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적으로 적어...!
가식적으로 적어
권선옥(sun)
내가 가장 사람을 필요로 하고 안정을 얻고 싶을 때가 있다면 아무렇게나 이불 위에 누워서
허물없이 딸에게 발 두 개를 내맡기다시피 하고서는 발맛사지를 받을 때이다. 물론 딸은 약하게 맛사지를 한다면서 발가락을 요리조리 돌리지만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곤 한다. 발을 빼면서 애원하다시피 하는 나를 보면서 딸은 살살하고 있다면서 재미있어 하며 웃기도 한다.
"니가 내 친구 같다." 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말을 붙이면
"엄마! 친구들 엄마도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말하는데, 엄마랑 어디 같이 가면, '내가 니 언니 같다.'라는 엄마도 있고 그러는데 그래도 언니가 낫지 '친구 같다.'고 하면 다른 애들이 '니가 제일 심하다. 니가 뭐 40 대가?' 그런다." 이렇듯 내 곁에서 조잘거리는 딸이 있어 심심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톡톡 쏘는 말투에 나도 화가 나서 "왜 화 내는데?" 소리를 지를라치면
"언제 화 냈어?" 하면서 맞받아 더 큰 소리로 대꾸한다.
"방금 화 냈잖아." 여전히 소리를 지르면 "화 안 났다." 지지 않고 또 소리를 지른다.
한 마디로 그 에미에 그 딸이라, 언행이 일치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정말 만만하지 않은 겨울 날씨다.
아침에 출근을 할 때면 딸을 학교까지 태워 준다. 금방 탄 차에 온기가 있을리도 없지만 차창 밖으로 더욱 차갑고 스산한 겨울 풍경을 힐긋힐긋 스케치면서 스치듯 이른 아침의 도로 길을 달린다. 버스와 택시를 기다리는 출근길의 직장인들과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구르는 학생들의 모자 쓴 외투에서 겨울은 칼날 선 단절이고 마비된 언어이다. 그런 풍경도 잠시 동대구역 아랫길을 돌아 윗길로 올라서자 붉은 아침해가 유난히 크고 눈이 부시다. 차양을 내리면서 딸이 말문을 연다.
"엄마! 우리 생기부 (생활기록부) 쓴다고 취미와 특기 적으라고 했는데, 취미 이상하게 적은 애들 선생님께 다들 맞았대이. 나도."
"애들이 뭐라고 적었어?"
"뭐, 잠자기나 TV 보기 등등...... ."
"니는 뭐라고 썼는데?"
"나는 '혼자 놀기'. 다른 애들 중에 '기교 있는 댄스 배우기'. '시아준수 영상보기'라고 쓴 애들도 다 맞았어."
"막대기로 머리에 알밤 맞았어?"
"아니, 어깨 아래 팔 요기. " 딸이 어깨 아래 이두박근을 가리킨다.
"그런데 니 언제 혼자서 노는데? 혼자서 놀지도 않으면서......!"
"왜 혼자서 안 놀아? 혼자서 컴퓨터 하는거, 혼자서 TV 보는 거 다 혼자서 노는 거 맞잖아. 나야 뭐 그냥 통합적으로 적었지만."
"...... ."
"그래서 애들이 씩씩하게 '그럼, 선생님! 저희들 보고 가식적으로 적으란 말씀입니까?' 했더니. '가식은 무슨 가식.....?'하면서 그 말 했던 아이가 맞았는데 옆에서 또 다른 애들이 '맞다. 맞다. 가식이다! 취미가 <독서하기>, <음악 감상하기> 이런 게 어디 있노. 그지? "
했다가 '맞기는 뭐가 맞아. 니도, 니도.'하면서 걔들도 맞고...... ."
나는 딸의 담임 선생님이신 약간 통통하면서 예쁜 권지희 미즈 선생님과 함께 딸의 반 친구들을 떠올려 보았다. 다투면서 정들어가는 선생님과 고1 여고생들의 풍경이 사뭇 흐뭇하게 느껴진다.
조수석에 앉은 딸은 계속해서 얘길 이어 갔다.
그래서 또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우루루
"선생님...! 가식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는 통에, 선생님께서 안 되겠으니까 큰 소리로
"알았다...!...그럼, 가식적으로 적어...!" 그랬어.
<2005.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