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을 부른다는것
가곡을 부른다는 것...
우리 가곡을 배우고 부르고 가끔은 발표회를 통하여 모두들 각박하거나 힘들다고 푸념하는 오늘에, 나름 자신을 위로하거나 재능을 통하여 조그만 온기라도 이 사회에 불어주려는 한국가곡합창단 생활이 그럭저럭 반년을 넘었다. 영 내키지 않던 발걸음도 이제 관성이 되어 몸이 기억하는 정도다.
가곡의 가사는 대 부분 많이 알려진 시나 창작 시에 작곡이란 행위를 더하여 탄생하는거라 대충 짐작을 한다.(누구한테 물어 보거나 검색을 하지 않아서 잘은 모른다) 근데 그 가사의 대부분이 부모님, 특히 어머니나 옛날 연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고향에 대한 애절한 향수, 유년의 기억, 자연에 대한 찬미, 동무 생각 등이 아닌가 여겨진다. 가끔은 조국이나 영웅이야기도 들은 듯 한데 기억은 없다.
남다른 어머니도 계셨었고, 산천 경계 좋고 바람 시원한 고향도 있었었고, 탯줄묻은 생가도 그데 로고, 옛날 애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던 부르는 노래마다 “이건 남의 노래가 아니라 내 노래” 같게 마음 저리게 다가온 세월이 그 동안 이다.
어줍 잖은 느낌으로 가곡의 시간성을 보면 아주 긴 시간을 찰나의 순간처럼 표현 하거나 찰나의 순간을 장편 소설처럼 느껴지는 구성이 개인적으론 호감의 선봉이다.
지나온 학창시절을 보면 전부가 아름답지는 않다,
수학과 교련 시간의 흑 역사와 말죽거리 잔혹사는 정도의 차이 이지 그 시절의 문화였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폭력이나 흡연 등으로 걸리면 정학기간 내내 철창이 있는 창고에 갇혀 빠삐용회색빛 체육복을 입고 학교 하수구 청소나 테니스장 바닥 고르기를 공부대신 하는 풍경이 지금도 선 하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교장 선생님은 탄핵을 적어도 100번을 하고도 남는 시절이었다.
그 시절, 돌이켜 보면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생각되는 음악시간이 지금 생각 해 보면 정말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원래 음악선생님들의 성질 머리도 고약하긴 한술 더 뜨지만, 적어도 때리지는 않았었다. 음악이 예비고사 과목도 아니고, 노래 못 부른다고 인생 그리 망가지지 않아서였겠지만, 알고 보면 인생에 그리 덕 되는 과목이 몇이나 되겠나? 좀 못 해도 내 버려둬도 다 지 몫만큼 하던데.......
그 시절 음악 선생님은 “얼굴”의 작곡가 신 귀복 선생님 이셨고 1학년 첫 수업은 무조건 이 노래 였다.
그땐 가곡 인지도 몰랐고 가곡같지도 않았는데성악가들이 자주 부르는걸 보니 가곡이란 생각이 이제 사 드는 정도이다.
그 시절 뺀드부를 육성 하셨는그친구들이야 맨날 학도 호국단가를 나발로 불고 북 뚜드리던가 뺀드부가 담배 피는 소굴이었으니 뚜드려 맞는 정 도 있어 선생님과 친했겠지만 우리 같은 범생이야 일주일에 한번 장난기석어 떠나가는 배니 때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고 나서 잊혀진 선생님이고 시간이다.
다시 찿아 뵐 건수도 인연도 없이 한 37년 살아온 샘이다. 그래도 내가 아는 고딩때 까지 가장 유명한 은사이시니 가끔은 자랑도 꽤나 했었던 남부러운 과거를 주셨음이 지금 생각하니 고마우신 분이다.
그동안의 배운 가곡의 으뜸은 황덕식선생님의 “황홀한 기다림” “애모”로 느껴진다. 곡의 노랫말이나 그 구성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거니와 그 애잔함은 흥얼거릴 때 마다 다르게 겹쳐온다. 근데 도무지 이런 곡을 만든 이는 어떻게 생기혔을까 하는 호기심도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알고 보니 천 상병 시인의 귀천도 이 분의 작품이다.
유명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의 고약함이나 천박함이나 고매한 인품의 정도를 떠나 흥미있는 시간임은 분명 하다. 전두환대통령을같은결혼식장에서 본 기억이나 김 종필 총리를 골프장에서 만나 농담을 나는건 여지 것 기억에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게 그 증거이기도 하다. 그 만남의 의미나 영양가가 흑싸리 껍데기만큼도 없음에도....
연말 가요대상이나, 연예대상은 내용 없이 지들만의 자화자찬과 온갖 잡질의 총체적 산물인줄 알지만 그래도 막판 한5분은 본 뒤 채널을 돌리는 정도 인데 “한국 음악 대상”이란 게 있을 줄은 알았지만 정말 있는 줄은 몰랐다. 올해는 신 귀복 은사님과 좋은 가곡의 주인공이신 황 덕식 선생께서 그 동안의 음악에 대한 기여를 기리는 “특별상”을 받으신다는 소식이 왔다.
합창단에서 존재감이 하나도 없어 그 노무 자랑 질이 화근이 되어 누군가 신 귀복 선생의 제자라 수상식에 참석해야 되는 것 아니냐? 함깨하면 좋을거 라는 거다.
부담 만근이다.
인연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인연이고, 그저 그 시절 그 공간에 있었을 뿐이라 해 봐야 다른 이는 그마져도 없음이 자명하여 장만해준 꽃다발을 가지고 찿았다. 이건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만도 못한 것이지만 그 내용을 그 분인들 아시랴.......
소박한 그마져 척박하게 소박한 수상식에서 그 두 분을 뵈었다. 그 인연이 더 해갈 자신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37년을 거슬러 별 인연 없었던 은사님을 뵙고, 내가 즐겨듣고 언젠가 한번 정도는 근사해 지려는 기대를 가지고 울대에 힘주어 부르곤 하는 노래를 만들어준 분을 만났다. 시간이 적절하면 저녁이라도 대접했으면 했으련만, 시작도 끝도 매우 민망한 행사가 되다 보니 겸연쩍은 인사를 뒤로하고 행사장을 나왔다. 꽃 좋은 봄날에 다시 뵈면 좋은 시간 선물 드리겠다는 다짐정도를 하면서......
누구하나 가슴속으로 눈물 흘려 부르는 가곡한곳 없으랴? 빛나던 청춘 그 시절 음악실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함께 부른 노래 한곡 없으랴.......
그 빛나던 시절을 지금에 사 다시 꺼내 불러본다.
일찌기 너 더부러 푸르렀던 나의산하.
애석한 날과 달이. 낙엽지던 영 마루에.
불러도 대답 없어라 흘러만 간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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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가곡합창단 홍보위원장이신 신상린님께서 저와 함께 한국음악상시상식에 참석한후 본인의 카카오스토리애 글을 올리셔서 승낙을 받고 퍼 옮긴 글입니다
우리 가곡을 배우고 부르고 가끔은 발표회를 통하여 모두들 각박하거나 힘들다고 푸념하는 오늘에, 나름 자신을 위로하거나 재능을 통하여 조그만 온기라도 이 사회에 불어주려는 한국가곡합창단 생활이 그럭저럭 반년을 넘었다. 영 내키지 않던 발걸음도 이제 관성이 되어 몸이 기억하는 정도다.
가곡의 가사는 대 부분 많이 알려진 시나 창작 시에 작곡이란 행위를 더하여 탄생하는거라 대충 짐작을 한다.(누구한테 물어 보거나 검색을 하지 않아서 잘은 모른다) 근데 그 가사의 대부분이 부모님, 특히 어머니나 옛날 연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고향에 대한 애절한 향수, 유년의 기억, 자연에 대한 찬미, 동무 생각 등이 아닌가 여겨진다. 가끔은 조국이나 영웅이야기도 들은 듯 한데 기억은 없다.
남다른 어머니도 계셨었고, 산천 경계 좋고 바람 시원한 고향도 있었었고, 탯줄묻은 생가도 그데 로고, 옛날 애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던 부르는 노래마다 “이건 남의 노래가 아니라 내 노래” 같게 마음 저리게 다가온 세월이 그 동안 이다.
어줍 잖은 느낌으로 가곡의 시간성을 보면 아주 긴 시간을 찰나의 순간처럼 표현 하거나 찰나의 순간을 장편 소설처럼 느껴지는 구성이 개인적으론 호감의 선봉이다.
지나온 학창시절을 보면 전부가 아름답지는 않다,
수학과 교련 시간의 흑 역사와 말죽거리 잔혹사는 정도의 차이 이지 그 시절의 문화였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폭력이나 흡연 등으로 걸리면 정학기간 내내 철창이 있는 창고에 갇혀 빠삐용회색빛 체육복을 입고 학교 하수구 청소나 테니스장 바닥 고르기를 공부대신 하는 풍경이 지금도 선 하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교장 선생님은 탄핵을 적어도 100번을 하고도 남는 시절이었다.
그 시절, 돌이켜 보면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생각되는 음악시간이 지금 생각 해 보면 정말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원래 음악선생님들의 성질 머리도 고약하긴 한술 더 뜨지만, 적어도 때리지는 않았었다. 음악이 예비고사 과목도 아니고, 노래 못 부른다고 인생 그리 망가지지 않아서였겠지만, 알고 보면 인생에 그리 덕 되는 과목이 몇이나 되겠나? 좀 못 해도 내 버려둬도 다 지 몫만큼 하던데.......
그 시절 음악 선생님은 “얼굴”의 작곡가 신 귀복 선생님 이셨고 1학년 첫 수업은 무조건 이 노래 였다.
그땐 가곡 인지도 몰랐고 가곡같지도 않았는데성악가들이 자주 부르는걸 보니 가곡이란 생각이 이제 사 드는 정도이다.
그 시절 뺀드부를 육성 하셨는그친구들이야 맨날 학도 호국단가를 나발로 불고 북 뚜드리던가 뺀드부가 담배 피는 소굴이었으니 뚜드려 맞는 정 도 있어 선생님과 친했겠지만 우리 같은 범생이야 일주일에 한번 장난기석어 떠나가는 배니 때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고 나서 잊혀진 선생님이고 시간이다.
다시 찿아 뵐 건수도 인연도 없이 한 37년 살아온 샘이다. 그래도 내가 아는 고딩때 까지 가장 유명한 은사이시니 가끔은 자랑도 꽤나 했었던 남부러운 과거를 주셨음이 지금 생각하니 고마우신 분이다.
그동안의 배운 가곡의 으뜸은 황덕식선생님의 “황홀한 기다림” “애모”로 느껴진다. 곡의 노랫말이나 그 구성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거니와 그 애잔함은 흥얼거릴 때 마다 다르게 겹쳐온다. 근데 도무지 이런 곡을 만든 이는 어떻게 생기혔을까 하는 호기심도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알고 보니 천 상병 시인의 귀천도 이 분의 작품이다.
유명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의 고약함이나 천박함이나 고매한 인품의 정도를 떠나 흥미있는 시간임은 분명 하다. 전두환대통령을같은결혼식장에서 본 기억이나 김 종필 총리를 골프장에서 만나 농담을 나는건 여지 것 기억에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게 그 증거이기도 하다. 그 만남의 의미나 영양가가 흑싸리 껍데기만큼도 없음에도....
연말 가요대상이나, 연예대상은 내용 없이 지들만의 자화자찬과 온갖 잡질의 총체적 산물인줄 알지만 그래도 막판 한5분은 본 뒤 채널을 돌리는 정도 인데 “한국 음악 대상”이란 게 있을 줄은 알았지만 정말 있는 줄은 몰랐다. 올해는 신 귀복 은사님과 좋은 가곡의 주인공이신 황 덕식 선생께서 그 동안의 음악에 대한 기여를 기리는 “특별상”을 받으신다는 소식이 왔다.
합창단에서 존재감이 하나도 없어 그 노무 자랑 질이 화근이 되어 누군가 신 귀복 선생의 제자라 수상식에 참석해야 되는 것 아니냐? 함깨하면 좋을거 라는 거다.
부담 만근이다.
인연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인연이고, 그저 그 시절 그 공간에 있었을 뿐이라 해 봐야 다른 이는 그마져도 없음이 자명하여 장만해준 꽃다발을 가지고 찿았다. 이건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만도 못한 것이지만 그 내용을 그 분인들 아시랴.......
소박한 그마져 척박하게 소박한 수상식에서 그 두 분을 뵈었다. 그 인연이 더 해갈 자신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37년을 거슬러 별 인연 없었던 은사님을 뵙고, 내가 즐겨듣고 언젠가 한번 정도는 근사해 지려는 기대를 가지고 울대에 힘주어 부르곤 하는 노래를 만들어준 분을 만났다. 시간이 적절하면 저녁이라도 대접했으면 했으련만, 시작도 끝도 매우 민망한 행사가 되다 보니 겸연쩍은 인사를 뒤로하고 행사장을 나왔다. 꽃 좋은 봄날에 다시 뵈면 좋은 시간 선물 드리겠다는 다짐정도를 하면서......
누구하나 가슴속으로 눈물 흘려 부르는 가곡한곳 없으랴? 빛나던 청춘 그 시절 음악실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함께 부른 노래 한곡 없으랴.......
그 빛나던 시절을 지금에 사 다시 꺼내 불러본다.
일찌기 너 더부러 푸르렀던 나의산하.
애석한 날과 달이. 낙엽지던 영 마루에.
불러도 대답 없어라 흘러만 간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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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가곡합창단 홍보위원장이신 신상린님께서 저와 함께 한국음악상시상식에 참석한후 본인의 카카오스토리애 글을 올리셔서 승낙을 받고 퍼 옮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