도, 반가운 사람과 한잔 술을 놓고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당구장에도 이따금씩 갔다. 한상억의 당구실력은 초보였다. 도사급인 최영섭과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는 데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내비치고 당구를 쳤다. 두 사람은, 1962년 나란히 경기도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한상억 선생은, 전자회사에 다니는 아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정이 안 드는지 툭하면 서울에 왔다. 서울보다는 시골, 우리의 산과 강, 바다를 실컷 둘러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한상억은 서울에 오면 어김없이, 최영섭을 불렀다. 나이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단짝이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 때, 북한에서의 공연에서 테너 안형일이 부른 가곡 「그리워라 두고온 그 사람들」도 한상억의 詩를 최영섭이 작곡한 것이다. 그런 한상억의 죽음은, 두고두고 최영섭을 우울하게 만든다.
한상억의 마지막 고국 나들이도 따지고 보면, 고국의 산과 강, 바다 때문이었다. 심장판막증에 시달리던 한상억이 아들의 지극 정성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 90% 완치가 됐었다. 그러자 고국을 무척 가고 싶어 했다. 담당 의사는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국 나들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담당 의사의 충고는 무색했다.
한상억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았는지, 다시 못 올 모국 산천임을 알았는지, 고국의 산과 강, 바다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닌 것이다.
미국에 되돌아간 지 열흘 만에, 76세로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 그리운 금강산, 그 뒷 이야기들
그리운 금강산은 방송이 되자마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은 방송국으로 『고국에 대한 鄕愁를 느끼고 울었다』는 팬레터를 수없이 보내왔다.
한편 음악회를 통해 이 가곡이 알려지게 되자 성악가들이 앞다투어 자기의 레퍼토리로 삼으려 했다. 그 후 많은 성악가들이 음반으로 취입을 하였고, 한국가곡 연주회에서는 필수 연주곡목이 되다시피 했으며, 음악 교과서에 수록돼 누구나 즐기는애창곡이 되었다.
더구나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 에게는 망향의 恨을 달래 주고 통일의 염원을 되새기게 하는 곡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러한 범국민적 열기에 힘입어 곡이 발표된 지 10년이 지난 1972년에 「그리운 금강산」은 새로운 轉機(전기)를 맞게 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될 때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곡으로 채택돼 방송에서 연일 이 곡을 틀어 준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운 금강산」은 「통일 주제가」라는 명칭과 함께 「국민 가곡」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85년 9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개최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 」의 레퍼토리로 채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주민들은 다른 곡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소프라노 李揆道(이규도·60·이화여대 음대 교수 )씨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자 全관중 이 기립 박수를 하는 등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다른 곡들에 대해서는 『남조선 음악은 국적불명의 頹廢的(퇴폐적)인 음악』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공개적인 찬사를 보낼 수 없어 묵시적으로나마 동조를 한것이라는 說에서부터, 공연 당시에는 歌詞 (가사)를 알아 들을 수 없어 무슨 뜻이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분노를 하였다는 說 , 대외적으로는 침묵을 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그리운 금강산이란 북조선 체제를 그리워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열망을 직접적 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금강산을 빌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逆선전에 이용하였다는 說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운 금강산」의 原가사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민족 화합을 조성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어 왔다. 「더럽힌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더럽힌 자리」 등의 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한 정권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가지고 금강산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5년 9월에 있었던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과 같은 민 족의 화합의 마당을 마련하는 자리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내용의 노래를 선택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작사자 자신도 가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사로 개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 후 가사를 일부 수정했다.
「더럽힌 지 몇 해」가 「 못 가본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이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가 「예대로인가」로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곡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총체 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반면 서사적인 요소와 사실주의적 요소가 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운 금강산」 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기조로 하면서 거기에 서사성을 가미한 「敍事的(서사적)인 抒情(서정)가곡」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게다가 분단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이 시대의 고통과 이 시대의 현실과 이 시대의 정서를 호소력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을 直視 (직시)하게 하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사실주의 가곡의 성격도 가진다. 즉, 하나의 노래를 통해 다양한 음악적 정서를 體得( 체득)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아카데믹한 가곡보다는 旋律美(선율미)가 풍부한 가곡을 더 좋아하고, 피아노 반주보다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더 좋아한다.
가곡을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특수한 현상인데, 오케스트라 반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효과를 줄 뿐 아니라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고 청중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쉽다.
선율 중심의 가곡인 동시에 악상의 변화가 잦고 音色的인 대비와 극적인 효과를 요구 하는 「그리운 금강산」의 경우, 피아노보 다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해야 그 맛을 효과적으로 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 의 대중적 음악 기호와 잘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감미로운 선율, 곡 전체를 감도는 서정미, 억압된 감정의 표출 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극적 효과 등 대중 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그 안에 전부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원래 칸타타(cantata ·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으로 독창·중창·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지는 交聲曲)로 작곡되었으나 지금은 가곡이 되었고, 또 세미 클래식이 발달되지 않은 한국적 음악 상황에서 세미 클래식의 기능과 함께 감상용 경음악, 무 드음악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는 대중적 인기가 「그리운 금강산」으로 하여금 다양한 역할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작곡자가 아니라 대중들에 의해 그 음악 양식이 바뀐 것은 아마 「그리운 금강산 」이 유일할 것이다.
1961년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그때도 이미 작곡 실력을 인정받아 여기저기 작곡 의뢰가 많았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61년, KBS는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제작을 기획했는데 이때 KBS의 동요작곡가 겸 PD인 한용희에게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조국의 산하를 愛讚(애찬)하고 6·25 11주년을 맞아, 멀리 중국·러시아·북한 등지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뜻 있는 곡이어야 했다. 당시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KBS 電波(전파)뿐이었다. 최영섭은곧 바로 한상억을 찾았다.
『선생님, 뭐, 강산을 주제로 한 좋은 詩가 없습니까?』
『왜 없겠어. 밤낮 강과 산, 바다에 관한 詩만 써온 내가…. 염려 마. 그렇잖아도, 당신이 가곡에 써 먹을 詩를 부탁할 때가 됐지 싶었어. 준비해 놓은 게 있어. 1주일 이내로 줄게』
약속대로 그 1주일 후 詩를 받았다. 詩 「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의 가슴을 진하게 두들겼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러면서 선율이, 막힘 없이 떠올랐다.
하룻밤 만에 곡을 끝냈다. 그뿐인가 피아노 반주곡, 관현악 반주까지 작곡을 끝냈다.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을 거듭하는 최영섭으로서는 「하룻밤에」 작곡을 끝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운 금강산」 만큼은 단 한번의 가필도 없었다. 신들린 듯 긁었다』「그리운 금강산」은 최영섭이 작곡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11곡 중 하나였다. 당시 작사료는 2000원, 요즘돈 35만원 정도였다.
한상억은 광복 전 이미 금강산은 너더댓 번이나 다녀 와서 금강산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詩人 한상억의 관심사는 평생 산과 강, 바다였다. 그리고 「눈내리는 밤의 초가」, 「대숲에 이는 바람」, 「봄날, 산등성이에 피는 꽃들」을 미치게 사랑했다. 갈데 없는 서정시인이었다.
최영섭은 본인의 작품 600여 곡 중에서 한상억의 가사가 60곡쯤 되며 특히「그리운 금강산」은 작곡가 최영섭의 오늘이 있게 한 1등 공신이라고 말한다.
- 작사자 한상억의 작고
1994년 6월 어느 날. 아침 8시께 작곡가 崔永燮에게로 전화가 걸려 왔다. 지난밤의 폭주로 아직 머릿속이 띵했다.
『여보세요』
『여기, LA입니다. 최영섭 선생님 되십니까?』
『예, 그래요』
『저는, 한상억씨 아들입니다』
『아이, 그렇습니까. 반가워요. 한선생님, 건강 괜찮으시죠?』
『…. 저, 저의 아버님이 지난밤에 돌아가셨습니다』
최영섭은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쥔 손아귀가 스르르 풀어져 나갔다. 아니 불과 열흘 전, 함께 서울 여의도 뷔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던 그가 죽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상억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자. 최영섭의 단짝이자 세상살이의 길동무가 쓰러진 것이다.
40년 전, 작사자 한상억과 작곡자 최영섭은 「그리운 금강산」을 만들면서 「남북통일에의 염원」을 가득히 담았다. 그러나 40년이 흐른 지금도 남북통일은 한갖 신기루일 뿐이다.
이 가곡의 작곡 당시 서른 안팎이었던 최영섭은 이제 일흔 둘이 됐다. 작사가 한상억은 이 세상에 없다. 무심한 세월만 흘렀을 뿐이다.
『「그리운 금강산」이 오랫동안 우리 국민들의, 애창가곡 1위여서 물론 기쁘다. 그러나 정작, 작곡자인 나는 실상 이 노래가 하루라도 빨리 「흘러간 옛 노래」가 되길 바랐다. 통일이 돼 동강난 조국의 산하가 하나로 이어져, 「아, 옛날, 이런 슬픈 노래도 있었구나」하는, 과거형이 됐으면 했다』
- 한상억과 최영섭의 만남
작곡가 최영섭과 詩人 한상억과의 인연은 1953년께, 인천에서 시작됐다. 그때까지도 6·25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절절했다. 그때 최영섭은 스물 넷, 한상억은 서른 여덟이었다.
최영섭은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다. 여기다 한국음악협회 인천지부장, 인천교향악단 지휘자, 인천시 합창단 지휘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문화계 인사 모임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한상억이 대뜸 최영섭에게 물었다.
『고향이 어디죠?』
『강화 화도면입니다만…』
『역시…, 아까 얘길 하는 걸 들으니, 꼭 내 고향 말씨 같아 물었는데, 맞구만요. 반가워요.
난, 바로 그 이웃 동네 양도면에서 태어났소. 아~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한상억은 부자였다.
인천상업학교 출신으로 은행원도 하고 정미소도 가지고 있었다. 교사로 어렵게 사는 최영섭을 物心양면으로 도왔다.
최영섭이 음악회 개최 등으로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얼마간 보탰다. 한상억은 기독교인으로 장로였다. 그런데도 최영섭이 『선생님, 술이나 한 잔 하시죠』하면 두말없이 응했다. 술은 안 마셔도, 반가운 사람과 한잔 술을 놓고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당구장에도 이따금씩 갔다. 한상억의 당구실력은 초보였다. 도사급인 최영섭과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는 데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내비치고 당구를 쳤다. 두 사람은, 1962년 나란히 경기도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한상억 선생은, 전자회사에 다니는 아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정이 안 드는지 툭하면 서울에 왔다. 서울보다는 시골, 우리의 산과 강, 바다를 실컷 둘러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한상억은 서울에 오면 어김없이, 최영섭을 불렀다. 나이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단짝이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 때, 북한에서의 공연에서 테너 안형일이 부른 가곡 「그리워라 두고온 그 사람들」도 한상억의 詩를 최영섭이 작곡한 것이다. 그런 한상억의 죽음은, 두고두고 최영섭을 우울하게 만든다.
한상억의 마지막 고국 나들이도 따지고 보면, 고국의 산과 강, 바다 때문이었다. 심장판막증에 시달리던 한상억이 아들의 지극 정성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 90% 완치가 됐었다. 그러자 고국을 무척 가고 싶어 했다. 담당 의사는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국 나들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담당 의사의 충고는 무색했다.
한상억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았는지, 다시 못 올 모국 산천임을 알았는지, 고국의 산과 강, 바다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닌 것이다.
미국에 되돌아간 지 열흘 만에, 76세로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 그리운 금강산, 그 뒷 이야기들
그리운 금강산은 방송이 되자마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은 방송국으로 『고국에 대한 鄕愁를 느끼고 울었다』는 팬레터를 수없이 보내왔다.
한편 음악회를 통해 이 가곡이 알려지게 되자 성악가들이 앞다투어 자기의 레퍼토리로 삼으려 했다. 그 후 많은 성악가들이 음반으로 취입을 하였고, 한국가곡 연주회에서는 필수 연주곡목이 되다시피 했으며, 음악 교과서에 수록돼 누구나 즐기는애창곡이 되었다.
더구나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 에게는 망향의 恨을 달래 주고 통일의 염원을 되새기게 하는 곡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러한 범국민적 열기에 힘입어 곡이 발표된 지 10년이 지난 1972년에 「그리운 금강산」은 새로운 轉機(전기)를 맞게 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될 때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곡으로 채택돼 방송에서 연일 이 곡을 틀어 준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운 금강산」은 「통일 주제가」라는 명칭과 함께 「국민 가곡」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85년 9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개최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 」의 레퍼토리로 채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주민들은 다른 곡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소프라노 李揆道(이규도·60·이화여대 음대 교수 )씨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자 全관중 이 기립 박수를 하는 등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다른 곡들에 대해서는 『남조선 음악은 국적불명의 頹廢的(퇴폐적)인 음악』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공개적인 찬사를 보낼 수 없어 묵시적으로나마 동조를 한것이라는 說에서부터, 공연 당시에는 歌詞 (가사)를 알아 들을 수 없어 무슨 뜻이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분노를 하였다는 說 , 대외적으로는 침묵을 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그리운 금강산이란 북조선 체제를 그리워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열망을 직접적 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금강산을 빌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逆선전에 이용하였다는 說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운 금강산」의 原가사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민족 화합을 조성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어 왔다. 「더럽힌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더럽힌 자리」 등의 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한 정권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가지고 금강산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5년 9월에 있었던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과 같은 민 족의 화합의 마당을 마련하는 자리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내용의 노래를 선택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작사자 자신도 가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사로 개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 후 가사를 일부 수정했다.
「더럽힌 지 몇 해」가 「 못 가본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이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가 「예대로인가」로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곡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총체 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반면 서사적인 요소와 사실주의적 요소가 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운 금강산」 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기조로 하면서 거기에 서사성을 가미한 「敍事的(서사적)인 抒情(서정)가곡」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게다가 분단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이 시대의 고통과 이 시대의 현실과 이 시대의 정서를 호소력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을 直視 (직시)하게 하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사실주의 가곡의 성격도 가진다. 즉, 하나의 노래를 통해 다양한 음악적 정서를 體得( 체득)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아카데믹한 가곡보다는 旋律美(선율미)가 풍부한 가곡을 더 좋아하고, 피아노 반주보다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더 좋아한다.
가곡을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특수한 현상인데, 오케스트라 반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효과를 줄 뿐 아니라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고 청중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쉽다.
선율 중심의 가곡인 동시에 악상의 변화가 잦고 音色的인 대비와 극적인 효과를 요구 하는 「그리운 금강산」의 경우, 피아노보 다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해야 그 맛을 효과적으로 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 의 대중적 음악 기호와 잘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감미로운 선율, 곡 전체를 감도는 서정미, 억압된 감정의 표출 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극적 효과 등 대중 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그 안에 전부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원래 칸타타(cantata ·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으로 독창·중창·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지는 交聲曲)로 작곡되었으나 지금은 가곡이 되었고, 또 세미 클래식이 발달되지 않은 한국적 음악 상황에서 세미 클래식의 기능과 함께 감상용 경음악, 무 드음악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는 대중적 인기가 「그리운 금강산」으로 하여금 다양한 역할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작곡자가 아니라 대중들에 의해 그 음악 양식이 바뀐 것은 아마 「그리운 금강산 」이 유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