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의 그리움
지하철 7호선 청담역 8번 출구에서 100m 거리에 gallery the space가 있다고 했다. 큰 걸음으로 150보 정도려니 계산하고 발을 떼는 순간 출구에 정우동 님이 서계신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들 잘 찾아들 올 터이니 들어가시자고 권하여도 막무가내시다.
초행길이니 안내를 하여야 하신다며, 쭉 내려가다 두 번째 골목으로 좌회전하라시며 혹시 근방에 해야로비 님이 안내를 하고 있다면 공연한 수고니 들어가라고 말씀전해달라신다.
내가 들어섰을 때 스페이스는 그저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피아노가 놓여있고, 의자가 놓여있고,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조금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점점 동호회원들이 모여들고 의자의 갯수를 늘려가자 사람의 체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랴. 인애 님이 제공하신 인절미며, 김메리 님의 강원도 찰옥수수가. 말레시아에서 잠시 귀국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신 이니 님이 커피나 녹차를 타 주시겠다는 인정마저 베푸시니 마치 동네 사랑방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니벨룽 보다는 가곡교실을 택하셨다는 탁계석 님의 글은 감격 자체였다.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늘 사람의 맘을 뛰게 한다. 이번 9월 가곡교실에서 서들비 님이 23년 만에 은사를 만나는 극적인 해프닝이 있었단다. 얼마나 짜릿한 순간이였을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에 우연한 기회로 어떤 특정인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이지 기적이 아니면 가능할까?
연애하던 시절 내 머리 속을 점령했던 여인네들을 떠올려 본다. 그 중 어느 누가 날 생각하며 밤을 뒤척여 본 사람이나 있을까 생각하니 절로 쓴 웃음이 지어진다. 얼굴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데 간혹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한 때는 우연을 가장하고라도 그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을 배회하고 픈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내 첫사랑을 먼 발치로 발견했다. 그렇게 날씬하던 그미는 마치 작은 공이 굴러가는 착각을 할 정도로 배가 볼룩 나오고 양미간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머리 속에 그리던 그미의 모습이 아니였다.
환상은 이렇게 깨젔었는 데 배울 노래 '한 잎의 그리움'(조준 시/한지영 곡)에서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였다.
가을 마다 한 잎 씩 쌓인 그리움이 스물이나 됩니다.
그리울 때마다 한 잎 씩 써놓은 편지도 스물이나 됩니다.
떠날 때 다시 만나리라 님과 약속도 못한 채
중년의 무게를 더 합니다.
잘 간직하리라 묻어 두었던 기억 속의 언어는
녹이 슬어 찬란한 빛을 잃었읍니다.
그래도 나는 그리운 님에게
잘 접어 놓은 그리움을 보내 봅니다.
둘은 대학 미팅 때 만났단다. 헤어지고 군대가느라 소식 못 전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느라 소식 돈절되고, 20년 세월이 휙 지난 후 우여곡절 지내고 겨우 재회할 수가 있었단다. 간절함이 묻어난다. 이렇게 아련할 수가. 이렇게 예쁠 수가....
속인과 예인의 차이를 절실히 느낀다.
'배울 노래'만 남겨 놓고 '우리 가곡 부르기 행사'의 '부르실 곡'은 전부 불려졌다. 특별 순서의 원민이 꼬마 아가씨를 사회자 임승천 님이 소개했는 데 잠잠하다. 어떤 이가 사정을 전했다. 차례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고 만 것이다. 가끔은 할머니를 따라 온 우진이가 잠을 자다 찍세에게 두 눈을 반짝이며 앙징맞은 포즈를 취한 적은 있었다. 대신 최유진 아가씨(초교 2년)의 완숙한 동요를 들었다. 이처럼 고운 목소리가 저 작은 몸매에서 나오다니, 찬사가 절로 나왔다. 끝나고 인사도 얼마나 천연덕스럽던 지 무대 매너도 백점을 주어야 했다.
잠을 깬 원민이는 피아노를 쳐가며 '나비야'를 참착하게 불러주었다.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니 이런 뱃심이면 커서는 세계를 제패할 날을 기원해도 욕심만은 아닐 것 같다.
가곡교실이 파하고 스페이스를 나오는 순간 성큼 닥아선 가을의 문턱에서 왠지 허전한 속을 채우기 위해 한 쪼끼 걸치고 가자고 동행인에게 청해볼까 하다가 오늘 부터 하기로한 단식의 결의를 깨기 싫어 그냥 지하철로 발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사람을 그냥 바라봤다.
지하철에서 만난 어느 분은 300여곡을 알고 계시다고 했다. 그 분 말씀이시다.
목에 핏대 올려가며 듣는 사람도 괴로운 괴성을 질러대야 할 필요가 있을까? 꼭 피아노 반주가 있어야 할까요? 노래방에서 처럼 키를 낮추어도 될 터인 데, 그저 기분 좋게 흥얼흥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것들이 서민 생활에서 가곡을 멀게하는 원인이 아닐까? 이제 부턴 듣는 것 따로, 부르는 것 따로 한다면 여유롭게 여러 사람들이 가곡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신 단다. 가곡을 보급시켜야 한다는 우리 동호회원 만이라도 개악을 하고 싶으시단다. 어느 한 날 피아노 반주 없이 특별 순서에도 참석해 보시겠단다.
초행길이니 안내를 하여야 하신다며, 쭉 내려가다 두 번째 골목으로 좌회전하라시며 혹시 근방에 해야로비 님이 안내를 하고 있다면 공연한 수고니 들어가라고 말씀전해달라신다.
내가 들어섰을 때 스페이스는 그저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피아노가 놓여있고, 의자가 놓여있고,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조금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점점 동호회원들이 모여들고 의자의 갯수를 늘려가자 사람의 체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랴. 인애 님이 제공하신 인절미며, 김메리 님의 강원도 찰옥수수가. 말레시아에서 잠시 귀국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신 이니 님이 커피나 녹차를 타 주시겠다는 인정마저 베푸시니 마치 동네 사랑방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니벨룽 보다는 가곡교실을 택하셨다는 탁계석 님의 글은 감격 자체였다.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늘 사람의 맘을 뛰게 한다. 이번 9월 가곡교실에서 서들비 님이 23년 만에 은사를 만나는 극적인 해프닝이 있었단다. 얼마나 짜릿한 순간이였을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에 우연한 기회로 어떤 특정인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이지 기적이 아니면 가능할까?
연애하던 시절 내 머리 속을 점령했던 여인네들을 떠올려 본다. 그 중 어느 누가 날 생각하며 밤을 뒤척여 본 사람이나 있을까 생각하니 절로 쓴 웃음이 지어진다. 얼굴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데 간혹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한 때는 우연을 가장하고라도 그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을 배회하고 픈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내 첫사랑을 먼 발치로 발견했다. 그렇게 날씬하던 그미는 마치 작은 공이 굴러가는 착각을 할 정도로 배가 볼룩 나오고 양미간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머리 속에 그리던 그미의 모습이 아니였다.
환상은 이렇게 깨젔었는 데 배울 노래 '한 잎의 그리움'(조준 시/한지영 곡)에서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였다.
가을 마다 한 잎 씩 쌓인 그리움이 스물이나 됩니다.
그리울 때마다 한 잎 씩 써놓은 편지도 스물이나 됩니다.
떠날 때 다시 만나리라 님과 약속도 못한 채
중년의 무게를 더 합니다.
잘 간직하리라 묻어 두었던 기억 속의 언어는
녹이 슬어 찬란한 빛을 잃었읍니다.
그래도 나는 그리운 님에게
잘 접어 놓은 그리움을 보내 봅니다.
둘은 대학 미팅 때 만났단다. 헤어지고 군대가느라 소식 못 전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느라 소식 돈절되고, 20년 세월이 휙 지난 후 우여곡절 지내고 겨우 재회할 수가 있었단다. 간절함이 묻어난다. 이렇게 아련할 수가. 이렇게 예쁠 수가....
속인과 예인의 차이를 절실히 느낀다.
'배울 노래'만 남겨 놓고 '우리 가곡 부르기 행사'의 '부르실 곡'은 전부 불려졌다. 특별 순서의 원민이 꼬마 아가씨를 사회자 임승천 님이 소개했는 데 잠잠하다. 어떤 이가 사정을 전했다. 차례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고 만 것이다. 가끔은 할머니를 따라 온 우진이가 잠을 자다 찍세에게 두 눈을 반짝이며 앙징맞은 포즈를 취한 적은 있었다. 대신 최유진 아가씨(초교 2년)의 완숙한 동요를 들었다. 이처럼 고운 목소리가 저 작은 몸매에서 나오다니, 찬사가 절로 나왔다. 끝나고 인사도 얼마나 천연덕스럽던 지 무대 매너도 백점을 주어야 했다.
잠을 깬 원민이는 피아노를 쳐가며 '나비야'를 참착하게 불러주었다.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니 이런 뱃심이면 커서는 세계를 제패할 날을 기원해도 욕심만은 아닐 것 같다.
가곡교실이 파하고 스페이스를 나오는 순간 성큼 닥아선 가을의 문턱에서 왠지 허전한 속을 채우기 위해 한 쪼끼 걸치고 가자고 동행인에게 청해볼까 하다가 오늘 부터 하기로한 단식의 결의를 깨기 싫어 그냥 지하철로 발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사람을 그냥 바라봤다.
지하철에서 만난 어느 분은 300여곡을 알고 계시다고 했다. 그 분 말씀이시다.
목에 핏대 올려가며 듣는 사람도 괴로운 괴성을 질러대야 할 필요가 있을까? 꼭 피아노 반주가 있어야 할까요? 노래방에서 처럼 키를 낮추어도 될 터인 데, 그저 기분 좋게 흥얼흥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것들이 서민 생활에서 가곡을 멀게하는 원인이 아닐까? 이제 부턴 듣는 것 따로, 부르는 것 따로 한다면 여유롭게 여러 사람들이 가곡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신 단다. 가곡을 보급시켜야 한다는 우리 동호회원 만이라도 개악을 하고 싶으시단다. 어느 한 날 피아노 반주 없이 특별 순서에도 참석해 보시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