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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서 탄생한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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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서 탄생한 ‘기다리는 마음’ ① 
‘기다리는 마음’은 연평도 엘레지였다 
 
2010년 12월 29일 (수) 14:19:01 충북인뉴스  cbi@cbinews.co.kr" rel="nofollow">cbi@cb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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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가곡 <기다리는 마음>은 모든 기다리는 이들의 노래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님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서럽고 애달픈 사연이 그 속에 있다. 그것은 연인끼리의 기다림일 수도 있고, 지어미와 자아비의 기다림일 수도 있으며, 부모와 자식간의 기다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땅엔, 남북 분단의 상황 속에서 북녘에 두고 온 가족들과의 상봉을 60년이 넘게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안타깝게 하나둘씩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래서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서글픈 것이다.


기다리는 마음
김민부 작사, 장일남 작곡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않고
파도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 
   
필자는 이 노래가 <비목>의 작사자인 한명희 선생이 과거 1960년대 말 TBC(동양방송)에서 프로듀서(PD)로 일할 때 그가 진행하던 가곡프로그램에 처음 소개한 작품이라는 것을 2010년 11월 덕소의 이미시 문화서원에서 한 선생과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뒤 이 노래가 방송에 소개된 내력을 ‘<비목>, 그 전쟁의 흔적(1)’에서 잠시 언급했다. 또한 한 선생이 이 노래 가사는 한시(漢詩)에서 유래한 것이며, 작가였던 김민부(1941~1972) 본인이 한 선생에게 직접 밝힌 말이란 것도 기록해 놓았다. 한 선생은 필자에게 당시 원작 한시를 캐묻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한문 원시를 추적해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관련 자료들을 여기저기 찾아 보았다.
작사자인 김민부 시인은 이미 1972년에 화재로 사망했고, 그 자신은 이 가사와 관련해 어떤 기록도 남긴 것이 없는 것 같다.

31살에 세상을 떠난 김민부는 생전에 두 권의 시집을 남겼다. 하나는 고등학교 2학년(15세)때인 1956년에 낸 <항아리>요, 두 번째 시집은 서울에서 한창 방송작가로 일할 때인 1968년에 낸 <나부(裸婦)와 새>이다. 이 두 권의 시집에는 <기다리는 마음>이 없다.

김민부의 <기다리는 마음>은 그가 세상 떠난지 23년 후인 1995년 그의 초등학교 때의 친구 조용우 전 국민일보 회장이 친구, 지인 등과 함께 펴낸 김민부 추모시집<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추모시집의 여러 글들 속에도 이 시를 칭송하는 내용 외에 눈길을 끌만한 별다른 이야기는 없다. 시의 ‘원전’이라든가 하는 그런 말 비슷한 것은 아예 없다. 그런데 <기다리는 마음>과 관련해 작곡자인 장일남 선생이 <월간조선> 1987년 11월호에 남긴 글이 있었다. 결국 여기에 적힌 것이 아직까지는 유일한 답인 듯하다.

▲ 시비에서 바라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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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서 만난 문학청년
이 글은 장 씨가 직접 쓴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장씨는 6.25전쟁이 나던 해인 1950년 말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어머니가 빼준 금가락지 하나를 품에 넣고 극적으로 탈출해 연평도에서 약 1년 가까이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이 때 섬의 한 문학청년과 만나게 돼 금세 친해졌다. 어느 날 이 청년이 옛 우리말로 된 헌 책을 하나 들고 왔다. 그 중 어느 시가(詩歌)를 청년과 함께 한자 한자 풀어 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풀어가다 보니 이 시가의 내용이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와 너무 똑 같아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 씨에 따르면, 원본 가사는 제주도 방언으로 돼 있어 정확한 낱말 풀이는 어려웠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예로부터 제주도 사람은 뭍으로 가 사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느 사내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렵사리 뭍으로 가게 된다. 그곳이 지금의 목포(木浦)였다. 그러나 귀향의 기약이 없는 타관살이는 누구에게나 고달프다. 여기에 애인이 있다면 더할 것이다.

사내도 ‘언젠가는 귀향한다’는 기다림 속에 유달산 뒤의 월출봉에 올라 제주도가 있을 성 싶은 바다를 보며 여인을 생각했다.

사내의 여인도 님이 올 것이라는 기다림 속에서 제주의 일출봉에 올라, 간 곳 모르는 사내를 연모하다 끝내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 다분히 멜로 드라마적이었지만 당시엔 그 슬픔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나를 찍어 눌렀다.

연평도에서 가장 높은 야산에 올라 10여분 만에 가사에 곡을 붙였다. <기다리는 마음>의 원형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7~8년 후인 1968~9년 무렵, 한번은 문화방송 측에서 장 씨에게 좋은 가곡이 있으면 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연평도 시절 <기다리는 마음>의 원전에다 붙여둔 곡을 가지고 갔다. 이 원전을 당시 문화방송 스크립터였던 김민부가 보고는 그 가사에 홀딱 빠졌다. 즉석에서 지금의 가사로 만들어 냈다.

   
▲ 기다리는 마음 시비 (부산 서구 암남공원) //##
<기다리는 마음>의 원전은 제주도 방언
장일남은 이렇게 말했다.
“김민부. 그는 <기다리는 마음>의 원전을 표준말로 번역한 시인이다.”
장일남의 회고는 이어진다.

“내가 보기엔 그는 천재였다. 방송원고를 쓸 때도 시작(詩作)을 할 때도 그의 필(筆)은 거침이 없었다. 곧잘 나에게, 그는 한잔 소주에 취해 신세타령을 했다. ‘제기랄, 이따위 잡문을 써야만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가’라며 이따금씩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장일남은 이후 추모시집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에 ‘어느 천재 작사가의 때이른 죽음’이란 추모의 글을 한 편 남긴다.

다음은 그 글의 요지이다.
[돌아가신 노산 이은상 씨는 자기에게 작사를 부탁하는 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민부처럼 훌륭한 시인을 두고 왜 나에게 작사를 부탁하느냐 그에게 가거라.” 이렇게 해서 많은 작사를 그에게 부탁했었고, 또 그는 본인에게 작곡을 부탁했었다.

나의 주변에는 훌륭한 극작가나 시인이 많다. 많은 시인에게서 아름다운 시를 받아 많은 가곡을 작곡했지만, 김민부가 작사한 시에 작곡을 한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원효> 오페라 대본은 아직도 나의 가슴에 남는 그의 작품이다.

우리는 훌륭한 천재를 잃은 것이다. 그의 시집 <나부와 새>를 보면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문학적 장르는 너무나도 고고하고 높은 곳에 임해 있었다. 그런 그가 자기 뜻에 맞는 글을 써서는 생활이 어려우므로 잡문을 주문받고 살아가야 하는 삶이 싫어서 세상을 하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그의 명복을 비는 바이며, 그의 자손들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바란다.

한명희 선생은 그의 글에서 김민부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김민부는 서정적 문체의 인기 방송작가였다. 부산 출신의 그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감성적 문인이었다. 그래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는 자신의 역할에 늘 불만이었다. 스스로 ‘문학의 오발탄’이라며 생계를 위한 작가 생활을 마뜩찮아 했다. 그의 행색 또한 적이 저항적이었다. 생생한 인상으로는 머리며 옷차림이 늘 파격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TBC 건물(중앙일보를 포함한 중앙매스컴 센터)은 서소문 일대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현대식 빌딩이었다. 1천여명의 직원들은 누구나가 넥타이에 단정한 정장이었다. 검은 피부의 볼륨감 있는 몸집에 검정물 들인 작업복 차림으로 머리는 빗질없는 산발에 가까웠다. 과묵하던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기인행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그가 고뇌하던 내면의 갈등과 저항의식이 그대로 외모로 환치됐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아무튼 김민부는 <기다리는 마음> 가사로 국민들의 정서의 텃밭을 비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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