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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작곡가·성악가 1백인이 뽑은 최고의 한국 가곡[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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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작곡가·성악가 1백인이 뽑은 최고의 한국 가곡, 작곡가, 성악가
5.「우리 가곡의 개척자」 洪蘭坡


洪蘭坡(1898~1941)는 27명의 추천을 받아 2위에 올랐다. 1위의 金東振씨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낀다』고 그에 대해 말했지만, 「우리 가곡의 개척자」라는 표현 말고 별다른 추천 이유를 찾 기 힘들었다. 홍난파의 「봉선화」 이후, 서양음악기법에 우리 얼을 담은 새로운 형태의 노래가 한국 가곡이라는 커다란 장르를 이루며 한 세기를 이 어져 온 것이다.

『서양음악의 구조적 원리를 따랐지만, 우리말 어법에 우리 민족의 애환과 감정을 담은 예술가곡으로 한국 가곡의 틀을 만들었다』(한신평·방송인) , 『美學的으로 모든 곡들이 탄탄하고 아름답다. 그로 인해 홍난파 계열의 많은 작곡가가 생겼다』(黃哲益·작곡), 『일제치하라는 시대적 조건하에 서 설움을 담을 수밖에 없어 다소 편협한 작곡세계에 그쳤지만 다른 시대에 났더라면 보다 다양한 음악세계를 넓힐 수 있었을 것』(박세원·성악)이라 는 평가가 있었다.

홍난파는 東京과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와 조선음악가협회 이사, 경성보육학교 교수, 경성방송교향악단 지휘자 등을 지냈다. 우리 음악사에 서 그의 자리가 너무 큰 탓에 필요 이상 애국지사가 되었다가 필요 이상 親日(친일) 인사로 몰리기도 하는 엇갈린 평가 속에 놓여 있다. 「고향의 봄 」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같은 동요에서부터 「봄처녀」 「사공 의 노래」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장안사」 등 많은 가곡 작 품을 남겼으며 소설집도 세 권 낸 바 있다.

26명의 추천으로 3위에 오른 金聖泰(김성태·1910~)씨는「동심초」 「산유 화」 「이별의 노래」 「한송이 흰 백합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유 학 후 경성 음악학교(서울대 음대 전신) 교수로 부임, 30년을 재직하며 작 곡 활동 및 후학 양성에 힘써왔다. 『서양어법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한국 가곡 개척, 오늘날과 같은 가곡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게 만들었다』(한신평 ·방송인)는 평처럼 「본격적인 한국 가곡의 개척자」라는 평가가 가장 많 았다. 평론가 閔庚燦(민경찬)씨에 의하면 『김성태 선생 이후부터 비로소 한국적이다 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국적이 확실한 우리 가곡이 시작되었다 . 무엇보다도 한국적 어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민요나 여백의 美 등 전 통적 요소들을 서양음악과 훌륭하게 결부시켰다』고 했다.

작품들에 대해 「깔끔하다」는 표현도 많았다. 『간결하면서도 고상한 악상 처리가 뛰어나다』(조병욱·성악), 『깔끔한 성격대로 악보도 깔끔하게 정 리, 음표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는 군더더기 없는 작품들』(崔永燮·작곡) , 『대중화에 기울지 않고 가곡 본래의 순수함을 지킨 우리 가곡의 모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작품』(고진숙·작곡), 『반주 부분에 있어서 和聲的으로 앞선다』(이병렬·성악)는 평도 많았다. 『1930년대 작품들이 뛰어 남에도 월북 시인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관계로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는 얘기도 있었다.

25명의 추천을 받은 조두남(1912~1984)씨는 그의 대표곡 「선구자」와 함께 언급된 경우가 많았고, 『우리식 감성 표현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지배적 이었다. 『순수하고 꾸밈없는 작곡가』(李秀仁·작곡), 『향토적인 입김이 전편에 서려 있다』(박정하·성악), 『그리움과 민족의 恨을 서정적으로 그려냈으며, 감정을 전달해내기가 쉽지 않다』(嚴正行, 성악)고들 하였다. 조두남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만주, 하얼빈 등으로 방랑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리움」 「선구자」 등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상해 임 시정부 시절, 북간도 용정을 배경으로 한 가곡 「선구자」는 조두남씨가 2 1세 때, 독립운동가 윤해영이 찾아와 「용정의 노래」라는 시를 주며 동포 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쓴 곡으로 원제 목이 「용정의 노래」이다.

민족의 강인한 투지와 기상을 담아 독립군들에 의해 애창되었고 시대를 바 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80년대에 대학생들의 애창곡이면서 동시에 민정당 당가로도 불렸다.「뱃노래」 「산」 「산도화」 등 조두남씨의 다 른 작품도 많은 추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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