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성악가 1백인이 뽑은 최고의 한국 가곡[3]
[설문조사]작곡가·성악가 1백인이 뽑은 최고의 한국 가곡, 작곡가, 성악가
3.'명태'와 '산유화'
「한국 가곡의 始初(시초)」인 「봉선화」(김형준 시, 홍난파 곡)도 별다른 설명 없이 13명의 추천을 받아 3위에 올랐다.「일제 치하의 민족 정서를 표현한 민족의 노래」라고 추천 이유를 밝힌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노래가 민족의 노래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20년 洪蘭坡 (홍난파)가 일본 음악학교에 復校(복교)를 거부당하고 돌아와 지내던 중에 쓴 것으로, 그의 창작집 「처녀혼」에 바이올린 곡으로 발표한 것을 난파 의 이웃에 살던 김형준이 가사를 집어넣고 제목도 「봉선화」(당시엔 「봉 숭아」)로 바꾸었다.
그후 東京 유학생 김천애가 일본 신인음악회에 한복을 입고 나가 이 노래를 불러 유학생들을 감동시키면서 유명해졌다. 애조 띤 멜로디와 은유적인 가 사가 큰 호응을 얻으며 민족의 애창곡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일제는 음반 판매는 물론 가창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활동했던 작곡가 金聖泰(김성태)씨도 이 노래에 관한 추억담을 갖고 있다.
『일제 때 경성 중앙방송국에서 혼성합창단을 지휘했어요. 독창곡이던 「봉 숭아」 노래를 내가 4부 혼성합창으로 편곡해서 연주했는데 그야말로 감격 의 도가니였지요』
다음으로 변훈의 「명태」, 김성태의 「산유화」, 김순남의 「산유화」가 나란히 9명의 추천을 받았다. 「명태」(양명문 시, 변훈 곡)는 성악가 1위 를 차지한 오현명씨와 함께 거론된 경우가 많았다. 오현명씨의 독창회에서 으레 앙코르곡으로 불려지며, 오현명씨가 무대에 설 때면 객석에서 「명태 」를 연호하는 청중이 늘 있게 마련이다.
어부에 잡힌 명태의 입장에서 쓴 해학적인 노래말은 이전에 없던 신선함이 고 한국적인 和聲(화성)을 창출했다는 음악적 새로움도 간과할 수 없다. 작 곡가 李旭(이병욱)씨는 『명태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국 가곡이라 내세울 수 있는 곡이 생겼다. 봉선화로부터 이어온 이전의 가곡들은 사실 우리 색깔 이 없었다』고까지 말했다.
「산유화」(김소월 시, 김성태 곡)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서정성이 담긴 국민 가곡』(허방자·작곡), 『고도의 예술성과 한국적 향토성이 잘 융합되 어 있는 곡』(崔永燮·작곡)이라 평가받았다. 작곡가 부문 3위에 오른 김성 태씨의 대표작이며, 평론가 閔庚燦(민경찬)씨의 말을 빌면 『한국적 어법을 살려 한국 예술가곡의 장을 연 김성태의 음악세계가 농축되어 있는 곡』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에 김순남씨가 곡을 붙인 「산유화」가 똑같은 숫자의 추천을 받았다. 『한국적인 가곡의 출발』(陳圭英·작곡), 『1940년대라는 시대를 상당히 앞서 나간 수준, 독창적인 기법이 돋보인다』(李誠裁,·작 곡가), 『장음계 단음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화음의 진행에 있어서 현 대적 주법을 도입, 요즘 들어도 무리가 없다』(朴世源·성악가) 등의 추천 사유도 다양했던 곡이다.
김순남씨가 월북 작곡가라는 이유로 뒤늦게 알려 졌지만, 많은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성태씨의 작품과는 노래말, 작곡시기뿐 아니라 서양음악의 어법을 극복했다는 점까지 비슷한 점이 있다.
다음으로 金連俊(김연준)의 「청산에 살리라」(8명), 윤이상의 「고풍의상 」(7명), 金東振의「수선화」(7명), 김성태의 「동심초」(7명), 윤용하의 「보리밭」(7명)이 뒤를 이었다. 최근 재조명을 받으며 부각되고 있는 윤이 상의 고풍의상이 8위에 오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추천」 「그네」 등 다 른 작품들도 추천곡 명단에 올랐다.
그 밖에도 金奎桓(김규환)의 「님이 오 시는지」(6명), 장일남의 「비목」(6명), 조두남의 「선구자」(5명) 등 대 중적인 애창가곡들이 음악인들로부터도 똑같은 사랑을 받았다.
3.'명태'와 '산유화'
「한국 가곡의 始初(시초)」인 「봉선화」(김형준 시, 홍난파 곡)도 별다른 설명 없이 13명의 추천을 받아 3위에 올랐다.「일제 치하의 민족 정서를 표현한 민족의 노래」라고 추천 이유를 밝힌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노래가 민족의 노래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20년 洪蘭坡 (홍난파)가 일본 음악학교에 復校(복교)를 거부당하고 돌아와 지내던 중에 쓴 것으로, 그의 창작집 「처녀혼」에 바이올린 곡으로 발표한 것을 난파 의 이웃에 살던 김형준이 가사를 집어넣고 제목도 「봉선화」(당시엔 「봉 숭아」)로 바꾸었다.
그후 東京 유학생 김천애가 일본 신인음악회에 한복을 입고 나가 이 노래를 불러 유학생들을 감동시키면서 유명해졌다. 애조 띤 멜로디와 은유적인 가 사가 큰 호응을 얻으며 민족의 애창곡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일제는 음반 판매는 물론 가창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활동했던 작곡가 金聖泰(김성태)씨도 이 노래에 관한 추억담을 갖고 있다.
『일제 때 경성 중앙방송국에서 혼성합창단을 지휘했어요. 독창곡이던 「봉 숭아」 노래를 내가 4부 혼성합창으로 편곡해서 연주했는데 그야말로 감격 의 도가니였지요』
다음으로 변훈의 「명태」, 김성태의 「산유화」, 김순남의 「산유화」가 나란히 9명의 추천을 받았다. 「명태」(양명문 시, 변훈 곡)는 성악가 1위 를 차지한 오현명씨와 함께 거론된 경우가 많았다. 오현명씨의 독창회에서 으레 앙코르곡으로 불려지며, 오현명씨가 무대에 설 때면 객석에서 「명태 」를 연호하는 청중이 늘 있게 마련이다.
어부에 잡힌 명태의 입장에서 쓴 해학적인 노래말은 이전에 없던 신선함이 고 한국적인 和聲(화성)을 창출했다는 음악적 새로움도 간과할 수 없다. 작 곡가 李旭(이병욱)씨는 『명태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국 가곡이라 내세울 수 있는 곡이 생겼다. 봉선화로부터 이어온 이전의 가곡들은 사실 우리 색깔 이 없었다』고까지 말했다.
「산유화」(김소월 시, 김성태 곡)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서정성이 담긴 국민 가곡』(허방자·작곡), 『고도의 예술성과 한국적 향토성이 잘 융합되 어 있는 곡』(崔永燮·작곡)이라 평가받았다. 작곡가 부문 3위에 오른 김성 태씨의 대표작이며, 평론가 閔庚燦(민경찬)씨의 말을 빌면 『한국적 어법을 살려 한국 예술가곡의 장을 연 김성태의 음악세계가 농축되어 있는 곡』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에 김순남씨가 곡을 붙인 「산유화」가 똑같은 숫자의 추천을 받았다. 『한국적인 가곡의 출발』(陳圭英·작곡), 『1940년대라는 시대를 상당히 앞서 나간 수준, 독창적인 기법이 돋보인다』(李誠裁,·작 곡가), 『장음계 단음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화음의 진행에 있어서 현 대적 주법을 도입, 요즘 들어도 무리가 없다』(朴世源·성악가) 등의 추천 사유도 다양했던 곡이다.
김순남씨가 월북 작곡가라는 이유로 뒤늦게 알려 졌지만, 많은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성태씨의 작품과는 노래말, 작곡시기뿐 아니라 서양음악의 어법을 극복했다는 점까지 비슷한 점이 있다.
다음으로 金連俊(김연준)의 「청산에 살리라」(8명), 윤이상의 「고풍의상 」(7명), 金東振의「수선화」(7명), 김성태의 「동심초」(7명), 윤용하의 「보리밭」(7명)이 뒤를 이었다. 최근 재조명을 받으며 부각되고 있는 윤이 상의 고풍의상이 8위에 오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추천」 「그네」 등 다 른 작품들도 추천곡 명단에 올랐다.
그 밖에도 金奎桓(김규환)의 「님이 오 시는지」(6명), 장일남의 「비목」(6명), 조두남의 「선구자」(5명) 등 대 중적인 애창가곡들이 음악인들로부터도 똑같은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