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60에
내 나이 60에
밤새 눈이 와서 온 세상을 하얗게 변하게 하였다.
오늘 내 나이 60의 생일 .
그제 일요일날 아이들이 미리 와서 이웃과 함께 미역국을 나누어 먹고
오늘 정작 내 생일날에는 시어머님과 우리 부부가 밥상을 받고 보니
참으로 쓸쓸하기 짝이 없다 .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하시면서
“ 네 친구들 불러서 화투라도 하고 놀 아 라 ” 하신다 .
마실 을 별로 안나가는 며느리가 쓸쓸해서 안돼 보이시나 보다.
“쓸쓸하긴요 뭐 괞찮아요”
그래도 어머니는 일찍이 경로당으로 마실 을 가셨다 .
청소와 설거지를 마치고 TV 앞에 앉으니 만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벌써 인생 60고개를 넘어서니 한숨도 나오고
지나간 세월도 함께 흐른다 .
과부 시어머니를 만나서 울고 웃으며 살은 세월,
참으로 야속해서 많은 눈물도 흘렸던 지난 세월이다
우리 어머니는 17세에 시집오셔서 19세에 아들 하나 낳으시고
21세에 홀로 되신 청상 과부이시다 .
칭칭 시하 어른들 밑에서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하신분이다 .
남이 홀로 되었다고 처다 볼까 길을 가셔도 고개 한번 눈 한번 번쩍
들고 다니지 않고 큰길을 비낀 뒷길로만 다니셨다 한다.
홀시어머니란 이유로 친정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랫말서 윗말로
시집을 오고 보니 그야말로 시어머니는 전형적인 과부 시어머니였다 .
앉으라면 서야 했고 서라면 앉아야 하는 어느것도 눈에 차지 않는 며느리 였다 .
친정에서는 손 귀한집의 맏딸로 손에 물 한번 안대보고 곱게 길러 고등 교육 시킨
신식 처녀였건만 .
우리 아버지는 개명을 하신 분이라 딸도 능력껏 살아야 한다고 큰딸의 능력을 크게
평가 하시어서 국회의사당이나 중앙청 또는 서울의 정부 주요 관청을 데리고 다니면서 견학을 시켜 주실만큼 사랑하고 기대가 크셨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배움의 허리가 짤렸지만 ...
게다가 업 친 데 덥 친 격으로 남편은 믿고 맡긴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
사업이 몽땅 망하는 지경이 되었다 .
궁색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 나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생활 이였다 .
아궁이에서 나무하고 솥에서 쌀농사 짙는 너무나 알뜰한 어머니를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
사람이 먹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리 아낄려면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나 하고 .
아침에 보리쌀에다 가운데 쌀 한 웅 쿰 얹으면 쌀밥은 시 할머니와 아기 주고
어머니와 나는 보리밥을 먹고 저녁이면 죽이나 국수 아님 감자나 고구마가 주식 이였다 .
악식을 먹어보지 않은 나는 고구마나 감자를 하나 먹으려면 김치 한 탕기에 물 한 대접을 먹어야 했다 .
목이 메어서 넘어가지 않아서 눈물 반 고구마 반으로 때를 때웠다
나는 차음에는 시집 식구들이 미개인 같았다 .어찌 저런 것으로 때를 외우나 하고 ...
식사를 제대로 못해 젖이 안 나와서 아기는 밤이면 많이 울었다 배가 고파서 .
쌀밥이 정히 먹고 싶으면 저녁에 친정집으로 나려 가면 아버지가 ,
“ 얘 밥 먹어 !
“먹었어요
“ 애에미가 제 그루 타냐? 먹어라 ”
나는 눈치 안채게 하려 해도 눈물을 삼키며 쌀밥을 먹고는 돌아 왔다 ,
밤 외출이 못 마땅한 시어머니의 눈총을 받으며 ,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절망에 빠저서 매일을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
옷이나 갈아입으려고 들어오면 우리 어머니는 귀한 아들은 뽀얀 쌀밥을 지어 주신다.
해서 우리 남편은 지금도 어머니와 아내가 그리 험한 음식을 먹고 산 줄을 모른다.
남편이 한달에 5일정도 집에 와서 잠을 자면 그 이틀 날 새벽부터 우리 어머니는
깨어지지 않는 것을 마당에 던지면서 욕 을 욕을 하신다.
며느리와 아들이 한방에서 있는것에 화가 나시고 또 사업 실패해 가난해 진것에 화나고 .
남편이 어쩌다 하루 집에 들어오면 언행이 매우 조심스러워 말씨도 줄게 되고
무뚝뚝한 아내로 변한 내게 애교 없다고 남편은 불만을 하였다 .
지나칠 만큼 효자인 아들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
처음 시집 올때 남편이 내게
“ 어머니가 이때 쓸쓸히 사셨는데 잠자기 전 에는 네 방으로 건너가지 말고 어머니와 함께 있으라는 ”말에 우리는 굴비 두름 역듯이 아이들과 함께 차례로 누워서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 일편 이편 어머니와 서로 나누어 보았다 .
우리 어머니는 공부는 안하셨지만 아주 똑똑하고 솜씨 좋으신 전형적인 양반가 아낙이시다
그러다 남편이 돌아와서 내 방으로 돌아오면 다음날은 영낙 없는 벌 받는 며느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 남편을 일찍 여윈 어머니가 이런 재미도 없이 살았으니 얼마나 불쌍한가?”
하고 동기 부여를 하니 야속함은 그리 모르고 참고 살수 있었다
마음에 없는 말씀만 하지 않으시면 살 것 같았다 .
나는 가계에 도움이 될까 해서 보약 행상을 시작했다 .남편 몰래,
허나 삼일 만에 남편에게 들켜서 뺨을 얻어맞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
남의 집에 문전걸식을 하느냐고 남편은 섧게도 울었다
허나 나는 도둑질 빼 놓고는 무엇이던 할수 있을 것 같았다 .
다행인 것은 나는 일어 설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
또 그 삶이 그리 비관적인 것은 아니였다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체면을 열심히 걸고 살았다 .
약을 한재에 5500원에 받아서 7000원에 파는것 이였는데 이웃 사람들이
안 그럴 사람이 고생한다고 많이도 팔아 주었다 .
가을에 수금을 해서 계산을 하니 농협에 채무를 거의 변제 할수 있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그때 농협에 50여만원의 부채를 갖고 있었다.
지금 환율로 치면 1억원이 넘는 것이였다
이런 일은 남자는 자존심 상해서 할수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 했었다.
하늘도 노력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나 보다 ,우리는 그때 논이 780평 이였는데
농사를 지으면 남보다 마지기당 한가마 정도는 더 나왔다 .
고추 농사를 하면 평당 2근 정도 따서 남들보다 수확이 훨씬 많았다 .
빗을 치루고 남은 돈을 우리는 양돈을 시작했다 .
모돈 5마리에 애비 돈 한 마리를 먼 행주까지 가서 구입을 하였다 .
참 재미나는 일이였다 .새끼 돼지가 얼마나 예쁜지 나는 하루 종일 축사 안에서
생활 하다시피 했다 ,종일 축사 청소 ,새끼 돼지 예방 주사 놓고 ,새끼 유치 잘라주고,
우리 세 식구는 아침 5시에 일어나면 저녁 9시나 돼야만 방에 들어 갈수 있었다 .
허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 새끼가 성돈이 되어서 팔려 나갈 때 쯤 이 되니 돼지 파동이
일어서 값은 똥값이 되었다 .
새끼돼지를 과수원에 파묻었네. 강물에 띄워 버렸네 .새끼가 서로 코를 꼬리를
뜯어 먹었네 .연일 매스컴은 절망적인 방송 보도였다 .
나는 종일 호수를 들고 돼지에게 물을 먹였다 .
한 끼 먹을 수 있는 사료를 하루 두 번 아 침 저녁 나누어 먹이며 물이라도 먹으면 굶어 죽지는 않겠지 .
사람 발짝 소리만 나면 돼지는 배고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고 .
이렇게 하다보니 3개월 반이면 출하를 하는 돼지가 6개월이 걸렸다 성장 속도가.
헌데 이게 왼일인가 ? 마구 잡이 도살을 하던 돼지가 숫적으로 너무 적어서 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
사료 한포대에 4800원하고 돼지는 한관에 300원해서 성돈이 될 때까지 한 마리가 먹는
사료값은 6만원돈이고 돼지는 7500원정도 하던 것이 점점 올라서 종당에는 돼지 한관에
8000원까지 받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생기고 말았다
우리는 돼지를 파니 그동안의 사료 값 축사 건축비등을 제하니 10만원이 남는 계산이 되었다 .
이듬해 다시 돼지 농사를 지어서 논을 500만원 주고 1000평을 장만하고 하다 보니 논이 5000여평을 장만 할수 있었다 .
그러는 사이 이곳에서 우리 남편은 성실한 사람으로 추대 받아서 부도 난 농협의
조합장을 4선 을 거처서 근 20년 가깝게 봉직하고 전국의 일등 조합으로 이루어 놓고
올봄에 퇴직해서 본연의 농부로 돌아 왔다 .
그동안 미를 전하는 화장품 외판원을 13년하고 성실하게 살다보니 아이들도 모두 성실한
젊은이로 잘 자라 주었다 .
가장 고마운 사람은 우리 어머니다 . 젊어서 시집살이를 시켜서 야속한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너무나 성실하고 근면한 어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우선 참는 것을 배운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지금은 내가 몸이 많이 불편해 활동을 제대로 못하니까 85세의 울 어머니 몸이 부서저라 며느리의 몫까지 하시느라 고생이시다,
좀 쉬시라면 외려 화내시며 죽으면 썩어질 육신을 살았다는 증거인데 왜 일을 못하게 하느냐고 하신다 .
그간 어머니의 도움으로 이만큼 입에 밥풀칠을 하고 살게 되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
이제 내 나이 60 , 정말 많이 산 것 같다 .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주체 할 수 없는 욕망에 괴로운 날도 많았으나 이제는 겸손하고
내가 받은 것만큼 봉사하면서 살줄을 알아야 겠다 .
한가지 나의 사는 방법중에 변한것은 마음이 많이 아플때면 노래를 계속 불렀는데 지금은
그때처럼 노래가 불러 지지 않는다 .
다시 이제는 파랑새처럼 즐거움을 노래하는 가곡 전령사가 되어야 겠다 .
인생은 즐거운거라고 참고 살으면 해피한 일도 있다고 .
지루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밤새 눈이 와서 온 세상을 하얗게 변하게 하였다.
오늘 내 나이 60의 생일 .
그제 일요일날 아이들이 미리 와서 이웃과 함께 미역국을 나누어 먹고
오늘 정작 내 생일날에는 시어머님과 우리 부부가 밥상을 받고 보니
참으로 쓸쓸하기 짝이 없다 .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하시면서
“ 네 친구들 불러서 화투라도 하고 놀 아 라 ” 하신다 .
마실 을 별로 안나가는 며느리가 쓸쓸해서 안돼 보이시나 보다.
“쓸쓸하긴요 뭐 괞찮아요”
그래도 어머니는 일찍이 경로당으로 마실 을 가셨다 .
청소와 설거지를 마치고 TV 앞에 앉으니 만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벌써 인생 60고개를 넘어서니 한숨도 나오고
지나간 세월도 함께 흐른다 .
과부 시어머니를 만나서 울고 웃으며 살은 세월,
참으로 야속해서 많은 눈물도 흘렸던 지난 세월이다
우리 어머니는 17세에 시집오셔서 19세에 아들 하나 낳으시고
21세에 홀로 되신 청상 과부이시다 .
칭칭 시하 어른들 밑에서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하신분이다 .
남이 홀로 되었다고 처다 볼까 길을 가셔도 고개 한번 눈 한번 번쩍
들고 다니지 않고 큰길을 비낀 뒷길로만 다니셨다 한다.
홀시어머니란 이유로 친정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랫말서 윗말로
시집을 오고 보니 그야말로 시어머니는 전형적인 과부 시어머니였다 .
앉으라면 서야 했고 서라면 앉아야 하는 어느것도 눈에 차지 않는 며느리 였다 .
친정에서는 손 귀한집의 맏딸로 손에 물 한번 안대보고 곱게 길러 고등 교육 시킨
신식 처녀였건만 .
우리 아버지는 개명을 하신 분이라 딸도 능력껏 살아야 한다고 큰딸의 능력을 크게
평가 하시어서 국회의사당이나 중앙청 또는 서울의 정부 주요 관청을 데리고 다니면서 견학을 시켜 주실만큼 사랑하고 기대가 크셨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배움의 허리가 짤렸지만 ...
게다가 업 친 데 덥 친 격으로 남편은 믿고 맡긴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
사업이 몽땅 망하는 지경이 되었다 .
궁색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 나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생활 이였다 .
아궁이에서 나무하고 솥에서 쌀농사 짙는 너무나 알뜰한 어머니를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
사람이 먹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리 아낄려면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나 하고 .
아침에 보리쌀에다 가운데 쌀 한 웅 쿰 얹으면 쌀밥은 시 할머니와 아기 주고
어머니와 나는 보리밥을 먹고 저녁이면 죽이나 국수 아님 감자나 고구마가 주식 이였다 .
악식을 먹어보지 않은 나는 고구마나 감자를 하나 먹으려면 김치 한 탕기에 물 한 대접을 먹어야 했다 .
목이 메어서 넘어가지 않아서 눈물 반 고구마 반으로 때를 때웠다
나는 차음에는 시집 식구들이 미개인 같았다 .어찌 저런 것으로 때를 외우나 하고 ...
식사를 제대로 못해 젖이 안 나와서 아기는 밤이면 많이 울었다 배가 고파서 .
쌀밥이 정히 먹고 싶으면 저녁에 친정집으로 나려 가면 아버지가 ,
“ 얘 밥 먹어 !
“먹었어요
“ 애에미가 제 그루 타냐? 먹어라 ”
나는 눈치 안채게 하려 해도 눈물을 삼키며 쌀밥을 먹고는 돌아 왔다 ,
밤 외출이 못 마땅한 시어머니의 눈총을 받으며 ,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절망에 빠저서 매일을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
옷이나 갈아입으려고 들어오면 우리 어머니는 귀한 아들은 뽀얀 쌀밥을 지어 주신다.
해서 우리 남편은 지금도 어머니와 아내가 그리 험한 음식을 먹고 산 줄을 모른다.
남편이 한달에 5일정도 집에 와서 잠을 자면 그 이틀 날 새벽부터 우리 어머니는
깨어지지 않는 것을 마당에 던지면서 욕 을 욕을 하신다.
며느리와 아들이 한방에서 있는것에 화가 나시고 또 사업 실패해 가난해 진것에 화나고 .
남편이 어쩌다 하루 집에 들어오면 언행이 매우 조심스러워 말씨도 줄게 되고
무뚝뚝한 아내로 변한 내게 애교 없다고 남편은 불만을 하였다 .
지나칠 만큼 효자인 아들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
처음 시집 올때 남편이 내게
“ 어머니가 이때 쓸쓸히 사셨는데 잠자기 전 에는 네 방으로 건너가지 말고 어머니와 함께 있으라는 ”말에 우리는 굴비 두름 역듯이 아이들과 함께 차례로 누워서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 일편 이편 어머니와 서로 나누어 보았다 .
우리 어머니는 공부는 안하셨지만 아주 똑똑하고 솜씨 좋으신 전형적인 양반가 아낙이시다
그러다 남편이 돌아와서 내 방으로 돌아오면 다음날은 영낙 없는 벌 받는 며느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 남편을 일찍 여윈 어머니가 이런 재미도 없이 살았으니 얼마나 불쌍한가?”
하고 동기 부여를 하니 야속함은 그리 모르고 참고 살수 있었다
마음에 없는 말씀만 하지 않으시면 살 것 같았다 .
나는 가계에 도움이 될까 해서 보약 행상을 시작했다 .남편 몰래,
허나 삼일 만에 남편에게 들켜서 뺨을 얻어맞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
남의 집에 문전걸식을 하느냐고 남편은 섧게도 울었다
허나 나는 도둑질 빼 놓고는 무엇이던 할수 있을 것 같았다 .
다행인 것은 나는 일어 설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
또 그 삶이 그리 비관적인 것은 아니였다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자기 체면을 열심히 걸고 살았다 .
약을 한재에 5500원에 받아서 7000원에 파는것 이였는데 이웃 사람들이
안 그럴 사람이 고생한다고 많이도 팔아 주었다 .
가을에 수금을 해서 계산을 하니 농협에 채무를 거의 변제 할수 있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그때 농협에 50여만원의 부채를 갖고 있었다.
지금 환율로 치면 1억원이 넘는 것이였다
이런 일은 남자는 자존심 상해서 할수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 했었다.
하늘도 노력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나 보다 ,우리는 그때 논이 780평 이였는데
농사를 지으면 남보다 마지기당 한가마 정도는 더 나왔다 .
고추 농사를 하면 평당 2근 정도 따서 남들보다 수확이 훨씬 많았다 .
빗을 치루고 남은 돈을 우리는 양돈을 시작했다 .
모돈 5마리에 애비 돈 한 마리를 먼 행주까지 가서 구입을 하였다 .
참 재미나는 일이였다 .새끼 돼지가 얼마나 예쁜지 나는 하루 종일 축사 안에서
생활 하다시피 했다 ,종일 축사 청소 ,새끼 돼지 예방 주사 놓고 ,새끼 유치 잘라주고,
우리 세 식구는 아침 5시에 일어나면 저녁 9시나 돼야만 방에 들어 갈수 있었다 .
허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 새끼가 성돈이 되어서 팔려 나갈 때 쯤 이 되니 돼지 파동이
일어서 값은 똥값이 되었다 .
새끼돼지를 과수원에 파묻었네. 강물에 띄워 버렸네 .새끼가 서로 코를 꼬리를
뜯어 먹었네 .연일 매스컴은 절망적인 방송 보도였다 .
나는 종일 호수를 들고 돼지에게 물을 먹였다 .
한 끼 먹을 수 있는 사료를 하루 두 번 아 침 저녁 나누어 먹이며 물이라도 먹으면 굶어 죽지는 않겠지 .
사람 발짝 소리만 나면 돼지는 배고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고 .
이렇게 하다보니 3개월 반이면 출하를 하는 돼지가 6개월이 걸렸다 성장 속도가.
헌데 이게 왼일인가 ? 마구 잡이 도살을 하던 돼지가 숫적으로 너무 적어서 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
사료 한포대에 4800원하고 돼지는 한관에 300원해서 성돈이 될 때까지 한 마리가 먹는
사료값은 6만원돈이고 돼지는 7500원정도 하던 것이 점점 올라서 종당에는 돼지 한관에
8000원까지 받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생기고 말았다
우리는 돼지를 파니 그동안의 사료 값 축사 건축비등을 제하니 10만원이 남는 계산이 되었다 .
이듬해 다시 돼지 농사를 지어서 논을 500만원 주고 1000평을 장만하고 하다 보니 논이 5000여평을 장만 할수 있었다 .
그러는 사이 이곳에서 우리 남편은 성실한 사람으로 추대 받아서 부도 난 농협의
조합장을 4선 을 거처서 근 20년 가깝게 봉직하고 전국의 일등 조합으로 이루어 놓고
올봄에 퇴직해서 본연의 농부로 돌아 왔다 .
그동안 미를 전하는 화장품 외판원을 13년하고 성실하게 살다보니 아이들도 모두 성실한
젊은이로 잘 자라 주었다 .
가장 고마운 사람은 우리 어머니다 . 젊어서 시집살이를 시켜서 야속한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너무나 성실하고 근면한 어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우선 참는 것을 배운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지금은 내가 몸이 많이 불편해 활동을 제대로 못하니까 85세의 울 어머니 몸이 부서저라 며느리의 몫까지 하시느라 고생이시다,
좀 쉬시라면 외려 화내시며 죽으면 썩어질 육신을 살았다는 증거인데 왜 일을 못하게 하느냐고 하신다 .
그간 어머니의 도움으로 이만큼 입에 밥풀칠을 하고 살게 되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
이제 내 나이 60 , 정말 많이 산 것 같다 .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주체 할 수 없는 욕망에 괴로운 날도 많았으나 이제는 겸손하고
내가 받은 것만큼 봉사하면서 살줄을 알아야 겠다 .
한가지 나의 사는 방법중에 변한것은 마음이 많이 아플때면 노래를 계속 불렀는데 지금은
그때처럼 노래가 불러 지지 않는다 .
다시 이제는 파랑새처럼 즐거움을 노래하는 가곡 전령사가 되어야 겠다 .
인생은 즐거운거라고 참고 살으면 해피한 일도 있다고 .
지루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