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선생님 만세 !
나는 어제 잠을 설쳤다.
몇 번이고 잠에서 깨었고,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는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었다.
6년전의 힘든 일이 되풀이 되나 싶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어젯밤 영동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 김영선 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갑자기 호흡곤란증세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가셨다고 한다.
내일 '성악의 이해'수업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자고 나야 알것같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지난주 월요일날 '내마노'에서 펴낸 '내 마음의 노래 선정가곡 100곡집'을 교재삼아
'강이 풀리면'과 '남촌'을 배웠었다. 이십년은 젊어보이는 오십이 넘은 김영선 선생님은
멋진 모자에 멋진 옷을 입고 우리 앞에서 노래를 지도했었다.
강이 풀리고, 산 넘어 남촌에서 봄 바람이 불어오는 봄 학기를 맞이하여 첫 수업을
아름답게 진행하신 선생님은 두 번째 강의시간을 어쩌면 응급실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6년전에도 그랬다.
2003년 봄학기... 선생님을 처음 만나 가곡을 배우던 그해 그 봄에도 선생님은
두번째 수업에는 나오시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유방암 발견으로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신 것이다. 몇몇 수강생들과 함께 먼길 달려가 입원실에
도착했을때 선생님은 환자복을 입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김영선 선생님의 친구분인 오영주 선생님이 3주간을 내리 대강을 나왔다.
그리고 4월의 화사한 벚꽃과 함께 선생님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가곡수업에
임했다. 항암치료가 계속 되었기 때문데 종종 오영주 선생님이 대강을 나오면서
5월달에 접어들었다.
그 5월 어느날 오영주 선생님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도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김영선 선생님을 모시고 그곳에 갔던 우리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유방암 투병... 친구를 잃은 슬픔... 설상가상으로 서울시민대학 각 분교가 통폐합
되는 바람에 9월달 가을학기부터는 김영선 선생님의 가곡교실이 개설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가을에 5호선 발산역 근처 음식점에서 김영선 선생님과
가곡을 배우던 수강생들은 모임을 가졌었다. 불과 몇 개월전의 그 행복했던 가곡
수업시간을 그리며...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랬다. 오영주 선생님이 떠난 자였다면 김영선 선생님은 사선을 넘어서 우리 곁에
남은 자였다. 그러나 가곡을 배울 공간은 없었다. 우리가 모인 발산역 근처에 있던
서울시민대학 강서분교는 아직도 지우지 않은 표지판으로만 남아있어서 그곳이
강서분교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김영선 선생님을 중심으로 이듬해 다시 서울시민대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을지분교로 통합되었던 서울시민대학이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광화문 빌딩
으로 옮기면서 광화문분교 시대를 열었고 2004년 봄학기부터 '가곡교실'이 다시
개설되었던 것이다.
세종로와 청계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 멀리 경복궁과 북악산과 북한산이 보이고
남산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광화문빌딩 4층에서의 가곡수업은 그야말로 멋스러웠다.
더러 가끔 고등학교 교복을 예쁘게 입은 김영선 선생님의 따님이 수업시간에 초청을
받아서 가곡을 노래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수 십년전의 고교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5년...
시와 수필과도 같은 삶의 이야기와 노래가 어울어진 김영선 선생님의 탁월한 가곡수업
은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20명에서 30명으로, 다시 40명으로, 50명으로...그리고
급기야는 100 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학교가 광화문에서 한남동으로, 다시 청계천
으로,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안 자작마루로 옮겨다니는 동안에도 수강생들은 계속
늘어만 가서 이제는 서울시민대학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최고의 강좌가 되었다.
암은 5년이 지나면 생존률이 높다던가.
사선을 넘고 넘은 선생님은 작년 이맘때 드디어 5년을 넘어섰고 또 일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제의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응급실 입원... 참으로 막막했다.
오늘 아침 아홉시면 결단을 내려야 했다.
휴강공문을 붙이고 문자메세지를 모든 수강생들에게 보내든가
아니면 잘 아는 성악가로 하여금 대강을 하게 하든가 해야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 단축수업을 하더라도 나오시겠다고 했다.
오후 2시.
서울시립대학교 자작마루...
지난 주와 똑같은 모자에 예쁜 옷을 입은 선생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50명의
수강생들 앞에 섰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 '그리운 마음'을 불러주셨다.
♪ 바람은 불어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 따라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을 옷깃에 감추고 가는 삼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을 옷깃에 감추고 가는 삼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
한 시간으로 끝내겠다고 했던 수업은 십 분간의 휴식시간을 가진후 계속 되었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수업은 끝났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걸까 ?
가누기조차 힘들었을 몸을 그 무엇이 저리도 꼿꼿하게 세워주는 걸까 ?
그 무엇이 저리도 혼신을 다하여 노래하게 하며 미소짓게 하는가 ?
아 ! 성스러웠다 !
포탄이 작렬하고 총탄이 빗발치듯 스치는 전장을 향하여 돌진하는 병사같고
모든 영화를 훌훌 던지고 형장으로 의연히 걸어가는 순교자와도 같았다.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
김영선 선생님 만세 !
몇 번이고 잠에서 깨었고,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는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었다.
6년전의 힘든 일이 되풀이 되나 싶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어젯밤 영동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 김영선 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갑자기 호흡곤란증세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가셨다고 한다.
내일 '성악의 이해'수업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자고 나야 알것같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지난주 월요일날 '내마노'에서 펴낸 '내 마음의 노래 선정가곡 100곡집'을 교재삼아
'강이 풀리면'과 '남촌'을 배웠었다. 이십년은 젊어보이는 오십이 넘은 김영선 선생님은
멋진 모자에 멋진 옷을 입고 우리 앞에서 노래를 지도했었다.
강이 풀리고, 산 넘어 남촌에서 봄 바람이 불어오는 봄 학기를 맞이하여 첫 수업을
아름답게 진행하신 선생님은 두 번째 강의시간을 어쩌면 응급실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6년전에도 그랬다.
2003년 봄학기... 선생님을 처음 만나 가곡을 배우던 그해 그 봄에도 선생님은
두번째 수업에는 나오시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유방암 발견으로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신 것이다. 몇몇 수강생들과 함께 먼길 달려가 입원실에
도착했을때 선생님은 환자복을 입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김영선 선생님의 친구분인 오영주 선생님이 3주간을 내리 대강을 나왔다.
그리고 4월의 화사한 벚꽃과 함께 선생님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가곡수업에
임했다. 항암치료가 계속 되었기 때문데 종종 오영주 선생님이 대강을 나오면서
5월달에 접어들었다.
그 5월 어느날 오영주 선생님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도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김영선 선생님을 모시고 그곳에 갔던 우리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유방암 투병... 친구를 잃은 슬픔... 설상가상으로 서울시민대학 각 분교가 통폐합
되는 바람에 9월달 가을학기부터는 김영선 선생님의 가곡교실이 개설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가을에 5호선 발산역 근처 음식점에서 김영선 선생님과
가곡을 배우던 수강생들은 모임을 가졌었다. 불과 몇 개월전의 그 행복했던 가곡
수업시간을 그리며...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랬다. 오영주 선생님이 떠난 자였다면 김영선 선생님은 사선을 넘어서 우리 곁에
남은 자였다. 그러나 가곡을 배울 공간은 없었다. 우리가 모인 발산역 근처에 있던
서울시민대학 강서분교는 아직도 지우지 않은 표지판으로만 남아있어서 그곳이
강서분교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김영선 선생님을 중심으로 이듬해 다시 서울시민대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을지분교로 통합되었던 서울시민대학이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광화문 빌딩
으로 옮기면서 광화문분교 시대를 열었고 2004년 봄학기부터 '가곡교실'이 다시
개설되었던 것이다.
세종로와 청계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 멀리 경복궁과 북악산과 북한산이 보이고
남산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광화문빌딩 4층에서의 가곡수업은 그야말로 멋스러웠다.
더러 가끔 고등학교 교복을 예쁘게 입은 김영선 선생님의 따님이 수업시간에 초청을
받아서 가곡을 노래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수 십년전의 고교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5년...
시와 수필과도 같은 삶의 이야기와 노래가 어울어진 김영선 선생님의 탁월한 가곡수업
은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20명에서 30명으로, 다시 40명으로, 50명으로...그리고
급기야는 100 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학교가 광화문에서 한남동으로, 다시 청계천
으로,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안 자작마루로 옮겨다니는 동안에도 수강생들은 계속
늘어만 가서 이제는 서울시민대학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최고의 강좌가 되었다.
암은 5년이 지나면 생존률이 높다던가.
사선을 넘고 넘은 선생님은 작년 이맘때 드디어 5년을 넘어섰고 또 일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제의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응급실 입원... 참으로 막막했다.
오늘 아침 아홉시면 결단을 내려야 했다.
휴강공문을 붙이고 문자메세지를 모든 수강생들에게 보내든가
아니면 잘 아는 성악가로 하여금 대강을 하게 하든가 해야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 단축수업을 하더라도 나오시겠다고 했다.
오후 2시.
서울시립대학교 자작마루...
지난 주와 똑같은 모자에 예쁜 옷을 입은 선생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50명의
수강생들 앞에 섰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 '그리운 마음'을 불러주셨다.
♪ 바람은 불어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 따라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을 옷깃에 감추고 가는 삼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을 옷깃에 감추고 가는 삼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
한 시간으로 끝내겠다고 했던 수업은 십 분간의 휴식시간을 가진후 계속 되었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수업은 끝났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걸까 ?
가누기조차 힘들었을 몸을 그 무엇이 저리도 꼿꼿하게 세워주는 걸까 ?
그 무엇이 저리도 혼신을 다하여 노래하게 하며 미소짓게 하는가 ?
아 ! 성스러웠다 !
포탄이 작렬하고 총탄이 빗발치듯 스치는 전장을 향하여 돌진하는 병사같고
모든 영화를 훌훌 던지고 형장으로 의연히 걸어가는 순교자와도 같았다.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
김영선 선생님 만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