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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유치환 시/김진균 곡]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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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과의 운명적 만남, 보편적「문학언어」로 승화/“줄기차고 섬세한 명상” … 고향땅 동백꽃 여전히 붉어「바람이 애터지게 불어쌓는」 충무항 오후 4시.

포구에 가지런히 어깨를 기대고 도열한 어선들은 그들 사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잇대어 놓은 스티로폴과 타이어 따위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심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고기 부스러기를 좇아 온 갈매기들이 끼루룩대는 울음과 어선들이 내는 신음소리가 뒤섞여 충무항 오후 4시 무렵은 쓸쓸하다.

그 쌀쌀한 바람 속에서 새벽에 출항해 막 돌아온 고깃배에서는 물메기,광어 등속을 배 밑창에서 떠올리는 사내들과 그 고기들이 행여 바닥으로 떨어질새라 조심스럽게 함지박에 받아내는 아낙들의 마지막 작업이 부산하다. 깃발은,청마 유치환(1908∼1967)의 그 「노스탈쟈의 손수건」은,포구 구석에 처박힌 선박들 에서 일제히 제멋대로 흔들린다.

광막한 이승의 대지에서 바위같이 단단한 생명의지와 그 극단에서 양립하는 허무의지로 한국 현대시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간 청마 유치환.
그의 사랑과 시는 두고두고 남은 사람들의 정서를 무시로 뒤흔들거니와,그의 시는 못다 이룬 애달픈 사랑으로 더욱 눈물겹고,그의 사랑은 대바람 소리 청청한 뜨거운 언어들의 조탁으로 더욱 애틋하다.

노래가 된 「그리움」(정회갑, 김진균 작곡)은 청마의 모든 시편 중에서도 그의 감정을 가장 직정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어서 그 애틋한 사랑의 사연을 아는 이들의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 지는 짧은 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은 1908년 지금은 통영시로 행정구역명이 바뀐 충무시 태평동 500에서 한의사 집안의 8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청마는 후일 극작가가 된 친형 동랑 유치진과 함께 도쿄 풍산중학에 입학해 4년간 공부하다가 가운이 기울자 귀국해 부산 동래고 5학년에 편입했다. 다음해에 그는 시문학에 뜻을 품고 연희전문대 문과에 합격했지만 1년만에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버렸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그의 소꿉친구 권재순과 결혼하고 일찍이 이름을 날렸던 정지용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시쓰기에 몰두한다. 그의 형 유치진과 더불어 「소제부」라는 회람을 발간하며서 문학활동을 개시했고 드디어 1931년 「문예월간」지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장한다. 교과서에까지 수록돼 중등교육만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의 시 「깃발」을 포함한 53편의 시를 수록해 3 9년 처음으로 「청마시초」를 펴낸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전문)

세상 잡사의 질긴 인연과 사랑의 여신에게 밉보이지 않았던 순수한 시절에 그는 이 「깃발」을 썼다. 그러나 그 애증의 씨앗은 이미「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으로 공중의 깃발 속에 펄럭이고 있었으니,시인이기를 떠난 범부의 애틋한 감성의 준동을 누가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청마는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달한 1940년 형 유치진이 먼저가서 개간해놓은 만주의 텃밭으로 가족으로 이끌고 이주한다. 해방직전인 45년 6월 통영으로 돌아온 청마는 통영여중에서 교편을 잡고 아내 권재순은 일본인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유치원을 경영한다.

통영여중시절,청마는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중이던,21살에남편을 여의고 외딸과 살고 있던 시조시인 이영도 여사를 운명적으로만난다. 이때부터 청마는 죽기까지 20여년 동안 절절한 연서 5천여통을 그녀에게 보낸다. 집에서 가까운 우체국에 가서 그녀에게 매일 일기 쓰듯 편지를 보냈고,그녀에게서 오는 편지는 사서함을 개설해서 그 우체국에서 개봉했다.

살가운 아내와 귀여운 세 딸을 두었던 유부남 유치환. 윤리의식과 사회적인 체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의 애틋한 감정은 청마 사후 그가 보낸 편지 중에서 2백여통을 골라 책으로 묶어낸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에 절절히 담겨 있다. 이러한 그의 아픈 사연을 염두에 두면 그의 시편들 중에는 새롭게 다가서는 구절들이 많다.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중략)
그리고 너는 나의,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오라 어서 오라 나의 기다림도 정녕 한이 있겠거니
그때사 네가 온들,
빈 창밖엔 멧비둘기만 구구구 울고 뜰에는 나의 뱉고 간 피의 낙화!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청마 유치환을 이처럼 사소할 수도 있는 애정의 편린으로만 재단하는 것은 분명 무모한 편견이다. 그의 시는 『줄기 차고 섬세한 명상,거대하면서도 면밀한 시세계,그리고 명확하고 힘찬 진술과 어조로써 높은 수준과 풍격을 유지했으며』 또한 『그의 시는 인간적이요 윤리적이며 현대적 기법 내지는 현대성이라는 척도로 재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줄기찬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유념해야 한다.

실제로 청마가 이여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들 또한 문학 전반에 걸친 그의 생각들을 포함해 일종의 정서적 고백록처럼 기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어찌 그처럼 문학적이고 플라토닉할 수만 있는가. 그 이면의 고통들에 대해 무심할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이들은 기실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청마의 시비는 충무항 왼쪽 모서리에 작은 동산처럼 솟아 있는 남망산 공원 산책로에 서 있다. 산책로 주변 동백나무에는 막 벙글 준비를 마친 핏빛 꽃망울들이 짙은 녹색의 이파리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충무항 뱃길이 환히 내다보이는 남망산 산동네 어느 허름한 집 마당에 우뚝 서 있는 동백나무는 탐스런 연분홍 동백꽃을 이미 온몸에 달았다가 하나 둘 피를 토하듯 송이째 마당에 떨어뜨린다.
부산남여상 교장시절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혼자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이승을 떠난 청마. 그가 간 지 한달 후 이영도여사는 친구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청마의 애정에 질질 끌리는 먼먼 세월 속에 제가 얼마나 청마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가 가버린 오늘에야 깨달을 수 있구먼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흐뭇하게 애정할 수 있었을 텐데…. 오직 남은 세월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가 제게 남은 형벌 같습니다"

그러나,청마는 죽기 전 그녀를 이렇게 위로했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앞에 와서/너에게 편지를 쓴다/(중략)/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희망도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이여,그러면 안녕!/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 복하였네라』

세계일보 1997. 1
1 Comments
이수현 2007.10.24 02:05  
아- 유치환님의 시는 정말 몇십년이 흘러도 감동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