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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느 아름답고 모호했던 청년

사은 2 2056
어느 아름답고 모호했던 청년

나는 그때 세상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누군가 나의 길을 인도 해주지 않으면 나는 길을 잃고 방황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정상적인 생활에서 그만 이탈 한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은 내 담임 선생님의 주먹 때문이었다. 어느 국어 시간 문학을 배우면서 문학 청년의 꿈을 키웠을 그런 시기에 나는 불행하게도 내 인생의 가능성을 모두 도둑맞은 것이다. 그 저주의 수업시간― 내가 국어 선생님에게 내 안면을 얻어맞고 코피를 흘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당당했었다.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당당함이 나에게는 있었다. 나는 교탁 앞에 불려나가 “너 뭐가 되려고 그래?” 하고 나를 책망하는 담임선생님께 장난치다 끌려 나온 주제에 나는 당당하게 판사가 되겠다고 했던 것이다. 담임선생님이 나의 얼굴을 가격한 것은 바로 그 얄밉게도 오만한 나의 태도가 그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아니, 판사 될 놈이 수업시간에 장난이나 쳐?”하고 그 다음 순간에 여지없이 담임선생님의 쇠망치 같은 주먹은 아름답고 모호했던 청년의 얼굴을 박살냈던 것이다. 코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내 잘생긴(?) 얼굴에서 더운피가 흘러 내렸다. 나는 반항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한 대 맞고 나서 내 마음에는 분노 같은 것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금니를 지긋이 악물었다. 그 뒤 S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그들은 아름답고 모호했던 그 청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학교를 떠난 나는 K시 충장로 거리를 배회하며 도둑고양이처럼 야행성으로 변해 갔다. 그 방황하던 시절에 내가 만나는 사람 모두가 불량 청년이거나 홍등가의 여자들이었다. 조숙했던 나는 중 3년 때부터 간호 전문대학 다니는 여자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기도 했다. 나의 여성 편력은 그 때부터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그 때 나는 그렇게 철없이 오만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소꼴을 먹이러 올라갔던 그 여름 산등성에서 동네 개집아이에게 호기심에 그런 짓을 시도하기도 했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난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뱀을 잡아 먹인 탓이든지 아니면 아담과 하와 때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추악한 본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름답고 모호했던 시절에 기타를 치며 팝송을 부른 다든지 포크송을 부를 땐 세상에서 아무것도 부럽지가 않았다. 나는 그때 학교를 그만 두고 가수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살았다. 학교를 그만둔 후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고 고리타분한 선생님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부르면 되는 그런 한없이 모호했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나는 한 때 모 방송국 밴드마스터였던 유 선생에게 음악을 사사 받기도 했고 서울에 있는 모 TV 방송에 출연하여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부르기도 헸다. 그때 내가 입상만 했어도 내 가수의 꿈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신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후라이 보이 곽규석씨가 사회를 봤던 그런 TV 프로그램에 나갔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텔레비전이 귀한 시대라서 나는 재방송에 나오는 잘생긴(?)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집 아이가 그 시간에 즐겨 보는 <타잔>이라는 프로와 겹쳤기 때문에 나는 채널 권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내 노래하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었다. 그때가 1975년 어느 11월의 일이었으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젊은 날 나는 날마다 노래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음악을 사랑했었다. 그 시절 그렇게 날마다 백수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홀어머니의 채근은 점점 그 수위가 높아만 갔다.“이놈아, 날마다 노래만 쳐 부르고 있으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그때 나는 그런 잔소리에 명석한 내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했다. 서울에 가서 돈을 벌기로...

청년이 돌아 왔다. 지금이 새벽 3시다. 광주에서 제주로 돈벌러 온 청년이다. 그는 배를 타기 위해 한 달 전에 제주에 온 것이다, 그에게서는 노숙자의 땀과 지린내가 났다. 23세 김석천, 그는 의기 소침한 얼굴로 교회 옥상 계단에 놓여 있는 장의자에 엎어져 추운 겨울 바람을 이기려고 한 모양이었다. 내가 옥상에 스트레칭 하러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밤에 한 영혼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하기 위한 신의 정확한 섭리였다. 나는 우선 굶주린 청년의 허기를 달래 주기로 했다. 압력 밥솥은 김을 내 뿜으며 딸랑거렸다. 쌀과 보리를 익힌 것이다. 그 불의 위력이 맛있는 잡곡밥을 만들 듯이 그렇게 성령은 뜨거운 기운으로 그 청년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 청년은 유난히도 눈이 크고 선하게 보였다. 아니 그 선한 모습 뒤에는 어떤 음모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처럼 배신을 잘 하는 동물이 어디 있었던가? 나는 내가 먹는 그대로 청년에게 차려 주었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쓴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는 교회를 찾아오길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년은 여섯 살 때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어린 동생 셋이서 힘겹게 살다가 1997년에 할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고 의지가지 없는 신세가 된 모양이다. 나는 그 청년의 영혼에 관심을 가졌다. 사람의 가치를 물질로 환산하는 세상에서 나는 용케도 그 청년의 순수한 영혼만을 본 것이다. 나는 청년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그리고 구주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 1시간 넘게 얘기했다. 그리고 그는 구주를 영접하기로 했다. 그 청년의 고백이 내 가슴을 울렸다. “목사님 저는 제일 어려 울 때 예수님이 나를 도와 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그 청년의 영혼이 얼마나 목마르게 복음을 갈구하는 지 느낄 수가 있었다. 2004년 2월 1일부터 나는 광주 평안 교회에서 찬양간증전도집회를 한다. 한 동안 노방전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하나님은 기회를 주신 것이다. 묶은 밭이 다 된 내 심령에 영혼 사랑의 불이 붙은 것이다. 그가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누가 감히 이 성스러운 사건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하늘의 천사들도 하늘의 별들도 기뻐서 반짝이는 밤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잃은 양 한 마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보다 더 귀하다고 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창세 전에 이 놀라운 사건을 작정하신 것이다. 누가 이 비밀을 깨닫겠는가?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인 것이다. 청년은 거뜬히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나는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고 복음을 들려주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그는 예수를 붙잡았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나의 젊은 시절 얘기를 그에게 해 주었다. 청년은 ‘목사님 같은 분에게 그런 때가 있었을까?’하고 속으로 놀라면서도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때론 웃기도 했다.

내 나이 19세쯤이었을 것이다. 돈 벌겠다고 집을 나간 지 일주일만에 멋쟁이 청년이 반 거지가 되어 추운 겨울에 집으로 돌아 온 일이 있었다. 그 좋던 미제 빅스톤 청바지와 자켓, 그리고 보랏빛 롱 구두를 신고 서울역에 내렸을 때, 나는 서울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카사노바처럼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술 마시고 주색잡기에 날려 버린 것이다. 종국에는 입고 있는 옷까지 팔아서 주린 배를 채우고 서울의 밤거리를 늑대처럼 어슬렁거리며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내 생에 그렇게 추웠던 밤이 있었을까? 나는 서울역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면서 ‘저 기차를 타면 집에 갈 수 있는데...’ 하며 서울역의 푸른 불빛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 추웠던 11월의 겨울 서울의 밤거리, 부랑자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 내게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잠깐,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싸구려 여관을 찾아가 통 사정을 했지만 숙박계를 가지고 온 여관 주인은 숙박비가 없는 나를 냉정하게 개를 쫓듯이 그 추운 살얼음판으로 내 몰았던 것이다. 나는 얼어죽지 않으려고 서울역 지하도에서 발을 동! 동! 구르며 지하도 벽에 붙은 전등에 언 손을 녹이며 내 식어 가는 청춘의 마지막을 구해줄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구세주는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열아홉 내 청춘은 검정 물을 들인 스몰 바지와 하얀 반 팔 니트를 입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나를 정신 이상자로 보았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그런 차림으로 서울의 겨울을 견디느라 거의 동사 일보 직전에서 기진 맥진해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나는 서울역으로 가서 용감하게도 입장권으로 광주행 열차를 탄 것이다.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기차는 선로 위를 꿈결처럼 달렸다. 그 소리에 취해 나는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열차 안에 더운 스팀이 간밤에 추위에 벌벌 떨었던 내 온 몸의 세포를 풀어 주었던 것이다. “집을 떠나야 집 중한지 알고, 굶어봐야 음식 귀한 줄 안다!”고 늘 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그래요” 나는 꿈결에 아버지를 불렀다. 중2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동생 둘, 이렇게 농사꾼의 아들이 도시로 이사를 와서 다니던 학교도 때려치우고 가수가 되겠다고 밤낮 기타 치며 노래만 부르던 내가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이라는 곳에 왔는데 나는 여지없이 추방된 밀입국자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내 신세가 한없이 처량했다.

그때 나는 누가 나를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승차권 검사를 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평택 역에 이르렀을 때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을 한다. 나는 입장권으로 특급열차를 탄 것이 발각되어 공안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갔다. 그 순간 나는“아! 집에 가는 꿈이 깨졌구나!”싶었다. 앞이 막막했었다. 배도 고프고 춥기도 했다. 빅 스톤 상의를 팔아먹고 반 팔 하얀 니트를 걸치고 있었으니 그때 나는 영락없이 거지였던 것이다. 아니 거지 보다 더 가난한 옷차림이었다. 젊은 날 패기 하나로 세상을 이겨 보겠다던 나에게 세상은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들어 갈 틈조차 전혀 보이지 않은 여리고 성 같았었다.

나는 지금도 30여 년 전 평택 역에서 만났던 이동경 형을 잊지 못한다. 그는 그때 결혼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는 경남모직 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배고픈 나에게 사 주었던 라면 곱빼기, 그리고 광주까지 끊어 준 꿈의 티켓 한 장이 나의 모호한 청춘을 이렇게 영화처럼 시인목사가 되게 했던 것이다.. “야 임마! 너 목사님이 얼마나 하나님 사랑을 많이 받은 줄 아냐? 30년 전에 그 모호했던 청년이 오늘 네 앞에 앉아 있는 김광선 시인목사님이야!” 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일부러 목소리의 톤을 더 높였다.

그 청년은 새로운 소망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숙제를 내주었다. 그것은 둘 중에 하나를 고루는 것이었다. 하나는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고백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밤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지금 저는 직장을 구하는 데 잘 될 겁니다.” 하고 열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과 또 하나는 신 제주 시내를 여리고 성 돌 듯이 일 곱 바퀴를 돌면서 오늘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며 도는 것이었다. 나는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 할 때 법궤를 메고 일주일간 하루 한 바퀴씩 돌다가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고 외치자 여리고 성이 무너졌던 그 기적을 상기하며 그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내성적인 그 청년은 두 번째를 택했다.

그를 보내 놓고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자정이 넘고 새벽 2시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나는 한 편으로는 그놈이 그냥 도망친 건가 하고 의심이 들었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느 아름답고 모호했던 청년>이라는 수필을 쓰고 있었다. 내가 서재에서 나가 예배당 안을 살폈을 때 시계는 새벽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예배당 한 쪽 의자에 누가 바위처럼 누워 있지 않은가! 아! 바로 그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나는 그 순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는 근 3시간 넘게 여리고 성 돌기를 해낸 것이다. 나는 그 아름다운 청년이 30년 후에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를 샤워 실에 밀어 넣고 씻도록 하고 내 두툼한 겨울 츄리닝과 내 하얀 속옷을 속죄하는 맘으로 그에게 내 주고 지린내 나는 그의 옷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어느 아름답고 모호했던 청년이 30년 후 목사 시인이 되어 있듯이, 오늘 밤 그 청년의 불확실했던 삶이 이렇게 예수를 영접하고 나를 통해 새벽 별처럼 명징해 진 것이다. 그는 여리고 성 돌기를 하면서 3시간 반 동안 신 제주를 일 곱 바퀴 돌면서 새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그가 돌아오면 목욕을 하도록 받아 둔 목욕물이 아직도 따뜻한지 내 손을 넣어 보았다. 목욕물은 신의 사랑처럼 여전히 따뜻했다. 나는 30년 전에 평택 역에서 아름답고 모호했던 시절 이동경 형에게 진 사랑의 빚을 흰머리 희끗희끗한 50대의 나이에 이렇게 갚은 셈이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는지 알람이 울린다. 얼른 나가서 그 청년의 깨끗해진 옷을 빨래 대에 널어야겠다.
그 아름답고 모호했던 청년은 목욕을 마치고 내 서재로 들어 와 내가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는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지금쯤 그는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2004년 1월 16일 늘 푸른 제주에서 사은 김광선 시인목사





2 Comments
바다 2004.01.18 17:22  
  사은 목사님!
아마 30년 후에 그 아름다운 청년은 또다시 자기를 닮은
아름다운 청년을 만나서 이런 글을 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아픔이 있었기에 목사님의 오늘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평안교회가 어디에 있는지요?
사은 2004.01.19 03:55  
  저두 구체적으로 잘 모르는데...아마 각하동 어디라던가 평안교회 배광숙목사님 휴대폰 번호 하나면 찾을 수 있겟죠? 011-9605-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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