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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를 하면서

정덕기 6 1015
저의 유학시절에 쓴 시 한편을 올립니다
어제 음악회를 마치고 반주자님도 독일로 떠나는 마당에 옛날 생각을 하면서 함께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도배를 하면서

정 덕 기

서른 해를 너머 살아오면서
세상천지에 처음 도배를 한다.
내 땅에서도 하지 않던 짓을
독일 땅에서 하자니
그 또한 신나는 일이라
연신 콧노래를 흥얼대며 풀칠을 한다.
방은 몇 해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는지
비가 새어 썩고 바랜 자욱과
싸아한 곰팡이 냄새만이 가득하다.
낡고 썩은 壁紙를 쭈욱 뜯어내니
흰 횟가루가 내 머리위에 떨어지는구나.
횟가루가 등천을 하는 방구석에서
새 벽지를 알맞은 크기로 자른다.
잘 붙도록 몇 겹이고 풀칠을 한다.
이제 虛한 겨울밭에 벽지를 바를 차례구나.
점 점 곰팡이 짙은 헌 壁이 사라진다.
점 점 눈밭같은 새 壁이 몰려온다.
누가 나의 썩은 벽을 걷어내 줄 것인가.
누가 나를 눈부시게 맑은 벽지로 도배해 줄 것인가.
덧없는 망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이제 들었던 저녁노을을 내려놓으니
아, 방이 너무 깨끗하구나.

이제 새 사람이 들어와 살겠구나.

1988년 겨울
6 Comments
김경선 2006.09.29 12:04  
  이름 모르는 남을 위한 도배,
맞아요, 독일에서는 이사를 나올 때
다음 사람을 위하여 집단장을 해놓고
관리인에게 검열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남편과 친구들이 수고했었지요.
장미숙 2006.09.29 18:58  
  *누가 나의 썩은 벽을 걷어내 줄 것인가.. *
새 것을 입히기 전에 곰팡이 슬은 헌 것을 깨끗하게 걷어내야 하는 것을..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한 쪽 가슴에서 쿵!소리가 납니다~
김형준 2006.09.30 00:14  
  거의 20년 전 추억이 담긴 글이네요.
시의 내용상으로는
들어가 사시기 위해 도배를 한 듯 싶습니다.

삶은 때론 때를 벗기기도 하고,
때를 묻히기도 하면서 이어져 가는 것이겠지요.

매일, 매월 도배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매 순간 마음의 도배를 하기도 힘들겠지요.
허나 "때론" 껍질을 벗기고 다시 입히는 과정 속에서
보다 정화된 새로운 삶이 시작되겠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고광덕 2006.10.01 08:47  
  요즘엔 제마음을 가곡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은 듣는 가곡으로,
이제는 부르는 가곡으로...
뭐든 보고 즐기는 것보단 직접 하면서 즐기는 성격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중에서
가곡 부르는 멋을 체득한거죠.
직접 해보는 도배로 곰팡이 냄새나던 헌 벽이 하나씩
 새 벽으로 바뀌면 역시 나만의 즐거움이 남다르죠.
좋은 글 읽었습니다.
해야로비 2006.10.04 12:47  
  곰팡내 나고, 냄새나는 헌 벽을...완전히 뜯어 내지 못하고, 그 위에 덧바르고 있었던 내 자신...
뜯어내지 않아...언제나, 틈만 나면...살포시 비집고 나오는 곰팡내...
내속의 헌속내도...이렇게 삐죽 삐죽 삐지고 나옵니다.
나의 썩은 벽은...나만이 걷어낼 수 있어도 걷어내는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봅니다.
정덕기 2006.10.08 17:49  
  김경선원장님 장미숙님 김형준님 고광덕님 해야로비님 고맙습니다
저는 원래 무신론자였습니다 가끔 교회에도 절에도 나가 지휘도 하였지만 믿음이 있어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지휘 하고픈 마음에 나간 것 뿐이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저의 신앙고백 같은 것입니다. 독일 간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그러니까 제대로 믿기로 작정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우연히도 생전 처음 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목사님을 초빙하였는데 우리 한인교회가 열악하여 사택을 얻어드릴 돈이 없어서 독일목사님이 10년간 비워둔 어떤 사택 공간을 우리에게 거저 주셔서 그 공간을 약 일주일 가량 곰팡이를 제거하고 도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곰팡이를 제거하고 도배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 나의 가슴을 짓눌렸습니다.
그 후에 그 집은 당연히 새 목사님이 들어가 사셨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썩은 나의 집에 눈부시게 깨끗하게 도배를 하여 예수님께서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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