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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계절

도월화 0 1147

녹색의 계절 / 도월화

7월 초입. 한 해의 반이 뚝 떨어져 나갔다. 시간이 탐욕스런 입맛을 다시며 황급히 사라져간다. 장마 비가 내리는 산야는 푸를 대로 푸르렀다. 깊어진 녹음의 밑바닥에는 차디찬 겨울이 숨어 있을까. 진한 녹색이 주는 시원함에 눅눅한 우울을 날린다. 산은 검푸른 숲이 우거지고, 들에는 벼와 채소들이 쑥쑥 자라난다. 바람이 불면 초록빛 논이 넘실대고, 키 큰 옥수수 밭이 한꺼번에 휘어져 우-, 하고 파도친다.

녹색의 계절이다. 교외로 나가보면 어디에나 녹색이다. 지난겨울을 견디어낸 산천이 베푸는 향연인가.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 속에서 생명수를 길어 올려, 하늘에 닿을 듯 꼭대기의 가지에까지 움을 틔워 녹색 물결을 이룬다. 연록의 새순이 초록으로 짙어지고 녹색의 바다는 점점 깊어져 간다. 그 속에 내 마음을 담가 깨끗이 하고 싶다. 영혼까지 적셔내어 손으로 꽉 짜주면 푸른 물이 뚝뚝 흐를 것 같고 정화시켜 줄 것만 같다.

춘천으로 이사한지 몇 년 되지만, 아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서 자연스레 두 집 살림이 되었다. 주로 어른들의 짐은 시골에, 아이들 책과 옷은 서울 집에 두고 있다. 온 가족이 서울에 머물 때는 남편도 서울 집으로 퇴근을 하게 된다. 식구가 흩어져서 불편한 반면에 좋은 점도 있다. 나와 남편은 주말이면 경춘가도를 오르내리며 사계절을 음미하는 맛에 산다.

차창 밖으로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었을 때는 녹색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하얀색이 아닐까 싶었다. 흰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반기는 아씨들이여, 누구를 반기는가. 아카시아 향기. 초록 들판을 수놓는 하얀 클로버 꽃은 또 얼마나 평화로운가.

녹색과 빨강의 조화도 빼놓을 수 없다. 여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혼자 말처럼 초록색 꽃은 왜 없을까, 하셨다. 나는 무심결에 잎이 녹색이니까요, 라고 했더니,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점점이 붉은 줄 장미와 녹색의 대조적인 배합은 녹의홍상과도 같이 화사하다.

언젠가 차가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변을 지날 때 보았던 한 송이 보랏빛 붓꽃의 아련한 정감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강물에 갓 목욕을 하고, 연보라색 날개옷을 입고 파아란 풀밭에 살포시 앉았는가. 녹색만큼 어느 색에나 어울리고, 다른 색을 살려서 돋보이게 해주는 색깔도 없지 않을까. 녹색은 생명체에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마음의 불순물을 걸러내어 지친 영혼의 쉼터가 되어주기 때문일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것이 푸른 자연이런가. 한창 때 나는 짙푸른 녹음의 위용에 질려 숨차했던 적이 있다. 요즘은 녹색과 화해했다고나 할까. 언젠가는 저 푸른빛도 창백해져 갈 것이 아닌가. 모든 사라져 가는 것은 인간과 같은 운명이다. 그래서 더욱 녹색에 취한다고 할까.

녹색에 취하여 하루를 보낸 날은 저녁에 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면 초록빛 들판이 아른거린다. 한 때 내 친구의 남편은 눈이 아파서 안과 병원에 다녔는데, 의사의 처방이 녹색을 많이 보아야 낫는 병이라 했다던가. 얼마 전 여의도의 상가를 새로 재개발한 어느 고층 아파트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 몇 십 층인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육 칠 십 여 평되는 최고급 인테리어 디자인의 새 아파트에서 함께 놀러 간 일행들은 감탄하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녹색의 풍광에 맛들인 나는 친지의 새집이 좋기는 해도 이보다 광활하고 무궁무진한 곳이 있는데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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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시골의 할아버지 댁에서 자란 나는 도시에서 자란 내 동생들보다 더 전원생활에 향수를 느끼는 듯하다. 그런 탓인지, 이제는 춘천 생활을 쉽게 그만 두지 못 할 것 같다. 서울의 공기는 가끔 마셔야지, 시골 생각나서 계속 머물기는 힘 든다. 이렇듯 녹색과 친해져서 요즘은 서울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끼리 집 근처의 산자락을 거닐 곤 한다.

발걸음마다 부드럽게 스러지는 풀밭의 감촉과 바람에 실려오는 풀 향기가 좋다. 작은 계곡에서 자리를 편 후에, 준비해간 음식을 먹고, 하늘을 지붕 삼아 누워서 쉬기도 한다. 무수한 잎새들은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햇빛을 받는 위치에 따라 빛깔이 다르다. 맨 위의 하늘 가까이 있는 잎사귀는 밝은 초록으로 반짝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녹색의 음영이 짙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사소한 어려움에도 어두워지곤 하는 내 마음의 빛과 그림자를 성찰해보게 된다.

나는 '영혼의 빛깔'은 푸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졸고를 써본 적이 있다. 녹색은 생명의 빛깔이라고들 한다. 겨우내 빛을 잃고 움츠렸던 생명이 파랗게 되살아나는 색이 아닌가. 움트는 잎새의 여린 숨결이 가만가만 기어 나와 파릇파릇 튀어 오르는 것이 연록색이라면, 기승을 부리며 거칠어지는 것이 여름 숲의 짙어질 대로 짙은 녹색이 아니겠는가. 영혼의 빛깔은 푸르고 생명의 색이 녹색이라면 마음의 색깔은 흰색이었으면 한다. 영혼의 속살이 투명하게 비치는 새하얀 마음. 세월에 떠밀리어 탁해질수록 끊임없는 숨고르기를 통해 다시 티 없는 하얀색을 찾고 싶다. 순수하게 살기 위해 이 녹색의 계절에 펼쳐지는 초록 물결에 내 마음을 담그고 싶다. (2005. 7. ) http://ssopia7.kll.co.kr

* 창작수필(2006. 봄 호) 게재 ☞ 도월화 내책소개바로가기~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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