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친일과 반일 사이 노래의 진실을 말하라
[한겨레]|1998-04-02|11면 |문화 |기획,연재 |3022자
난파 홍영후(1898∼1941). 10일은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난파는 그가 태어난 지 100년, 세상을 떠난 지 57년을 맞는 올해도 우리에게 두 얼굴로 다가선다. 그에게는 민족음악가, 친일음악가라는 두 가지 이름이 따른다.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수십년 동안 사랑 받아온 가곡과 동요를 작곡해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달랬으며, 독립운동단체 흥사단의 〈흥사단가〉를 지은 뒤 일제의 모진 탄압의 후유증으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홍난파. 그 반대편에는 〈정의의 개가〉 〈희망의 아침〉 등 친일가요를 만들어 연주한,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인 또다른 홍난파가 서 있다.그는 어떤 음악인인가?
작곡가, 연주자, 음악평론가로서 난파가 남긴 음악적 업적은 적지 않다. 음악연구기관 ‘연악회’ 창설(1922년), 잡지 〈음악계〉(25년)와 〈조선동요백곡집〉(29년)를 만들었고, 관현악단(36년)과 3중주단(37년)을 만들어 서양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문화체육부는 이런 업적을 토대로 지난 92년 8월 홍난파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난파가 “〈흥사단가〉를 작곡해 고초를 겪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문체부의 발표는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고, 〈흥사단가〉 작곡 진위여부도 논란을 빚었다. 흥사단과 연구단체들의 반박 주장에 부닥쳐 문체부는 4년 뒤 그의 업적 내용을 수정·발표했다.
지난 96년 4월엔 친일음악단체였던 경성후생실내악단의 42년 6월 창단 공연에서 소프라노 김천애가 가곡 〈봉선화〉를 불렀던 당시 프로그램이 발견됨으로써 금지곡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한겨레〉 96년 4월4일치 참조). 〈봉선화〉가 일제 말기에 금지곡이 됐다고 하더라도 일본땅 안에서조차 군가와 행진곡풍의 노래만이 허용됐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음악사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봉선화〉는 1920년에 바이올린 곡 〈애수〉로 작곡됐다가 5년 뒤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들었기 때문에 난파의 의도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난파=식민지 지식인으로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민족음악가’라는 허상은 걷혀야 한다고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는 주장한다.
난파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다 되도록 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그의 친일행각이 알려지면서 그의 관련자료들이 독립기념관 전시실을 떠난 지 몇 해가 흘렀어도 ‘민족음악가’로서 ‘난파’ 신화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런 논란의 와중에 난파 탄생 100돌을 기리는 음악회가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열린다. 11일 오후 7시 수원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KBS교향악단(지휘 장윤성)이, 12일 오후 3시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지휘 금난새)이 난파의 작품들을 연주한다. 이 자리에는 김남윤(바이올린), 이경숙(피아노), 김영미(소프라노), 김관동(바리톤)씨 등 역대 난파음악상 수상자들도 함께 선다.
그들이 연주하는 난파는 어떤 모습의 음악가일까.<김보협 기자>
◎탄생 100돌 행사는 집요한 ‘역사왜곡’/봉선화·고향의봄으로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달래고 민족음악가로 추앙받는 홍난파,그가/정의 개가·희망의 아침 등 친일가요를 연주했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난파 홍영후가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음악 교육자로, 작곡가로, 지휘자로, 평론가로, 소설가로 그리고 방송인으로 활동했으니 이만큼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음악가가 흔치 않았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가 격변하는 근대 시기이자 암울했던 일제 강점 아래였다는 점에서 난파의 행적은 분명 뛰어나다. 그에 대한 평가 중 최대의 평가는 ‘민족음악가’라는 칭호일 것이다.
난파가 활동한 시기의 음악계는 음악인이나 음악회 장소를 손꼽을 정도로 ‘음악 인프라’가 열악한 시기였다. 때문에 난파의 활동은 모든 분야에서 돋보였다. 더욱이 국민의 동요인 <고향의 봄>과 <봉선화>의 작곡가이며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흥사단 단가를 작곡해 그 일로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이 ‘민족음악가’로서 부동의 평가를 받게 했다. 심지어 정부조차 문화훈장을 추서하고 ‘이 달의 문화인물’(1992년 8월)로 선정해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추앙케 했다.
그러나 그는 현제명과 함께 친일의 대부였다. 그는 흥사단 단가를 작곡한 적이 없다. 그 작곡자는 김세형이었음을 지난 96년 정부도 밝힌 바 있다. 음악계 중진 일부는 왜 이를 왜곡하고 있는가.
일제가 1937년 8월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검거해 1차적으로 송치했을 때에도 홍난파는 없었으며, 조사받기 직전부터 그는 조선총독부의 사회교화단체이자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 회원일 정도로 일제의 협력자였다. 그가 형식적인 조사를 받았을 때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이라는 전향서를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고문을 받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조선문예회에서 일제의 중일전쟁(1937년)을 미화시킨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등 친일가요를 발표했으며, 이후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희망의 아침>을 발표했다. 또 1년 뒤 1938년께 수양동우회 회원 중 개신교 출신자들과 함께 두 번째 사상전향서를 발표해 일본 ‘천황’의 종교보국 논리를 전개했다.
이밖에도 수많은 일본 전시가요를 경성방송국에서 지휘·방송하거나, 친일논평을 ‘모리카와 준’이란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1940년에는 일제하 최대조직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친일 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 평의원으로 선임될 정도로 친일의 본산이었다.
몇 해 전부터 수원에서는 홍난파를 기리는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만약 수원에서 문화행사를 기획하려면, 난파보다 한 세대 앞서 19세기 수원릉 안에서 태어난 명창 한송학을 부각시키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역사는 사람이 평가한다. 음악 역시 사람이 한다. 누구나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혹자는 변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을 두고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누가 그를 두고 민족음악가라 추어올리며, 왜 그를 미화시키려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서두르고 있는가. 이 음악회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노동은 목원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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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 홍영후(1898∼1941). 10일은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난파는 그가 태어난 지 100년, 세상을 떠난 지 57년을 맞는 올해도 우리에게 두 얼굴로 다가선다. 그에게는 민족음악가, 친일음악가라는 두 가지 이름이 따른다.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수십년 동안 사랑 받아온 가곡과 동요를 작곡해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달랬으며, 독립운동단체 흥사단의 〈흥사단가〉를 지은 뒤 일제의 모진 탄압의 후유증으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홍난파. 그 반대편에는 〈정의의 개가〉 〈희망의 아침〉 등 친일가요를 만들어 연주한,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인 또다른 홍난파가 서 있다.그는 어떤 음악인인가?
작곡가, 연주자, 음악평론가로서 난파가 남긴 음악적 업적은 적지 않다. 음악연구기관 ‘연악회’ 창설(1922년), 잡지 〈음악계〉(25년)와 〈조선동요백곡집〉(29년)를 만들었고, 관현악단(36년)과 3중주단(37년)을 만들어 서양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문화체육부는 이런 업적을 토대로 지난 92년 8월 홍난파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난파가 “〈흥사단가〉를 작곡해 고초를 겪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문체부의 발표는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고, 〈흥사단가〉 작곡 진위여부도 논란을 빚었다. 흥사단과 연구단체들의 반박 주장에 부닥쳐 문체부는 4년 뒤 그의 업적 내용을 수정·발표했다.
지난 96년 4월엔 친일음악단체였던 경성후생실내악단의 42년 6월 창단 공연에서 소프라노 김천애가 가곡 〈봉선화〉를 불렀던 당시 프로그램이 발견됨으로써 금지곡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한겨레〉 96년 4월4일치 참조). 〈봉선화〉가 일제 말기에 금지곡이 됐다고 하더라도 일본땅 안에서조차 군가와 행진곡풍의 노래만이 허용됐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음악사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봉선화〉는 1920년에 바이올린 곡 〈애수〉로 작곡됐다가 5년 뒤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들었기 때문에 난파의 의도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난파=식민지 지식인으로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민족음악가’라는 허상은 걷혀야 한다고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는 주장한다.
난파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다 되도록 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그의 친일행각이 알려지면서 그의 관련자료들이 독립기념관 전시실을 떠난 지 몇 해가 흘렀어도 ‘민족음악가’로서 ‘난파’ 신화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런 논란의 와중에 난파 탄생 100돌을 기리는 음악회가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열린다. 11일 오후 7시 수원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KBS교향악단(지휘 장윤성)이, 12일 오후 3시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지휘 금난새)이 난파의 작품들을 연주한다. 이 자리에는 김남윤(바이올린), 이경숙(피아노), 김영미(소프라노), 김관동(바리톤)씨 등 역대 난파음악상 수상자들도 함께 선다.
그들이 연주하는 난파는 어떤 모습의 음악가일까.<김보협 기자>
◎탄생 100돌 행사는 집요한 ‘역사왜곡’/봉선화·고향의봄으로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달래고 민족음악가로 추앙받는 홍난파,그가/정의 개가·희망의 아침 등 친일가요를 연주했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난파 홍영후가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음악 교육자로, 작곡가로, 지휘자로, 평론가로, 소설가로 그리고 방송인으로 활동했으니 이만큼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음악가가 흔치 않았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가 격변하는 근대 시기이자 암울했던 일제 강점 아래였다는 점에서 난파의 행적은 분명 뛰어나다. 그에 대한 평가 중 최대의 평가는 ‘민족음악가’라는 칭호일 것이다.
난파가 활동한 시기의 음악계는 음악인이나 음악회 장소를 손꼽을 정도로 ‘음악 인프라’가 열악한 시기였다. 때문에 난파의 활동은 모든 분야에서 돋보였다. 더욱이 국민의 동요인 <고향의 봄>과 <봉선화>의 작곡가이며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흥사단 단가를 작곡해 그 일로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이 ‘민족음악가’로서 부동의 평가를 받게 했다. 심지어 정부조차 문화훈장을 추서하고 ‘이 달의 문화인물’(1992년 8월)로 선정해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추앙케 했다.
그러나 그는 현제명과 함께 친일의 대부였다. 그는 흥사단 단가를 작곡한 적이 없다. 그 작곡자는 김세형이었음을 지난 96년 정부도 밝힌 바 있다. 음악계 중진 일부는 왜 이를 왜곡하고 있는가.
일제가 1937년 8월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검거해 1차적으로 송치했을 때에도 홍난파는 없었으며, 조사받기 직전부터 그는 조선총독부의 사회교화단체이자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 회원일 정도로 일제의 협력자였다. 그가 형식적인 조사를 받았을 때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이라는 전향서를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고문을 받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조선문예회에서 일제의 중일전쟁(1937년)을 미화시킨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등 친일가요를 발표했으며, 이후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희망의 아침>을 발표했다. 또 1년 뒤 1938년께 수양동우회 회원 중 개신교 출신자들과 함께 두 번째 사상전향서를 발표해 일본 ‘천황’의 종교보국 논리를 전개했다.
이밖에도 수많은 일본 전시가요를 경성방송국에서 지휘·방송하거나, 친일논평을 ‘모리카와 준’이란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1940년에는 일제하 최대조직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친일 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 평의원으로 선임될 정도로 친일의 본산이었다.
몇 해 전부터 수원에서는 홍난파를 기리는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만약 수원에서 문화행사를 기획하려면, 난파보다 한 세대 앞서 19세기 수원릉 안에서 태어난 명창 한송학을 부각시키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역사는 사람이 평가한다. 음악 역시 사람이 한다. 누구나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혹자는 변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을 두고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누가 그를 두고 민족음악가라 추어올리며, 왜 그를 미화시키려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서두르고 있는가. 이 음악회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노동은 목원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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