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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여섯> 쓰러진 술병 위로

별헤아림 2 1760
가을의 끝자락에서 간간이 성긴 눈송이가 날리다 멈춘다.
 하늘을 한 번 쳐다본다.
 자고로 요즘 같은 계절에는 술맛이 난다.
아니 술맛이야 그대로겠지만 음주자의 심사가 그러하고 분위기가 그러할 것이다.
 서서히 모임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 몸이야 워낙 게으른 탓으로 그 흔한 계모임 하나 없다. 게다가 참석하는 모임도 <초등학교 동창회>가 유일무이한 모임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내 마음의 노래> ‘동호회는 참석해 보고 싶지만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 만만치가 않다. 장소가 대구이든가. 시간이 저녁 7시라면 가능하겠지만..
『게으른 자유주의자』는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게으른 자유주의자』가 술을 끊은 책임은 전적으로 동거인 <염소>의 탓이다. 모르는 사람은 <염소>가 아내가 술마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염소>는 오늘도 약간 비틀거리면서 잽싸게 아파트 통로를 오른다. 오른손에는 맥주 한 병이 들려져 있다. 자신은 소주를 잘 마시는 편이지만 술친구를 생각하여 맥주를 들고 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술잔에 술을 따라 놔 봐라 마시나. 집안을 오염시키는 술 냄새가 싫고, 그의 수다와 억지에 분노한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무너지는 인격의 그 허무함에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 집 <염소>는 이 몸과 술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얘길 하길 바란다. 하지만 돌아선 마음이 되돌아가긴 힘들 것 같다. <염소>는 그리울 것이다. 『게으른 자유주의자』의 재능이. 재능이라 함은 부담 없는 외모는 이종사촌 쯤 되어 보이고, 적당한 입담은 지루하지가 않다. 그리하여 대학 시절부터 각종 삼삼오오 모임에는 복학생 재학생을 막론하고 꼭 나를 끼워서 행사를 연다. 그런 관계로 동창생들이 나를 마치 게시판인 양 각종 소식을 물어온다. 움직이는 게시판.

 <염소>의 친구 아내이자, 나의 대학동창인 <상궁>은 나와 <염소>의 전화 통화를 듣더니만
  “너 그러고도 안 쫓겨나고 시집 사나?”
 우려의 눈초리로 쳐다본 적이 있다.

 각설하고, 일 년의 끝자락에서 술자리는 시작된다.
 40대 후반에 들면서 앞으로의 살아갈 날을 헤아려 서울이고 부산이고 멀다고 불평하지 않고 코흘리개 적 동무를 찾아 다들 모였다. 점심을 먹고 맥주 두 잔을 마신 후, 이른 시간이지만 2차로 유흥업소로 옮겨 가기 전 사정상 자리를 빠져 나오는 『게으른 자유주의자』를 배웅하려 팬 대여섯 명이 따라 나왔다.
  12월 초순, -겨우 자녀를 중학교 졸업시키려는 본인의 처지를 무색케 하며 - 한 동창이 <장모님>이 되신다고 한다.
  그곳에서의 술과 만남을 기약하며.

 
  가끔씩 떠오르는 ‘마빈 도케이어’의 『탈무드』중 <술의 기원>을 옮겨 본다.
 
  이 세상에서 최초의 인간이 포도밭에 씨앗을 심고 있었다.
 이때에 악마가 나타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인간이
  “멋진 식물(植物)을 심고 있지!
라고 말하자 악마는
  “이런 식물은 본 일이 없는데...”
라고 말했다. 인간은 악마에게,
  “이것은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가 열려서 그 즙을 마시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악마는 자기도 한 몫 끼워 달라고 말하면서 양과 사자와 돼지와 원숭이를 데리고 와서, 이 네 마리 짐승을 죽이고 그 피를 거름으로 쏟아 부었다. 그래서 포도주가 생겼다.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양처럼 온순하고,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강하게 되고 그보다 더 마시면 돼지처럼 더럽게 된다. 너무 지나치게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한다.
  이것이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다.

  이곳은 『음악』과 『시』가 존재하는 품위 있는 공간.
  이『게으른 자유주의자』가 품위를 손상시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술 마시는 사람의 향기에 따라, 술친구가 누구냐에 따라 얼마나 분위기가 바뀌는지 모른다.
 쓰러진 술병 위로 <목마를 탄 숙녀의 옷자락>을 다시 얘기할 수 있을까?

2 Comments
가객 2002.11.19 14:58  
  '별헤아림'님!

'가객(歌客)'과 '술'
그 것들은 곧 바로 서로 친근감이 느껴지지만
'별헤아림'과 '술'에서는
별로 상관관계가 지어지지 않고
오히려 서로 무관한 느낌만이 드는데
갑자기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의 귀절이 생각나는군요.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렇구나!
'술병에서 별이 떨어지고 그 떨어지는 별의 갯수를
헤아리다 보면 별헤아림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혼자 웃어 봅니다.

조지훈님은 글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음주에는 다섯가지의 기준에 따라 18계단이 있다며
바둑의 세계에서처럼 등급을 매기고 있더군요.

그에 따르면
저는 초급 수준에 해당하는 학주(學酒)단계인
주졸(酒卒)은 넘은 것 같고
그 위 애주(愛酒)단계인 주도(酒徒)는 된 것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주졸에 이르기까지
나도 별헤아림님의 말씀처럼
'...자녀들 앞에서 무너지는 인격의 허무함...'
그 것을 많이 연출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새벽녘 몸과 마음이 편칠 않은 상태에서
갈증 때문에 물한잔 마시려고 일어날 기척을 보이면
이윽고 시작되는 집사람의 긴 설교를 한참 듣다가
 
장탄식을 하고 뒤돌아 눕곤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그러고도 충분한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주도(酒徒)쯤 된 것같아 그리 염려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 눈발이 날리는 계절이 다가오니
술 한잔 할 기회가 늘어날만큼 조심해야겠구나 하며
자신을 경계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다듬어 봅니다.


별헤아림 2002.11.20 09:06  
  가객님의 '술'에 관한 글을 읽고 자꾸만
'술'과 함께 즐거웠던 기억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게으른 탓에 이제야 한 마디 올렸습니다.

술로 인하여 양처럼 마음이 온화해지고
조금만 흩으려진다면(사자의 속성 2분의1에 해당하는 용기)
오히려 매력이 아닐까요?
하지만 사자의 포악함, 돼지의 추함, 원숭이의 헬렐레하는 속성은 곤란하겠죠.

누군가 저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얘기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무서운 세상이라면서..
하지만 저는 껍데기를 많이 벗어 던지고 산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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