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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노래[박목월 시/김성태 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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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은 연인과 이별 아픔 절절/해방공간서 「자연」­「고향」 주축삼아 순수시 꽃피워/중년길목에 다가온 애틋한 사랑 이승선 끝내 못잊어

『도화가지 / 반쯤 가리고 / 달이 가네 // 경주군 외동면 / 혹은 내동면 / 불국사 터를 잡은 / 그 언저리로 // 도화가지 / 반쯤 가리고 / 달이 가네.』(「달」 전문)
마지막 가을의 시리도록 푸른 쪽빛 하늘을 이고 「달」이 지상에 서 있다. 천년 전 신라의 하늘 위에 떠있었음직한 구름 형상의 화강암이 「달」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 달 위에 떠있는 또 하나의 반달은,그 반원의 화강암은,이것이 목월의 시비임을 또렷하게 검은색 글씨로 음각했다.

대관령에서는 첫눈 소식이 날아오지만 이곳 남녘 목월의 고향 경주는 아직도 나른한 늦가을의 햇볕이 풍성하다. 말라붙은 보문단지 호반 산책로 모서리에 화려한 듯 서늘한 쓸쓸함으로,목월의 시비는 서있다. 신라에서 빌려온 듯한 변색된 황갈색 오래된 화강암 다리 한 쪽 위로 도회지 처녀의 분바른 하얀 얼굴처럼 다듬어놓은 화강암에 새겨진 목월의 체취는,그의 청량한 시풍 그대로다.

「청록파」의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본명 영종.1916∼1978)의 「노래가 된 시」는 널리 알려진 가곡 「이별의 노래」. 나이 마흔의 문턱에서,처자를 거느린 족장의 몸으로,그를 사랑하는 어느 여대생을 그 또한 목메이게 사랑하다 이승의 번다한 족쇄를 뿌리치지 못하고 끝내 서러운 이별을 해야 했던 시인의 아픔이 깊게 배어든 시편이다.

목월의 사랑은 전쟁의 참화,그 뒤끝에서 시작된다.
1952년 봄,대구. 시작은 목월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와의 만남이었다. 환도한 서울에서 E여대 국문과 학생이었던 H양은 목월에게 뜨겁게 다가선다.
이형기씨가 집필한 박목월 평전은 「아니 다가왔다기보다도 슬픔과 안타까움이 어린 애절한 시선으로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목월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고 적는다. 1954년 초봄부터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서울의 밤거리를 그들은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친구를 불러내 H양을 설득했지만 그녀는 소리없는 울음만 삼키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라고 반문한다. 목월과 그녀는 끝내 여름이 가고 가을바람이 불어왔을 때 제주도로 떠나가 이승의 피안에 작은 초막을 지었다.

목월은 경북 경주시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 단석산 기슭 아래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집 앞으로는 낮게 엎드린 산맥들이 아늑하게 흘러가고 그 사이로는 들녘과 사과밭과 구릉들이 자리잡은 유순한 지세의 고장이었다. 모량리의 인텔리이자 유지였던 부모 슬하에서 2남2녀의 맏이로 자라난 목월은 인근 건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계성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마친다. 일찍이 계성학교 시절에는 서울의 아동잡지에 동요가 게재돼 급우들 사이에서 별명이 「시인」으로 통했다.

계성학교 졸업후 경주의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하고 유익순 여사와 결혼한 그는 「문장」지에 목월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투고하고 1939년 「연륜」이 정지용의 추천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비슷한 무렵에 같이 추천을 받은 박두진 조지훈 등과 더불어 한국현대시사에 획을 그은 「청록집」을 발간한 것은 1946년. 목월은 이 시기를 그의 산문 「나와 청록집 시절」에서 이렇게 밝힌다.
『「청록집」이 나오자 의외로 반향이 컸다. 좌익진영에서는 공격의 화살을 그것에 집중했다. 그런만큼 민족진영의 두둔도 지나칠 정도로 두터웠다.

「순수시를 지향하는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3인 시집」이라는 것이 조풍연씨가 붙여준 광고문의 캐치프레이즈이지만,우리 자신들도 그야말로 신예 시인으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목월의 자술처럼 해방공간에 나온 청록집은 이처럼 좌우익 문단의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 탄생,분단 이후 한국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우익」들에 의해 그 시사 가치가 대대적으로 선전된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어쨌든 목월의 시편들은 자연과 고향의 질박한 아름다움을 압축된 시행 속에서 드러내는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작고할 때까지 40여년 시인의 외길을 걸었던 목월의 작품세계는 크게 초기와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거니와 그 초기는 시집 「청녹집」「산도화」 시절로 구분된다.

이 시기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향토적 정서」가 핵심이었다. 조지훈이 한글학회사건으로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도피하면서 목월에 보낸 편지 중에 삽입한 「완화삼」이란 시편에 화답한 「나그네」는 이 시절 목월의 시세계를 상징한다.

『강나루 건너서 / 밑밭길을 // 구름에 달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 술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 뒤로 전쟁이 있었고 그 사랑이 있었다.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는 그 해 가을이 다 저물무렵 남편이 다른 여인과 사는 제주도 집을 방문한다. 그녀는 목월과 H양이 겨울을 지낼 한복 한벌씩과 생활비를 담은 봉투를 조용히 내밀고 돌아선다. 그녀 뒤에서 H양은 통곡을 한다. 결국 목월은 제주도생활 4개월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의 격정을 채 추스르지 못하고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집의 반대방향인 효자동 종점 부근에 하숙을 정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 아아 너도 가고 / 나도 가야지』(김성태 작곡,「이별의 노래」 전문)

드디어 마흔 고개를 넘기고 중기로 분류되는 「난.기타」와 「청담」시절에 목월은 범박한 생활로 돌아와 난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가족을 거느린 족장의 애틋한 사랑과 생활의 냄새가 묻어난다. 그는 「나는 우리 신규가 / 젤 예뻐. / 아암 문규도 예쁘지. / 밥 많이 먹는 애가 / 아버진 젤 예뻐.」라고 「밥상 앞에서」 노래한다. 곤궁한 시절을 끝내고 한양대 국문과 교수도 되었다. 후기시는 「경상도의 가랑잎」과 「무순」으로 대표되는 세계다.
고향사람들의 순박한 인정을 되살리는 향토회귀의 정서와 죽음에 대한 달관과 허무의식이 교차되는 세계다. 목월은 평생을 시를 붙들고 이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다. 교수로 시인협회 회장으로,후배들을 위한 시전문지 「심상」 창간의 주역으로,그리고 가장으로 줄기차게 달려갔다.

그러나,잊었을까. 울며 몸부림치던 애틋한 지상의 사랑 하나,가슴 속 무덤에 깊이 묻어둔 그 이승의 슬픔 하나를 그는 끝내 잊었을까. 30여년 이별의 세월이 흐른 뒤 목월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이승을 떠나기 얼마전 늙은 H양의 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한다. 그리고 그날 밤 이렇게 쓴다.

『이제 / 그를 방문했다. / 겨우 /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 겨우 / 그를 방문했다./ 이제 /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중략) / 그의 눈에는 /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 이 어렸다./ 나의 눈에는 /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 꿈이 오가는 통로에 / 가볍게 울리는 응답』

(「방문­백발이 되고,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 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중에서)

세계일보 199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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