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어데만큼 오시는지 - - - - -
김규환(金奎桓)선생님은 기록상으로는 1925년에 나신것으로 되어있는데
선생님 자신은 이듬해 1926년 평양생으로 여든 셋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김영화님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셨지만 법관이 되시지는 않았고
어머니 황복리님은 북경대학교를 나와 교사가 된 이른바 신여성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어머니는 신사 참배거부 주동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통에 선생님은 고학을 하며 일찍부터 조부모 형제자매를 부양하는
가장역을 어렵게도 맡아야 하였습니다.
이달 1월 우리가곡부르기에 모시면서
서대문구청 인근의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 뵙기로 하였다가
중요한 다른 약속때문에 세종문화회관 근처의 블루다방에서 만났습니다.
나도 약속시각 5분전에 도착했는데
선생님은 그곳에 먼저 나와서 기다리시고 계셨습니다.
약속시각은 틀림없이 지키기를 평생의 철칙으로 삼고 산다 하셨습니다.
악보 챙기기가 편할 듯해서 댁으로 찾아 뵙는다 했는데
총기가 흐려질 한참 고령이신데도 살아 온 노하우로 나의 우려를 읽으시고
악보집을 미리 챙겨 나와 주셨습니다.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행사 당일 모시러 가는 시간도 내가 생각도 못한
퇴근시간들을 고려해서 반시간 당겨 오후 6시로 잡아 주셨습니다.
이런 신념과 배려 경륜 노하우들을 가지신
선생님께서 동요명곡 과수원 길을 자신이 작곡했다 주장하시니
최선은 각자에게 제 몫을 주는 정의로운 해결이 있기를 바라며
차선으로 세상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솔로몬의 재판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원로작곡가를 모시는 이 자리에
많은 내마음의노래 회원들과 음악계의 현역분들이 오셔서
한국작곡가협회의 고문 김규환선생님을 기리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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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자신은 이듬해 1926년 평양생으로 여든 셋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김영화님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셨지만 법관이 되시지는 않았고
어머니 황복리님은 북경대학교를 나와 교사가 된 이른바 신여성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어머니는 신사 참배거부 주동으로 감옥을
드나드는 통에 선생님은 고학을 하며 일찍부터 조부모 형제자매를 부양하는
가장역을 어렵게도 맡아야 하였습니다.
이달 1월 우리가곡부르기에 모시면서
서대문구청 인근의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 뵙기로 하였다가
중요한 다른 약속때문에 세종문화회관 근처의 블루다방에서 만났습니다.
나도 약속시각 5분전에 도착했는데
선생님은 그곳에 먼저 나와서 기다리시고 계셨습니다.
약속시각은 틀림없이 지키기를 평생의 철칙으로 삼고 산다 하셨습니다.
악보 챙기기가 편할 듯해서 댁으로 찾아 뵙는다 했는데
총기가 흐려질 한참 고령이신데도 살아 온 노하우로 나의 우려를 읽으시고
악보집을 미리 챙겨 나와 주셨습니다.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행사 당일 모시러 가는 시간도 내가 생각도 못한
퇴근시간들을 고려해서 반시간 당겨 오후 6시로 잡아 주셨습니다.
이런 신념과 배려 경륜 노하우들을 가지신
선생님께서 동요명곡 과수원 길을 자신이 작곡했다 주장하시니
최선은 각자에게 제 몫을 주는 정의로운 해결이 있기를 바라며
차선으로 세상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솔로몬의 재판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원로작곡가를 모시는 이 자리에
많은 내마음의노래 회원들과 음악계의 현역분들이 오셔서
한국작곡가협회의 고문 김규환선생님을 기리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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