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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장군의 최후(아차산)

이종균 5 2082
온달장군의 최후 (아차산)

  아차! 권 사장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차산에 오르기로 한 약속을 깜박 잊을 뻔 했구나.
  서둘러 걸망을 챙겨 매고 지하철 사가 역에서 그를 만나 용마산 사가정공원에 이르니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선생의 시비가 여기저기 서있는데 그중 한중(閑中)이란 시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白髮紅塵閱世間 :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세상을 살았는데
  世間何樂得如閑 : 세상의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 같으리
  閑吟閑酌仍閑步 : 한가로이 읊조리고 술 마시고 또한 한가로이 거닐며
  閑坐閑眠閑愛山 : 한가로이 앉아 한가로이 잠자고 한가로이 산을 사랑하네

  선생이 은퇴 후 여기 사셨던가 보다. 급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안개처럼 내 가슴에 번져온다.
  내 20대 중반에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70대 초반에 은퇴하기까지의 45년은 제쳐두고라도, 은퇴 후 하루 쉬고 하루 노는 낭인생활 일 년도, 한음 한작 한좌 한면은 고사하고 산에 오름에 있어도 한가롭게 자연을 즐긴다보다 시간과 목표를 정하여 잰걸음으로 달리는 형편이니 “쫓기듯 분망하게 사는 것”은 아마도 타고난 내 성품인가 보다.

  아차산(峨嵯山:285m)은 해발 300미터에도 못 미치는 구릉지로 그동안 내  관심밖에 있었던 산이다.
  그러나 백제 초기의 한성시대에 고구려를 방어할 목적으로 처음 쌓았다는 둘레 약1킬로의 테뫼식 고성이 사적234호로 지정되고, 이 일대의 산줄기에 배치된 17개의 보루(堡壘)들이 사적45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저곳에서 찬란한 삼국시대의 문화 유품들이 발굴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악계(嶽溪) 아차(阿嵯) 아차(阿且) 등 각기 이름에 따른 사연들이 여러 자료에 나타나있으나 조선조에 들어 쓰기 시작했다는 아차산은 왜 높을 아(峨)자 우뚝 솟을 차(嵯)자를 썼을까?
  숨을 몰아쉬게 하는 물매 급한 용마봉에 올라서서 여기저기 널찍널찍한 비탈바위와 골골이 파인 깊은 계곡들을 둘러보며 산에도 산격(山格)이 있다더니 낮아도 갖출 건 다 갖추었구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에 얽힌 사랑이야기도 또한 흥미를 끈다.
  고구려 제25대 평원왕(평강왕)의 공주는 어려서 잘 울기로 왕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 희롱하였다.
  16세가 되었을 때 상부의 고 씨에게 시집보내려하자 공주는 대왕께서 어찌 말씀을 고치려하시나이까 하며 듣지 아니하자, 왕이 너는 내 딸이 될 수 없다 마땅히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하였다. 이에 공주는 귀중한 가락지 10개를 가지고 온달의 집으로 갔다. 눈 먼 온달의 어머니는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함으로 귀인이 가까이할 바 못된다고 거절하나, 공주는 가락지를 팔아 논밭과 주택 노비와 우마를 사들이고 정성껏 뒷바라지를 한다.
  그 뒤 후주의 무제가 요동을 쳐들어 올 때,  왕이 배산 들에서 이를 맞아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크게 승리하므로 왕이 기뻐하여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을 삼고 총애했다.
  영양왕(태자 원)이 즉위하자 온달은 신라는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갔음으로 이를 되찾아오겠다 떠나며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빼앗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맹세했는데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싸우다 그만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이에 장례를 지내려하니 영구가 움직이지 않는지라 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판났사오니 마음 놓고 돌아갑시다 하니 비로소 운구가 되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45권 열전 제5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사랑을 위해 왕실을 버린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존귀한 신분의 공주가 비천한 바보를 사랑해 내조로써 충성스런 장군으로 거듭나 나라에 공헌하게 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대무신왕의 왕자 호동을 사랑한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었다던 사례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아니랴.

  문제는 사실(史實)의 내용이 아니라 그 현장에 대한 논란이다.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아단성(阿旦城)을 서울지역에서는 당연히 사적234호로 지정된 「아차산성」이라 하고, 충북 단양지역에선 사적 264호로 지정된 영춘면의 「온달산성」이라 주장하고 있다.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아차산 향토자료실로 전화를 했다.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8월15일 현지를 동행하며 설명 하겠다고 흔쾌히 약속 한다.
  그래서 다시 찾은 아차산, 생태공원에 장검을 치켜든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동상이 어쩐지 어설퍼 뵈는데도 현장감을 더해준다.
  등산로 입구에 깔끔하게 다듬어 세운 「아차산」이란 돌비석 뒤로 산짐승들의 조형물을 바라보며 울창한 숲을 뚫고 낙타고개 - 팔각정 - 해맞이 광장을 지나 정수리를 향한 삼거리에서 대성암으로 내려갔다.

  대성암(大聖庵)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조선 초기 무학 대사가 중창한 것을, 1921년 안보광 화상이 범굴사(梵窟寺)란 이 폐 사지를 인수하여 대성암으로 개축했다는데, 의상대사가 주재할 때는 법당 뒤에 있는 암굴 천정 혈(穴)에서 쌀이 나오고 그 아래 돌확에서는 정화수가 솟아 부처님께 공양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남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내려 암군지대에 이르니 온달장군의 공기 돌로 알려진 직경 3미터 정도의 둥그스름한 바위가 있다.
  충주시 미륵사지에도 직경 1미터의 둥근 돌이 있었는데 온달장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힘자랑을 하던 돌이란 현판이 서있었다.
  일국의 장군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어딘들 못 가랴. 전황에 따라 한성의 아차산성에서도, 단양의 온달산성에서도, 충주의 월악산 자락에서도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스럽고 성실하기만한 그가 그 치열한 전쟁 중에 한가하게 공기놀이나 힘자랑을 할 여가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김민수 선생은 이기지 않고는 죽어서 돌아가겠다던 장군의 의지가 불끈 쥔 주먹바위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 앞에 매끈한 둔부를 드러낸 채 반쯤 땅속에 묻혀있는 바위가 투구를 쓴 온달장군을 붙들고 통곡하는 공주의 나신이라는 설명은 그냥 이야기 아니랴.

  역사는 하나이고 또 참이어야 한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함은 수치스런 과거를 은폐하려는 치졸함이요, 중국이 역사를 은폐하려함은 실리를 꾀하는 검은 속셈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작은 역사 하나 바로 찾아내지 못하는 것일까?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안은 채 돌아서는 마음이 지친 발길보다 더 무거웠다.
 
5 Comments
sarah* 2007.08.20 23:43  
  ..."閑中"이라는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니.. 계획과 목표를 세워 이루어 나가는 중에 어쩌다 찾아오는 여유로움이라야 소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의 계단을 세개씩 오르는 성큼 걸음이 떠올라.. 閑暇롭게 산행하시는 모습은 상상이 안되는군요^^  건안하시지요?
바 위 2007.08.21 08:16  
  언제나 산과 들은 正史찾아 세우시는

박사님  꼿꼿하신 발걸음 기다리고

하늘은 시절의 명철사 붓끝보며 웃어라


선한 날 노래하고 가락모여 사리는이

늘 산행  吉日일터  낭낭한 구수함에

산 사랑 반세기 날일어 합창돼 춤 추이리


회장님
8월 際 건너시면 팔월 서운타 할것입니다.
번개 치시면
천 우동 울릴겁니다.
사라 선생님 동행하시지요.


고맙습니다 !
이종균 2007.08.21 09:30  
  사라 선생님

정말 그런가 봐요!
읊고 쓰느 것도 허겁지겁, 술은 아예 입에도 못대고,
앚아있기 보다는 서서 걷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니 잠인들 어찌 한가하겠습니까?
문득 깨어나 책을 읽다, 숫자를 꺼꾸로 세다, 겨우 드는 새우잠이지요...
어쩌다 찾아오는 여유로움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렵니다.

바위 선생님

아 그렇지요!
등산은 특별히 날을 고르지 않아도
가는 날이 길일이지요.
뛰어나신 상상력이 부럽습니다.
연락 주시는 날에 나가겠습니다.
단암 2007.08.24 16:42  
  선생님과 함께하는 산행을 통한 역사배우기는 새롭고 즐겁습니다.
가끔씩 도봉산에 올라 아차산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필요한 자리에 편안하게 누워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산이 없었으면 우리의  한양성도 없었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종균 2007.08.25 10:05  
  단암 선생님

역사 배우기라 하시니 부끄럽습니다.

삼국시대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삼국을 지배한다" 했다는데
이 낮고 작은 아차산성이 길고 깊고 넓은 한강을 지배하는데 요긴한 대목이었던가 봅니다.

그보다 여기 얽힌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의 이야기가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뜻이 깊고 천여 년이 앞선 픽션 아닌 史實이라는 점에 호기심이 끌렸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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