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 이야기> 민족 애환의 꽃 '봉선화'
<우표 이야기> 민족 애환의 꽃 '봉선화' -옮긴글 (경향 뉴스 메이커 2005. 11. 8.) -
가곡 '봉선화'의 노랫말은 '울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된다. '울밑'은 '울타리 밑'의 준말이다. 지금은 도시의 주거 형태가 아파트거나 독립 가옥이어서 좀처럼 울타리를 볼 수가 없다. 지난 날 일제 강점기만 해도 우리네 앞마당이나 뜰에는 울타리가 엮여 있었다.
울타리 밑에는 영락없이 빨간 봉선화가 7월의 햇살 아래 더욱 상기되어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봉선화로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 뽐내던 시절이었다. 민족의 애환을 노래했던 우리 나라 최초의 가곡 '봉선화'는 1920년 홍난파가 '애수'라는 바아올린 곡을 작곡했는데 여기에다 김형준이 노랫말을 붙여서 만든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가곡의 으뜸 가곡에 작곡가 김동진 씨의 '가고파'(이은상 시)가 뽑힌 적이 있다. 성악가 엄정행이 부른 '가고파'보다 '봉선화'가 상대적으로 방송을 타는 기회가 적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봉선화'는 민족 애환을 함께 물들이던 대표적 가곡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싶다.
홍난파를 친일명단에 넣어 매도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국민가수로 불리는 이미자와 조용필이 평양에서 한결같이 '봉선화'를 열창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1965년 1월부터 우리 나라 꽃들을 우표로 발행하면서 7월의 꽃으로 봉선화를 디자인에 담았다.
글 여해룡 (시인. 칼럼리스트) yhur4@hanmail.net
가곡 '봉선화'의 노랫말은 '울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된다. '울밑'은 '울타리 밑'의 준말이다. 지금은 도시의 주거 형태가 아파트거나 독립 가옥이어서 좀처럼 울타리를 볼 수가 없다. 지난 날 일제 강점기만 해도 우리네 앞마당이나 뜰에는 울타리가 엮여 있었다.
울타리 밑에는 영락없이 빨간 봉선화가 7월의 햇살 아래 더욱 상기되어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봉선화로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 뽐내던 시절이었다. 민족의 애환을 노래했던 우리 나라 최초의 가곡 '봉선화'는 1920년 홍난파가 '애수'라는 바아올린 곡을 작곡했는데 여기에다 김형준이 노랫말을 붙여서 만든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가곡의 으뜸 가곡에 작곡가 김동진 씨의 '가고파'(이은상 시)가 뽑힌 적이 있다. 성악가 엄정행이 부른 '가고파'보다 '봉선화'가 상대적으로 방송을 타는 기회가 적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봉선화'는 민족 애환을 함께 물들이던 대표적 가곡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싶다.
홍난파를 친일명단에 넣어 매도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국민가수로 불리는 이미자와 조용필이 평양에서 한결같이 '봉선화'를 열창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1965년 1월부터 우리 나라 꽃들을 우표로 발행하면서 7월의 꽃으로 봉선화를 디자인에 담았다.
글 여해룡 (시인. 칼럼리스트) yhur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