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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존성에 서린 혼 (봉수산)

이종균 2 1806
임존성에 서린 혼
    (봉수산)

  우리나라 산 1,260좌를 소개한 「한국의 산하」에 보면 봉수산(鳳首山)이 충남 예산군에만 두 좌가 있어 처음 찾아가는 사람을 허둥대게 한다.
  예산 대술면과 아산 송악면의 살피에 534미터의 봉수산이 있고, 또 예산 대흥면 과 홍성 금마면 경계에도 483미터의 봉수산이 있다.

  내 아는 예산출신의 교수로부터 ‘작지만 역사와 전설이 깃든 아름다운 산’이란 소개를 들은 뒤로 부쩍 호기심이 일었으나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봄이 무르익는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막내 놈 차를 탔다.

  예산에 들며 봉수산을 물었더니 잘 모른다는 대답인데, 문득 그 산에 있다는 대련사와 임존 산성이 떠올라 말했더니 안노인 한분이 예당저수지로 가라며 자세히 일러준다.

  예당저수지, 바다보다 더 넓다하면 부풀림일 테지만 남서해안의 웬만한 다도해협 못지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민물호수임에는 틀림없다.
  호수면적 329만 평, 저수량 4,600만 톤, 예산과 당진을 합한 몽리면적 1만 핵타, 그래서 이름이 예당(禮唐)인 이 호숫가에 태공들이 좌선에 들었다.
  주나라 산동사람 강여상(姜呂尙)은 난세를 걱정하고 천하의 경륜을 탐구하여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때를 기다리다 문왕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다는데 저들은 무었을 꿈꾸고 있는지 사뭇 진지한 모습이다.

  나는 대흥면사무소 뒤쪽 자연휴양림에서 사람의 발자국이 거의 없는 산길로 혼자 들어섰다.
  군데군데 나뭇가지에 매달린 대흥소방서의 ‘산불조심’, 대흥면 이장단의 ‘환경을 보호하자’ 특히 대흥면 새마을 남녀지도자들의 ‘자연을 사랑합시다’는 표찰에 자기고장을 자기 힘으로 개발하려는 의지가 담긴 듯, 이제 어디를 가도 찾아보기 힘든 새마을 정신, 그 불씨가 남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드디어 임존성(任存城)에 이르렀다.
  외면 석축, 내면 토석 혼축, 둘레 2,450미터, 넓이 28만8천 평의 이 성은 백제의 고성이라는데 성안에 물을 모았다가 적이 쳐들어올 때 물꼬를 터 공격하는 이른바 수정식 성으로는 세계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흥현 편에 보면 봉수산은 진산이며, 임존성은 백제의 복신(福信),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에 항거하던 곳인데 본 읍 관아 서쪽 13리에 옛 돌 성이 있어 의심컨대 이 성이 아닌가한다. 고려태조가 후백제의 임존성을 공격하여 형적(刑積) 등 3천여 명을 죽이고 잡았다고 하였다.

  또 부여현 편에는 이들 백제 충장(忠將)들의 활동상황이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의자왕이 항복하니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세우고 당나라 장수 유인원을 포위하였는데 유인궤가 공격하여 임존성으로 물러가 자칭 상잠장군이라 하였는데 뒤에 부여풍에게 피살되었고,
  의자왕 때 달솔 겸 풍달장군이 된 흑치상지는 소정방이 의자왕을 잡은 뒤 노략질을 일삼으니 도망자 3만을 모아 임존성을 지켜 소정방이 공격해도 이기지 못했는데 뒤에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권유함으로 항복했으며,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백강에 이르러 공격하자 부여풍은 달아나고 왕자 부여충승과 충지 등은 모두 항복했는데 지수신 만은 임존성에 웅거하다 성이 함락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하였으니 이 성을 이해하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나는 그 때 그날의 거기 서서 눈앞에 아른거리는 나라를 위해 죽어가던 충절의 얼을 보았다.
 
  푯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오른 정수리, 표지석이 없고 사람이 걸터앉을만한 돌 3개가 있을 뿐이다.
  주위와의 고도차가 500미터 미만이면 구릉(丘陵)이라하는 일반통념에 따른다면 이 산은 그야말로 언덕에 불과하다. 그러나 높은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 솟은 484미터는 아슬한 높이이다.
  봉 머리를 닮아 봉수산이라는데 어떻게 닮았는지 내 안목으로는 알 수 없으되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뻗어나가는 금북정맥의 뼈대임은 확실하다.

  젊은 남녀 두 쌍이 뒤따라 올라온다. 나는 예산에 산다는 그들에게 장군바위와 묘순이바위의 위치와 내력을 물었다.
  그들은 부끄럽다며 저 동쪽 425봉에 있는 산림감시초소 감시자는 혹 알는지 모르겠다 말하는 겸손함이 요즘 젊은이 같지 않다.

  굳이 건네주는 배즙 하나를 얻어 마시고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60대로 보이는 덥수룩한 그는 장군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시간이 되면 이 성곽을 한 바퀴 돌아보라 권유한다. 그래서 나는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돌아 헬기장 바로 서쪽에 있는 장군바위를 찾았다.
  성안은 물론이요 둘레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점, 장군이 이 바위에 서서 전황을 살피며 지휘 했음직한 곳이다.

  가파른 서쪽 능선을 돌아 성의 남면에 이르니 중앙 펑퍼짐한 곳에 백제임존성청수란 비석이 있고 우물 속엔 지렁이 모양의 알 같은 것이 보인다.

  광시면 마사리로 내려가는 콩크리트포장 임도가 속리산 말티재의 구절양장보다 더한데 그 어귀 어느 협곡에 있다는 묘순이바위를 찾지 못했다.
  옛날 이곳에 남매장사가 있었는데 생명을 건 내기를 했다. 아들은 쇠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고 딸은 이 산에 성을 쌓는다. 성이 다 되어 가는데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종콩밥을 지어 딸에게 먹이며 시간을 끌어 아들이 이기고 딸은 바위 밑에 깔려 죽었다. 청원군 구녀산의 전설과 같은 맥락인데 지금도 어머니들은 아들을 선택할까 모를 일이다.

  내려오는 길, 이 성 동남방 깊은 협곡에 박힌 듯 서있는 대련사를 찾았다.
  임존성 내에 연당(蓮塘)과 연정(蓮亭)이 있어 대련사(大蓮寺)라 한다는 이  절의 현판에는 백제 의자왕 때 의각(義覺)이 창건했다 했는데, 군청홈페지에는 백제승려 도침이 복신과 함께 이 성을 지켰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도침이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했다.
  어쨌든 작은 절 안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대도 인기척하나 없는 고요를 600년을 넘긴 둘레 6미터의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다.

  충(忠)이라하면 민주교육을 받으며 자란 젊은 세대들이야 나라를 위해 개인의 목숨을 바치는 것, 아니면 구세대의 진부한 아부성 용어정도로 이해하여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충은 ‘참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 했으니 그 정성을 나라를 위하여 바치면 그것은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요, 부모님께 드리면 효도이며, 제 고장을 위하여 쏟는다면 애향이 되는 것 아니랴.

  예산군이 군민헌장에서 충을 으뜸으로 내세운 건 어쩌면 백제의 혼을 이어가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 Comments
김형준 2007.03.22 01:17  
  이종균선생님,
예산에 다녀 오셨군요.
사모님과 아드님, 세 분이 함께 가셨네요.
동반 산행을 하셨는지요.

'충'은 영어로 'loyalty'입니다.
'효'는 'filial duty(자식의 의무)'입니다.
이 두 덕목은 결국 사랑(love)'으로 귀결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충' 또는 '의리'를
매우 강조하는 사람 중의 하나 입니다.
개인간에도 의리와 책임감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상대방을
버리지 아니하고, 나만 너무 많이 챙기는
이기적 발상을 내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헌데 문제는 평화로운 시절에는
너무나도 친한 척 하다가도
위기의 순간이나 불편한 시간이 다가오면
'나 몰라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역시 좋은 친구는
위기의 순간에 옆에 있어주는 사람인가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종균 2007.03.22 12:24  
  아들놈과 집사람은 관광을 하고
산엔  나 혼자 올랐습니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막네놈이 결혼 약속시한인 구랍을 넘긴 뒤로
일체 대화를 끊고 있었는데
이번에 불쑥 외제차 하나를 사다 내게 내밀었습니다.
난 시력이 좋지 않아 핸들을 놓은지가 벌써 1년인데...

속 못차린 놈이라고 호되게 야단을 쳤는데
이러다간 정말 마음빢에 나겠구나 싶어
대화로 풀려는 생각에서 기회를 만든거지요.

주말이 제게도 요긴한 시간 일텐데
흔쾌히 따라주는 건
아마 애비의 마음자락이 조금은 전달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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