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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어 더욱 아름다운 만남 -> 몸짓

김형준 12 824
노래를 열심히 배우다 보니 음악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보를 잘 분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마침 어느 종교음악 감상동호회에 아는 분의 초대를 받아 갔더니
그 모임을 이끄는 어느 종교음악과 교수께서 7, 8월 두 달간에 걸쳐
서울의 용산 지역에서 '시창 학교'를 하신다는 광고와 더불어
안내장을 주셨다.

마침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우리 가곡, 이태리 가곡, 독일 가곡, 오페라 아리아,
뮤지컬 등을 열심히 듣고, 오페라 DVD도 열심히 보아 왔다.
그리고 이곳 저곳 아마추어, 준프로 성악가들의 동호회 모임에
쫓아 다니면서 '무대 공포증'을 없애기 위해 열심히 노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무언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깊은 이해를 아직 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그 시창 학교가 시작한 지 세 번째 시간이었다.
오후 6시부터 9시30분까지 별 휴식 시간도 없이
알차게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수업이 마친 후 4호선 지하철을 탔다가 이수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려서 걸어 가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서
연세가 지긋히 드신 남성 두 분이 열심히 무언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그런데 자세히 쳐다보니 수화(손 언어)로
의사 소통을 하시는 것이었다. 청소년들이나 나이가 꽤 젊은
분들이 수화로 이야기하는 것은 가끔 보아 왔지만 그토록
연세 드신 분들이 수화를 하시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관심이 생겼나 보다.

내가 대학원에서 전공한 학문이 언어학인데다가
언어들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이 내 삶
그 자체라고 말해도 별 과장됨은 없을 듯 싶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수화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7호선 전철이 와서 타려고 하니
아까 수화를 하면서 걸어 오시던 분들 중에서
한 분이 나와 같은 칸에 타셨다.

'어, 다른 한 분은 어디로 가셨지?
같이 7호선 타려고 오시는 것 아니었나?'

아마 그 다른 한 분은 이수역 근처가 집이시거나
이수역에서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하시거나
하기 위해 헤어지셨나 보다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노인석에 앉아 계시던 어느 중년 남성분이
그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시려고 일어 서셨다.
그런데 그 언어 장애우분께서 앉지 않으시겠다는
표현을 몸짓으로 강하게 하시면서 그냥 서계셨다.

물론 그 분은 언어 장애우분들 간에 사용하는
수화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제스처를 몸으로 표현하셨다.

무슨 일인가 그 몸 표현을 살펴보니
너무 더워서 그냥 서있으시겠다는 것 같았다.
복도 중앙에 위치한 천정에 달린 에어콘에서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분과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내가 수화를 못하니 어떻게 대화를 하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어장애우분들은 대체적으로
입술을 읽는 훈련을 하실지 모른다.'

얼마 전에 끝난 독일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팀의 지단이 이탈리아팀의 마테라치를
머리로 강하게 들이받고 퇴장당한 일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이다.
과연 어떤 말을 마테라치가 했기에
백전노장 지단이 그만 참지 못하고
그런 상식 밖의 일을 했을까에 대해 다들 궁금해 했다.
그러자 말한 내용을 입술을 읽어서 이해하는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마테라치가 한 말에 대해 추측하는 것을
신문에서 읽었었다. 지단의 어머니와 누이에 대해
참기 어려운 말을 마테라치가 했다는 것이 대강 분석 내용이었다.

'과연 이분은 내 입술을 읽으실까?'

그렇게 궁금해 하며 그 아저씨에게 '어디까지 가세요'하고
말을 붙였다. 그분은 반색을 하셨다. 그러면서 몸짓과
입술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말하시다가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자신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신대방동'이라고 쓰셨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사람들이 내리면서 다시 자리들이 비었다.
그래서 내가 '저기 앉으세요'하고 말과 못짓으로 말씀드리니까
그 아저씨는 다시 덥다는 표현을 하셨다.
겨드랑이와 얼굴, 가슴, 배 등을 가리키면서 '너무 덥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어디 가냐고 물으셨다.

"저는 상도역에서 내려요."

하니까 웃어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의사소통을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저씨도 나만큼 기뻤을까. 아니면
좀 귀찮으셨을까.

표정을 보아서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쁜 것 같았는데.

내가 또 다른 말을 하자 아저씨는 아마 내 입술을 읽는 것이
그리 쉽지 않으셨는지 '글로 써주면 이해할텐데'라는 동작을
취해 보이셨다. 아마도 친하거나 자주 만나는 분들의 입술을
읽기는 쉽지만 낯선 사람들의 것을 읽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으시리라.

기차가 상도역에 도착했다. 내가 '저 여기서 내려요'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자 아저씨도 잘 가라며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면 손을 흔들어 주셨다.

언제 기회가 되면 수화를 좀 배워보고 싶다.
일전에 여성 몇 분이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수화로 노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분들은 언어장애우들이 아닌 일반인들인데
수화로 노래를 배워서 부르는 것이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정성과 사랑,
그리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 수화 노래에서 내 마음에 직접 전달되었다.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진한 감동이
내 마음 속을 파고 들었다.

나도 언젠가 간단한 수화이나마 배워보고 싶다.
그럼 언어장애우분들과 대화를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으리라.

또한 수화로 노래를 배워 해보고 싶다.
비록 소리는 내지 않더라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감정과, 감사의 감정,
기쁨의 감정을 내 손과 몸짓, 얼굴 표정을 통해서
보고 느끼는 이들과 나누고 싶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딱지치기를 즐겼었다.
누구는 안 그랬을까.
한 번은 언어장애우 친구와 딱지치기를 했다.
단 둘이서 했다.
서로 말을 안통했지만 딱지치기의 규칙을 따라서
따먹기를 했기 때문에 말이 사실 필요없었다.
내가 많이 따고 있어서 나는 아주 신이 나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갑자기 막 화를 내면서
손으로 무언 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붉히며 눈을 부라리면서 손 동작을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몰랐는데
아마 '너 지금 나를 속였지?'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안 속였어!"

라고 했는데도 믿어 주지를 않았다.

'속이지 않았는데.'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막 화내는 그 친구를 보며
지는 것이 상책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글쎄, 혹시 내가 뭔가 잘 못했을 수도 있겠다.'

라고 반성을 했다. 뭔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미 30년이 넘은 일인데도
내 마음에는 매우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친구야, 혹시 내가 잘 모르고 실수했으면 미안해.
용서해 주렴. 너와 함께 딱지치기 하던 일이
내게는 아직도 너무나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단다.
어디에서 살고 있든지 즐겁게 잘 살기 바란다.'
 
12 Comments
열린세상 2006.07.21 18:12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바 위 2006.07.21 21:33  
  친구여 그 시절엔 사랑은 지금 보단

마음이 따듯한거  나도야 멀어져간

세월아  너의 몸짖이  이러히도 그립다
해야로비 2006.07.22 00:45  
  맞아요.
저도 배우고 싶은것 중의 하나가...바로 수화랍니다.
정우동 2006.07.22 08:07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하는 마음은 사랑입니다.
양지보다 음지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더 큰 사랑입니다.
김박사님은 어린시절부터 남보다 생각이 깊고, 철이 먼저 들었고
지금도 가슴이 옛날처럼 넓고 따뜻한 사람입니다. 
늘상 몸이 강건하고 마음이 평안 하시기를 빕니다.
.
김형준 2006.07.22 20:54  
  열린세상님의 글도 늘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바위님은 늘 대화를 시(조)로 하시네요.
어떤 점에서는 오페라, 뮤지컬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오페라, 뮤지컬은 대화를 늘 노래로 하니까요.

해야로비님, 간단한 수화라도 조금씩 배우고 싶습니다.
언제 우리 둘 다 배우면 다음부터 인사를 수화로 해볼까요?

정선생님 용기 주심 감사드립니다.
늘 정선생님의 해박하심과 사려 깊으심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형준 2006.07.24 11:20  
  나는 소리에 매우 민감하다.
인간의 언어이든 자연 속의 소리이든, 음악적인 소리이든
늘 소리를 벗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다양한 색, 모양 등의 것에서도 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산다.

볼 수 없다면, 들을 수 없다면, 말할 수 없다면 얼마나 힘들까.
사실 그 어려움의 정도를 내가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보는 데, 듣는 데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그렇다고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그래도 장애가 있는 분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듣는 훈련을 해야 겠다.
김경선 2006.07.25 15:25  
  장애우와의 대화에 대한 김형준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나라언어도 모르면서 외국에 살던 초기에는
내가 동물인가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는데
요즈음 각 나라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의 진료를
가끔 할 때에는 통역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느낌으로 진행합니다.
 



김형준 2006.07.25 16:19  
  아, 김경선원장님!
외국에서 산 경험이 있으시군요.
영어권이 아니신가 봐요.
언어를 모르는 나라라고 하시니.

언어를 거의 전혀 모르는 나라에 가면
진짜 '언어장애우'가 되어 있는 느낌을 저도 많이 받았습니다.

꽤 잘 아는 언어권 국가에 가서도
'왕따' 당한 느낌으로 기 죽어 지낸 경험도 꽤 있답니다.

그러면서 소외받는 '소수'에 대해 좀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젠 영어 회화를 잘 하시겠군요.
문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사 소통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훨씬 중요하니까요.

감사드립니다.
김형준 2006.07.27 00:59  
  언어 장애우분과 언어 학자와의 만남,
둘이 나눈 대화는 몸과 마음 전체로 나눈 것이다.
수화라고 부를 수도 없고,
입으로 하는 구화라고 할 수도 없고,
눈으로만 한 것도 아니니 안화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고,

아, 그렇지! 몸 전체를 다 썼으니 '몸 신'자 '신화'라고 부르기로 하자.
김형준 2006.08.01 00:21  
  어떤 이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을 매우 기쁘게 해줍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예쁜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이 예쁘다고 마음이 다 예쁘지는 않습니다.
저는 얼굴이 예쁜 사람보다는 
마음이 예쁘고 따스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습니다.

말이 그럴 듯하고, 겉이 번드르르한 사람보다는
젊잖고 예의바르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김형준 2006.08.05 12:31  
  말 못한다고 인간도 못하랴
맘 속 깊은 정 꼭 말로 표현하리
살며시 남 모르게 잡는 그 손
그윽히 응시하는 따스한 그 눈

말 보다 따스한 사랑이 좋다
김형준 2006.08.17 05:09  
  눈만 보고도 알 수 있고,
몸짓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의사소통은 그리도 다양한 것이다.
말이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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