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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타계한 원로성악가 김자경-한국오페라 영원한 '프리마돈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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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999-11-10|23면 |45판 |문화 |1782자

9일 새벽 숨진 김자경씨는 명실공히 한국오페라의 증인이자 성악계의 큰별이었다.1948년 한국최초의 오페라 「춘희」의 주인공 비올레타로 이땅에 오페라를 알린 이래 그는 민간 최초의 「김자경 오페라단」을 설립, 평생 한국오페라 발전에 온몸을 던졌다. 당뇨병으로 거동이 불편한데도 그는 지난 8월 자기 오페라단의 「춘희」 공연현장을 열심히 찾았다. 『 내 일생 마지막이 될 지 모를 「춘희」 공연을 지켜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영원히 「춘희의 비올레타」로 불리길 바랬던 그는 마지막을 「춘희」와 함께 한 셈이다.

1917년 개성에서 목사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찬송가를 부르며 음악적인 재능을 키웠다. 이화여전 성악과를 수석 졸업한 뒤 미국에서 유학한 그는 195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하지만 세계적 소프라노가 되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58년 귀국해 이화여대에 몸담은 그는 자신의 못다핀 꿈을 제자교육에 쏟아, 소프라노 이규도 남덕우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라 68년엔 사재 등으로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하게 된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 오페라토대를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던 그에게 62년 사랑하던 남편 심형구씨의 죽음은 엄청난 시련이었다. 41년 어렵사리 맺어진 뒤 자신을 그림자처럼 돌보며 외조했던 남편이 해수욕장에서 불의에 익사한 것이다. 좌절과 절망에서 헤매던 김씨는 63년 새로 「태어났음」을 다짐하고 그 순간부터 나이를 다시 헤아렸다.

지난 90년에 「28세」였던 그는 아예 『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28세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91년에는 한양대 대학원 국악과에 입학했다. 또 지난 68년 자신이 맨손으로 창단한 김자경오페라단을 사단법인으로 만들며 17억여원의 사재를 기증했다. 「장기집권」하던 단장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동안 김자경오페라단은 한 편에 수억원씩의 제작비가 소요되는 오페라를 54차례의 정기공연으로 올렸다. 김씨는 87년 일흔살 나이로 37년만에 다시 카네기홀에 서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또 75년부터 80세가 된 97년까지 매년 한차례씩 가곡독창회를 가졌다. 그가 부른 가곡 곡목수만도 총160여곡이나 된다.

그녀의 활동은 음악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19번의 독창회개최로 얻은 수익금은 불우아동복지기금.기독교 100주년 선교자금.홍난파선생 흉상 건립금.호스피스 건립기금.맹인개안수술비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테너 안형일씨(73.서울대 명예교수)는 『 김자경오페라단공연에 출연하면서 김선생의 고군분투에 감명받곤했다. 세계에서 김선생처럼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분은 찾기 힘들 것』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유족과 제자들은 김씨의 서울 신촌 자택에 고인이 수집해온 음반과 악보 등 오페라 관련 자료들을 상설전시할 오페라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또 내년 1월초 예정됐던 제자들의 콘서트를 「소프라노 김자경 추모 갈라콘서트」로 열기로 했다. 유인화 기자 rhew@kyunghyang.com" rel="nofollow">rhew@kyunghyang.com
<연보>
■ 1917년 9월9일 개성 출생
■ 40년 이화여전 졸업
■ 41년 제1회 독창회
■ 48∼50년 미 줄리아드음악학교 성악전공, 「라 트라비아타」주역,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 51∼58년 미 남부 60개 도시 순회공연, 귀국독창회
■ 58∼83년 이대 성악과 교수
■ 68년 김자경오페라단 창단, 베르디의 「춘희」이후 54차례 공연
■ 84년 김자경오페라 하우스 개관(국내최초 오페라전용소극장)
■ 94년 이대로부터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

수상/
대한민국예술원상.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국민훈장 석류장.세종문화상.
프랑스문화예술훈장.문화공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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