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미 교수가 본 한국 음악의 역사와 쟁점
② 한국창작음악의 역사와 갈등
한국창작음악의 20세기 횡단기
김춘미 /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소장, spring@knua.ac.kr" rel="nofollow">spring@knua.ac.kr
고대로부터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음악이 있었다. 음악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 음악을 만든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10세기 이전까지 전 세계에 작곡가/연주가/청중의 확연한 분리는 없었으며, 음악은 늘 인류의 삶과 사회에 필요한 역할과 기능이 주어져 있는 상태였다. 음악이 그 자체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아 홀로 서기를 하는 것은 A.D. 10세기 이후에나 드문드문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악보에 밝히면서, 어떤 음악을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천명하는 기록은 언제부터 등장하는가? 근동에는 5, 6세기에 음악가 이름이 크게 부각되고, 서양의 경우는 9, 10세기 다성음악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등장한다. 한국의 경우는 삼국시대 백결 선생의 「방아타령」 같은 곡이 있고 왕산악과 우륵 같은 음악가도 등장하지만, 좀더 근대적 개념의 악곡 만듦은 16세기 중엽 정도에 활발해진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상식으로 통하는 작곡가(composer)와 창작품(composition)의 개념은 역시 개화기 이후 태동한 것이다. 즉 음악을 만드는 작곡자가 있고, 연주자가 그것을 전달하며, 연주된 음악을 수용하는 청중의 구도를 전제로 하는 서양식의 작곡과 작품 개념은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이다.
1892년에 나온 우리 나라 최초의 찬송가 집은 존스(George H. Jones)와 로드와일러(Louisa C. Rothweiler)가 공동 편찬한 『찬미가』였는데, 27곡의 번역 찬송을 ‘가사판’으로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개화기 초기에는 가사만 있으면 우리 곡조에 그냥 가사를 얹어 불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후 1908년까지 찬송가를 담은 책이 9권이 더 나오지만 이 부문에서 창작곡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한국 선율에 가사를 얹은 「놉흔 일흠을 찬숑함」이라는 곡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새롭게 작곡된 것인지 차용된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찬송가에서는 창작곡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한편 1896년경부터 다른 한쪽에서는 ‘서양노래’ 혹은 서양식의 악곡에다 계몽사상, 반일감정, 애국사상 등 당시의 시대상을 담은 ‘창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애국창가들 중에 이미 있는 곡조를 차용한 것이 아닌 창작곡의 면모를 갖춘 작품이 1905년 김인식의 「학도가」였다. 그리고 이 무렵 서양식 창작 내지 작곡의 개념과 방법을 가르친 에케르트가 만든 「대한제국 애국가」도 초기 창작곡의 대열에 들어간다. 에케르트는 한국에 양악대를 만들기 위해 1901년 2월에 내한했고, 50여명의 악단원에게 음악교육을 시켰다. 이로써 한국의 창작음악은 김인식, 이상준, 홍난파, 정사인, 백우용 등의 등장을 계기로 드디어 작곡가와 창작품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김인식, 이상준, 홍난파는 선교사에게서, 그리고 양악대 출신인 정사인과 백우용은 에케르트에서 작곡을 배움으로 이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서양식의 작곡이 시작되었다.
창작창가는 창작동요로, 창작동요는 창작가곡으로 이어가며 우리는 일제시대를 건너 왔다. 가곡은 창가와 달리 이념이 약화되고 시가 강화된 예술가곡의 성격을 지녔다. 그런가 하면 기악 창작곡은 1924년 홍난파의 「애수의 조선」을 필두로 정사인의 행진곡들, 김재훈의 바이올린 곡들, 그리고 김동진, 김세형, 박민종, 안익태, 박경호, 채동선, 임동혁 등의 독주곡에서 관현악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일제시대의 창작곡들에서는 선교사들의 영향과 일본을 통해 2차적으로 유입된 각종 장르의 서양 음악어법, 그리고 유학을 통해 직접 서양을 체험한 작곡가들의 당대적 음악시도들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국 창작계 최대의 갈등은 일제에 의해 ‘금지곡’ 판정을 받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한국의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작품들은 설 땅이 없었던 것이다.
1944년 김순남은 ‘제 1회 김순남 작곡발표회’를 열어서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해방 후 그는 한국음악의 구조를 바탕으로 현대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이면의 곡들을 쓰면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건우와 김순남은 한국적인 어법에 시대상을 반영하는 음악을 쓰고자 했지만 결국 그들은 월북작곡가의 대열에 서게 되었고, 현제명, 김성태, 김동진, 나운영, 김순애, 김달성, 박중후, 정윤주, 이상근, 조념 등은 순수음악을 지향하는 가곡과 기악곡들을 낳았다. 해방-정부수립-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용구, 김관, 박경호 같은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새로운 음악을 건설하기 위한 외형적 일체감을 바탕으로 일제 청산과 민족음악 수립이라는 공동목표를 실천하는데 서로 다른 실천강령의 대립이 심한 갈등을 낳은 시대’ 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종료 후, 남한에는 1950년대 ‘현대’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한다. 나운영은 1952년 한국현대음악회를 만들고 작품을 발표한다. 12음 기법의 모방도 이때 등장하며, 1955년과 1957년에는 한국작곡가들의 현대음악이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그러면서 1960년대에는 작곡가들의 일대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 이른바 모던하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시대의 먼동이 튼 것이다. 정회갑과 윤이상이 등장하고, 1969년에는 ‘우리 음악은 우리 손으로’라는 구호 하에 서울음악제가 만들어져 젊은 세대 작곡가들의 창작곡을 위촉하고 응모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모색했다. 이렇게 현대음악의 토대를 마련한 한국 창작계는 1970년대 독일 유학파들의 귀국을 계기로 현대음악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윤이상은 베를린을 근거로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박준상, 강석희, 김정길, 최인찬, 박영희 등이 국제 작곡 콩쿨에서 이름을 냈고 백병동, 나인용, 박재열 등도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광주항쟁 이후, 한국음악의 정체성 논쟁이 일면서 이건용이 이끄는 ‘제 3세대’는 서구의 모더니즘에 반기를 든다. 우리나라가 제3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우리의 자생적인 음악 만듦을 지향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극심했던 시기이다.
현재 한국의 창작음악계는 기술이 뛰어난 현대음악과 자생적인 한국음악이라는 두 축 사이에 훨씬 개별화된 가치관들을 바탕으로 1000여 명의 작곡가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90년대의 작품들은 아직 깊게 분석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며, 훨씬 더 정교한 학자의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