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한 먼 그 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파아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 날 오라 부르네
행복이 깃든 그곳에 그리움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가라
그대를 만날 때 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가없는 하늘 위에
별빛도 흘러가라 황홀한 날이 와서
찬란한 보금자리 날 오라 부르네
쌓인 정 이룰 그 곳에 별빛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가라
그대를 만날 때 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박순복씨가 부르는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이 정말 듣기 좋다. 만일 그 성악가가 목소리와 같다면 젊고 미인이고 아주 매력적인 사람일 것 같아 한번 만나보고 싶다. 이름은 약간 시골 여인처럼 툭박스럽고 우습지만,
종종 이렇게 좋은 목소리와 감성이 풍부한 성량을 가진 성악가들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진다. 이런 멋진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 믿는 사람일 수 있을까 등등, 좀 알아보면 대개 이미 중년을 넘어선 아줌마나 할머니에 가까운 사람들인 것 같았다. 안 만나는 것이 오히려 멋진 이미지를 유지할 것 같았다. 그들의 목소리처럼 그들이 청춘을 유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생의 아름다움은 청춘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헤르만 헤세가 도대체 이런 이유에서 ‘청춘은 아름다워라’ 라고 한 것일까? 왜 사람이 늙어서 쭈글쭈글하여 지고 힘이 없어 지고 찌그러지는가? 세상에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있을까? 돈이 많아도 명예가 있어도 도무지 막을 수 없는 늙어가는 인생 행로…………
이런 생노병사의 의문은 꼭 유명한 철학자나 석가 같은 사람들만 생각하고 고민하여야 할 문제인가?
어떤 대 부호가 늙어서 죽기 싫어서 괴로워 하며, 동네의 거지 소년을 보면서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내가 너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 모든 재산과 명예를 너를 다 줄 테니, 네 젊음을 10년, 아니 다만 3년만이라도 내게 줄 수 없을까? ’
또 어떤 독일의 양노원에서 노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며 느끼는 점이다. 과거의 부, 명예, 즐거움 등이 현재 그들에게 한 푼어치의 가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서구의 문명사회의 그늘에서, 몸은 아프고 외로운데, 찾아오는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없이, 그냥 병의 괴로움과 죽음의 그림자의 막연한 공포 속에서 살며, 과거의 즐거움, 부귀영화를 다 가져가더라도 지금 몸만 좀더 아프지 않고, 진정으로 위로해줄 이웃이 다만 한 시간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영원한 젊음, 이것이 정말 불가능한 꿈일 것인가? 그렇다면 인생처럼 비극은 없다.
예전 고등학교 국어책의 피천득씨의 이야기가 새롭다. “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 이고 삶 자체가 괴로움 뿐이다. 한두 마디로 요약한다면,
[전도서 1장 2,3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정말 영원한 세계가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저 멀리에 있는 것일까? 늙지 않는 헛되지 않은
영원한 사랑, 단지 노래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텐데...
forest님, 또 이 곡을 듣는 다른 분들께 성경 이야기를 한 것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상당히 줄였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안들어하시는 분들이 더 있으면 더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맘에 있는대로 쓴 것이지만...
사실 인터넷 세상에는 언론의 자유가 좀 있는 편이니까, 맘에 안들더라도 좀 보아
주는 것도 미덕이지요
denklot 님 미인이라는 둥 만나보고 싶다는 둥 이런 글은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해석에 따라서는 성희롱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 감상과 걸맞지 않은 뜬금 없는 글은 읽는 이에 따라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황당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