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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의 작곡가 김성태 선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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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의 작곡가 요석(樂石) 김성태 박사(102·서울대 음대 명예교수)가 21일 오전 1시51분 별세했다. '즐거운 우리집' '산유화' '동심초' 등 가곡으로 유명한 요석은 우리나라에서 서양음악이 싹트기 시작한 1940년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계를 선도했다. 한국 음악변천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요석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교회의 서양음악을 접했다. 일본 도쿄고등음악원을 졸업한 대표적인 1세대 작곡가이자 교육자로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세계를 확립해 창작음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70여년 간 음악인으로 살아왔고 왕성한 창작과 다양한 음악활동으로 한국가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송이 흰 백합화' '꿈' '이별의 노래' '추억' '사친' '진달래' 등 가곡들을 작곡했으며  '새야새야 파랑새야'(동요집·1934) '조선민요곡집'(1946) '한국민요곡집'(1954) '화성법'(1971) '김성태 가곡집'(1991) 등도 출간했다.

고인은 앞서 작고한 홍난파나 현제명 등과 함께 국내에 서양음악을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다. 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예술원 회원 등 그의 이력도 그만큼 화려했다.

가곡과 국민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데 대한 원인으로 현대인의 바빠진 삶, 대중음악과 다양한 취미활동 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것만 좋다거나 키워야 한다는 식의 고집이나 이기심은 없었다.

"(가곡) 방송도 많이 하고 그럼 좋겠지만 모든 사람이 순수음악을 하는게 아니라 많은 사람은 대중음악을 좋아합니다". 남의 영역도 인정해주는 원숙함이 배어있다.

산유화는 자신이 작곡한 가곡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는다. 1991년에 발간한 그의 가곡집을 낼 때도 산유화를 맨앞에 넣었다.

한때 경성후생실내악단의 활동으로 친일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그는 후생실내악단이 바이올리니스트 김생려와 트롬본 이유성이 주도해 스트링 쿼텟(현악4중주)을 만든 것이라며 자신은 편곡 부탁을 받아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홍난파의 '봉선화' 등을 편곡해줬다고 설명했다.

그의 '경신중등부' 시절, 광주학생운동 때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일본 관헌에게 붙들려 고생하다 결국 퇴학을 당했다. 그는 당시 축구, 야구, 농구 선수까지 할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축구선수를 했던 덕분에 퇴학후 일본으로 전학가서 체육특기생으로 음악공부를 계속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는 고 현제명 선생과 함께 서울대 음대(경성음악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현제명 박사가 학장을 했고 김성태는 교무과장을 맡았다.

한 평생 음악과 함께 산 노음악가의 삶의 철학은 “정직”이었다.

김기순 이화여대 음대 명예교수, 김기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 등 2남4녀를 남겼다. 서울아산병원 30호, 발인 25일 오전 8시, 장지 천안공원묘지. 02-3010-2230


연합뉴스 / 내마음의노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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