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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 -----

鄭宇東 9 1832
산    노    을
                                                     
                                                    ㅡ 유 경 환 ㅡ

먼 산을 호젓이 바라보면                    나무에 가만히 기대 보면
누군가 부르네                                  누군가 숨었네
산 너머 노을에 젖은 내 눈썹에            언젠가 꿈속에 와서 내 마음에
잊었던 목소린가                              던져진 그림잔가
산울림이 외로이 산 넘고                    돌아서며 수줍게 눈 감고
행여나 또 들릴 듯한 마음                  가지에 또 숨어 버린 모습
아아 산울림이 내 마음 울리네            아아 산울림이 그 모습 더듬네
다가왔던 봉우리 물러서고                  다가섰던 그리운 바람 되어
산그림자 슬며시 지나가네                  긴 가지만 어둠에 흔들리네


이 글의 제목은 우리국민이 애창하는 가곡중의 하나인
유경환님의 시에 박판길님이 작곡한 <산노을>의 한 구절입니다.
아침에 뒷산에 오르면 인적을 피해 혼자 흥얼거리다 내려오는 노래입니다.
시문의 문장단락은 대체로 표기한대로 이지만 의미의 파악을 위한 문맥의 연결은
위에 적은 부분에서 그 뜻이 명확히 풀려지지 않아 언제나 주첨거려집니다.

물론 노래를 즐기는 방법이야
어떤 사람에게는 선률의 아름다움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예술이겠지만
나와 같이 가사의 뜻과 교훈도 함께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각자의 견해들을 피력해 다 함께 한번 풀어 보기를 바랍니다.

1. 원전-원시의 문제
    예술가의 고유 연역이며 창작자의 불가침한 권리야 손 댈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원시는 --- 내 눈썹에 얹혀진 목소린가 --- 로 적혀 있다길래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그렇게 적혀 있는 데도 있었지만 시인도 작곡가도 모두
    이젠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시니 여쭐수도 없고 또 그 전거를 못 찾아 확인-확신이
    안 됩니다.

2. 원고나 교정의 착오
    정지용 시 / 채동선 곡 <고향>에서 "한 점 꽃"은 ==> "힌점 꽃"이
    이은상 시 / 홍난파 곡 <사랑>에서 "생낙으로"는 ==> "생 남ㄱ으로"가 정답입니다.
                                                    (자음접변 리에종현상으로 "생남그로" 발음)
    해외유학 성악가중에는 애국가의 "삼천리"도 ==> "삼철리"로 발음해야 합니다.
    출판사는 착오가 발견되면 정오표등으로 고칠려는 양식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작곡상의 필요에 의하여 가사를 바꾸는 경우
    애시당초부터 작곡하기와 가창하기 좋은 시를 주고 받거나
    작곡자와 시인 서로 사이에 예술적인 교감과 전인격적인 신뢰로 100% 전폭적으
    로 맡기는 경우입니다.

    참고가 될 모델로 충주에 사시는 昔松 정태준님은 가곡집<秋心>를 내면서
    아예 시인의 원시를 앞 페이지에 싣고 악보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개사된)
    가사를 실어 문예적인 원시의 문자향도 살리고 작곡가나 성악가의 테크닉상의 애로
    도 타개하는 이런 방법도 해결책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
9 Comments
고진숙 2009.03.03 09:23  
一.원전 원본 따질 것 없이 여기에도 오기나 오식이 있을 뿐입니다.
이 문제가 제기된 이상 뜻을 찾아, 여기서 '찾아'의 뜻은 한자어로 하면 '발굴(發掘)'이란 뜻으로 썼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원전, 원본에도 작가가 잘못했을 수도 있고, 최초 출판사의 오식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점에 한해서 바로잡아야(발굴) 합니다.
예의 문제의 시구(詩句)만을 따로 적어 놓고 생각해 보면

1 '내 눈썹에 얹혔던 목소리'
2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리'
 
이를 비교하면서 생각해 보면,
시의 감상으로 볼 때 1번이 옳습니다.
'원시에 그렇게 되어 있다'라고  해서 이것이 옿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2번에서 '잊었던 목소리'만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그에 앞서 나온 '내 눈썹에'와는 단절되어 버려 의미 해석이 난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번을 택해야 합니다.

二.출판사의 착오에 대하여 '한 점 꽃'이냐 '흰 점'이냐는 '흰 점 꽃'이 옳음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는 내가 중2 때 교과서에 나와 있어 이를 그때부터 지금까지 달달 외워 오고 있습니다.이 시가 몇 백년 된 것이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 시의 역사는 백년 미만입니다.

三. 작곡상의 필요에 의해서 고쳤을 때 그것이 미발표의 시였다면 그때부터는 그것이 원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四.음악에서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비롯한 다른 곡집에서도 출판사가 옳다고 생각하여 고친 판을 거부하고 '원전판'을 고집하여 연주하거나 교육하는 예는 음악에서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용철 2009.03.03 15:55  
외람되오나 아래에 저의 의견을 올려 봅니다.
열린세상 2009.03.03 13:07  
언제나
바른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은
제게는 정말 큰 행복입니다.
정용철 2009.03.03 15:10  
정선생님께서 "각자의 견해를 피력해" 보자고 하셔서 기계와 수학(數學) 밖에 모르는 공대생이오나
저의 생각을 펼쳐 보겠습니다.

 "잊혀진(저의 악보에는 '잊었던')" 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 적당히 문장 부호( . , ? !)를 붙이고,
운율과 내용에 따라서 절(節)을 나누어 보면 분명해 집니다.

즉, 아래와 같이 절을 나누면
 
 ' - - -  젖는 내 눈썹에' 로 한 마디가 끝납니다.

    * 여기서 '젖는 눈썹'은 해석에 따라서 눈 위의 눈썹이 아니라 이슬 젖은 속 눈썹으로 봐도 되고요.

물론 ' - -  눈썹에' 로 마디가 끝나는 것은
시에서 도치법(倒置法)을 썼기 때문입니다.

' 잊었던 - - - ' 은 새로운 줄(마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원시를 악보가 아닌 운율과 내용 마디 별로 적으면 아래와 같이 배열이 됩니다.)
-----------------------------------------------------------------------------------------------------------------
 - - - - - - - - - -
  - - - - - - - -,
 
  산 넘어 노을에
  젖는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산울림이 외로이 산 넘고,

  행여나 - - - --
  - - - - - - -
  - - - - - - - -
------------------------------------------------------------------
저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
고진숙 2009.03.04 00:28  
정용철님의 문제 해결 방법의 논리에 이해가 갑니다.
문제 해결 방법을 논리화하여 참여하시는 일에 같은 동지가 생겼다는 생각에서
고맙게 느끼고 있습니다.

정용철님이 제시한 운율과 내용에 따라서 절(節)을 나누는 해결 방법에
따라 '얹혀진' 또는 '얹혔던'을 대입해 보면,
 
 '잊었던 - - - ' 은 새로운 줄(마디)이 시작되는 
'(언혔던)-----'

 ( 원시를 악보가 아닌 운율과 내용 마디 별로 적으면 아래와 같이 배열이 됩니다.)

 산 넘어 노을에  (산 너머 노을에)
  젖는 내 눈썹에, ('얹힌'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얹혔던 목소린가?)
  산울림이 외로이 산 넘고,


 * 대입해 보니 '잊었던'이나 '얹혔던'이나 같은 논리로 맞아떨어집니다. 둘 다 맞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러나

정우동님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운율과 내용에 따라 절을 나누어" 해결될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 너머 노을에 젖은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와                           

"산 너머 노을에 젖은 내 눈썹에           
얹혔던 목소린가" 의

의미 해석을 위한 논의의 초점이라고 봅니다.그렇다면,

'눈썹에'에서의 '에'는 고정된 공간의 위치를 나타내는 조사(토)입니다. 따라서
그 다음에 오는 단어와 유기적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눈썹에 잊었던'은 의미상으로 볼 때 연결이 아니라 단절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썹에'와 '잊었던'은 의미상 각기 딴전을 부리고 있습니다.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썹에'와 '얹혔던'은 연결이 됩니다. 조사 '에'다음에는 용언(동사나 형용사)이 와야 합니다.

운율에 의해서 '내 눈썹에'를 도치법에 따라 마디가 끝난 것으로 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내 눈썹에'를 종결문으로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읽는 이들을 위하여 의견을 피력한답시고 적어 봤으나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곰곰 더 생각해 보며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정용철 2009.03.05 11:59  
선생님의 자상하신 가르침에 힘입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고진숙 2009.03.06 06:07  
정용철님과 시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은 일이 기쁩니다.또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이 방면에 한 분이라도 더 관심을 보인 것에 대하여..

정용철님,전공 부전공을 가리지 말고 이런 일에 관심을 보여 의견을 내놓는 일을 아끼지 말고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학구적인 논리로 접근해 오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수학적 두뇌로 파고들면 사시(司試)도 통과하는 판에 여기서도 구멍이 뚫리지 말란 법은 없는 것.

'도치법'이란 용어를 읽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도치법이란 글자 그대로 앞뒤를 뒤바꿔 놓는 수법이 아니겠습니까.  덧붙여 말하면 도치법은 강조법 중의 한 가지인데, 수사학(修辭學)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에 있어서 이것의 대표적인 실례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끝 연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를 읽을 수 있습니다.

강조법을 쓰지 않았다면,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이다"로 바르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하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어순을 뒤바꿔 놓은 것입니다.더 설명하면 '아니'는 부사이므로 부사 다음에는 용언(동사,형용사)이나 다른 부사가 와야 하는데,'눈물'이라는 명사가 놓여 있습니다.
문법상 오류입니다.

그러나 소월이 문법을 몰라서라기보다 '아니'를 강조하려고 다른 단어와 뒤바꾸어 앞으로 당겨 명사 앞에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끝난 일을 가지고 사족(蛇足)을 늘어놓은 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용철 2009.03.06 16:19  
이렇게 바다 같이 넓으신 마음을 갖고계시는 윗 어른들이 계셨기에
우리의 정통성과 문화가 위기마다 슬기롭게 이들을 극복하고
면면히 유지되어 왔는 듯합니다.

사회의 개혁이나 발전이
젊거나 혈기있는 다소 극단적인 집단에 의하여 이루어지나
기존의 지성들이
이들의 변혁과 불합리를 통 크게 수용하므로써 마무리 되어 왔습니다.

고선생님 같은 대 원로께서
치졸한 저의 의견 따위는
권위적으로 얼마든지 하찮은 것으로 폐기하여 버리실 수 있었겠으나
격려와 함께 맞는 것은 맞다고 수용하시는 학자적인 아량이
외모의 풍체 만큼이나 크고 당당하게 닦아옵니다.

선생님의 크신 생각을 저희 어린 후학들도 본 받아서
커 오는 후배들을 무작정 윽박지르지 않고
선생님 보다 더 넓은 가슴으로 껴안고 인도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후학 정용철
엎드려 아뢰옵니다.
고진숙 2009.03.06 18:17  
참 부끄럽습니다. 정용철님의 글을 읽어 나가자니
자꾸 이런 감정에 묻히게 됩니다.

웬만큼으로도 족할 터인데,자신을 겸손히 낮추면서 구사하는 최상급의 언어에 의한 떠받듦을 받으려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너무 치켜 세움을 받다가 도리어 실망을 끼칠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그만큼의 넓은 가슴과 지식을 갖추지 못했기에 조심스럽다는 말씀입니다.

"...후배들을  넓은 가슴으로 껴안고 인도하겠습니다."는 마무리 글을 읽으면서 나는 후배나 제자들을 보면 문득 떠오르는 문자 '後生可畏'를 되씹어 봅니다.
먼저 난 자로서 나는 후생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게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인류가 발전해 온 것은 부인할 수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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