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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된 네덜란드 풍차

이종균 1 1981
9-6. 박제가 된 네덜란드의 풍차

  서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 4만1천여평방 킬로의 좁은 땅덩이, 인구 1천6백만이지만 밀도가 높은 나라, 이것이 네덜란드에 대한 기본 상식이다.
  동으로 독일에 붙어있고, 서쪽으로 바다 건너 대영제국이 있으며, 남쪽은 벨지움 북으로는 북해에 임해있다.
  남서부 구릉지의 가장 높은 곳이 3백21미터이니 산이 없고 면적의 25%가 바다보다 낮아 풍차는 어쩔 수없이 이곳에서 탄생해야할 숙명이다.
  초등학교 때 읽은 한스 브링커라는 어린소년이 구멍 난 바다 둑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막아 나라를 구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는 영국 어린이가 모자가 바람에 날려 잔디밭에 떨어졌는데 잔디를 밟을 수 없어 울고 있는 것을 지나가는 신사가 지팡이로 건져주었다는 이야기를 막상 영국 사람들이 모르는 것과 같이 네덜란드사람도 한스 소년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세계적인 관광 붐을 타고 암스테르담 서쪽 바닷가 할렘스파른담에  “나라를 구한 소년 한스”란 동상을 세웠을 뿐 이를 믿는 사람도 없다.
  이유인즉 이 이야기는 "Hans Brinker" 또는 'The Silver Skate" 라는 동화로 미국의 여성 아동문학가 매리 엘리자베스(Mary Elizabeth Mapes Doge;1831~1905)가 1865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네덜란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 1600년경, 잔(Zaan)강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처음 침수방지용으로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풍차를 돌리게 된다.
  그 뒤로 동력이 없었던 그 시절 목재나 착유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산업에서 그 생산 가공을 천연 동력인 풍차를 이용하여 1천여 대에 이르렀다는데, 1850년부터는 증기기관의 발달로 풍차의 산업기능이 시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13기의 풍차만 남아 관광의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이곳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염료제조풍차 드 캇(De Kat)이다.
  1959년 풍차제작자 G.후스라그는 1780년경에 세워졌던 낡은 풍차들의 남은 자재를 이용하여 염료제조풍차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염료의 원료인 열대지방의 목재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이 풍차에서 가루로 만든 다음 회전 통 안에서 채로 걸러낸 염료를 여러 나라에 수출하여 부를 이루었다.
  15톤이나 되는 이 풍차의 날개를 돌리는 데는 바람의 힘뿐 아니라 작업자의 노력이 밑거름이 된다.
  그들은 바람이 쑥쑥 빠져나가도록 만들어진 날개를 덥개 천을 씌워 풍차의 회전속도를 조절한다. 자동제어장치가 없는 풍차에서 그들의 기능은 매우 큰 것이다.
  한동안은 네덜란드 전역에 9천기의 풍차가 돌고 있었다는데 점점 없어져  9백기까지 줄었다가 1970년대 이후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풍차가 아니라 현대적 터빈을 돌리는 풍력 발전 풍차로 드넓은 지평선과 물가의 제방 등에 줄줄이 서서 그 날렵한 모습을 뽐내며 청정에너지를 공급하는데 실효를 거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풍력발전사업을 들여오기 위하여 대관령을 비롯한 제주도 등에 시험사업을 실시한바 있으나 연중 꾸준히 바람이 부는 네덜란드나 북부 독일과 달리 계절적인 폭풍과 혹한의 장벽을 넘지 못해 고심하고 있는 실정으로 그들이 부럽기만 하다.
  잔담 풍차마을, 강물인지 바닷물인지 분간하기 힘든 물길을 이리저리 피해 돌며 자리 잡은 가정집인지 영업집인지 알 수 없는 똑 같은 집들을 찾아들면 한결같이 기념품 가게가 아니면 식당들로 관광객의 주머니를 유혹한다.
  네덜란드에서야 당연히 풍차와 튜립이 유명하고 또 도자기 기술이 유럽에서 제일 앞섰다지만 볼품없는 나막신 액세서리를 그들은 상징처럼 내세운다.
  바다가 높아 물을 퍼낸다 해도 아무래도 질퍽한 땅에서 신기에 안성맞춤인 나막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가죽신발이 발달할 때 이곳에선 나막신을 신었다는데 그들은 조상들의 생활 지혜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나막신이라면 그 모양이나 예술성, 실용성과 과학성에서 우리 것을 따를 곳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조상들의 것은 시대에 뒤진 낡은 것으로 치부해 아까움 없이 버리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미 멈춰서버린 본래의 기능을 잃은 풍차들은 동물의 박제를 보는 느낌이고, 넘실대는 물결 위를 유유히 흐르는 유람선도 낭만이기보다 연출로 느껴지는데 그래도 관광객은 끊이지 않는다.
  지구의 온난화가 심해져 눈얼음이 모두 녹는다면 현재수면이 60미터가 더 높아진다는데 그들은 걱정도 되지 않는가 보다.
  군데군데 초지를 조성하여 면양을 먹이고 있다. 송아지만한 면양들 그 중에 꼭 사냥개 머리를 빼어 닮은 게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 복제 개일까 아니면 교배 양일까 어쨌든 이것도 살아있는 박제 아니랴.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Amsterdam)은 바로 지척이다. 우리는 그리로 차를 몰았다. 밀집된 건물, 비좁은 거리, 넘쳐나는 차량, 도로변 교량 수로 난간할 것 없이 줄줄이 세워진 자전거가 철책을 이루었다. 시가지 사이사이로 흐르는 수로의 물은 이미 생기를 잃었고, 주택모양을 한 배를 띄워놓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낭만이라기보다 꾀죄죄 땟국이 흘러 보인다.
  다만 반 고흐(Vincent Willen Van Gogh; 1853~1890)박물관 뒤편의 잔디공원이 시원스레 넓어 많은 사람들이 들어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이곳은 유명한 화가들이 많은 나라인가 보다.
  나는 취미로 시작한 동양화가 경기도전에 입선했을 뿐 미술에 대하여 소양이 없는 사람인데도 호기심에서 고흐 박물관에 들어가 봤다.
  초상화로 명성을 떨친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1606~1669), "아픈  소녀”로 유명한 얀 스테인(Jan Steen;1625~1679), 그리고 명작 “델프트의 풍경”을 남긴 베르메이르(Vermeer Jan;1632~1675) 등 유명한 화가들이 네덜란드출신으로 비교적 짧은 인생을 살고 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37년을 살고 간 고흐는 그가 그림을 그린 10년 동안 소묘 1.037점, 회화 870점, 수채화 150점, 삽화 및 기타 143점 도합 2.200점을 남겼다니 참으로 긴 인생을 산 사람 아니랴.
  1890년 5월 고흐는 오베르 쉬르와즈 의 정신신경과 의사 가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해 7월에 ‘닥터 가세’와 그의 딸 ‘마르그리프 가세’의 초상화를 남기고 1890년 7월 27일 권총자살을 시도한 뒤 3일후에 숨을 거둔다.
  모든 예술은 일반적으로 그 당시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지식과 수요가들의 기호에 의해서 가치가 평가된다.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이름 없는 고흐의 그림 또한 살아생전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지 97 년이 지난 1987년 그의 작품 “아이리스”가 소더비즈 예술품경매에서 미화 539만 불에, 또 1990년에 “닥터 가세”의 초상이 825만 불에 경매 되었다니, 천재는 앞서 보는 사람이라 그 당시야 누가 그의 예술성을 알았으랴?
  지금은 반 고흐의 그림이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 Comments
김형준 2006.10.25 23:03  
  이종균선생님!
이번 글은 한 글자도 빠짐 없이
자세히 분석하며 읽었습니다.
참 섬세한 성품을 가지셨고
보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분석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유럽에 가셨을 때
차를 대절해서 직접 운전을 하며 여행을 하셨군요.
두 분이서 원하시는 목적지들을 향해 운전하시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리에 밝고, 지도 찾기에 능해야 한다는 것이
금방 머리 속에 들어 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여행 스타일이리라는
추측도 쉬이 됩니다.
참 유익하고 즐거운 여정이셨겠다라고 느껴져
님을 위해 큰 기쁨이 들었습니다.

자세히, 천천히 읽어 보니
아,
님의 글이 참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보내 주신 '산행 수필집'들을
이 글을 읽은 것과 같이 천천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고자 합니다.
아마도 직접 여러 차례 만난 것보다도
글을 읽음을 통해서 님과 더욱 쉽게 친숙하게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2006년 10월의 내 마음의 노래 "가곡 부르기' 모임은
"참 좋았었다"라고 느껴집니다.
이선생님과 같이 귀한 분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일간 또 좋은 만남을 같게 되길 빕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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