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금강산]은 이제 그만 듣고 불렀으면
흔히, 한국가곡의 모태라고 하는 홍난파의 [봉선화]에 대해 저는 이런 저런 기회를 통해 여러 번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박을 한 분이 아직 없는 걸로 보아 저의 비판적인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서도 저의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졸저 [가곡작곡법-동진음악출판사]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는데, 옥에 티가 있는 명가곡이라고 [봉선화]에 비하면 무척 완곡하게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에 대한 저의 비판적인 생각은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가곡의 가장 큰 옥에 티는 가사 처리입니다.
가락과 가사의 강세와 장단이 완전히 따로따로 놀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그리운 만 이 천 봉'입니다.
'그리운/만 이 천 봉'이
'그리운만/이 천 봉'처럼 가사 처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곡은 음악적인 토속성이 전혀 없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음악적으로 제대로 표현하려면 금강산이 소재하고 있는 북강원도의 민속적인 음악 요소가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요소가 전혀 없이 서양의 전형적인 장조 7음 음계를 소재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사만 빼면 서양 노래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쇼팽의 마주루카를 비롯하여 로드리고의 그 유명한 [아랑훼즈 기타 협주곡]이 모두 그 나라, 그 지방의 향토적인 음악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음악들은 가사가 없는 기악곡이지만, 폴란드적이고 스페인적입니다.
물론, 요즘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동서양을 굳이 따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음악 그 자체만 좋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운 금강산이 서양음악적으로는 과연 훌륭한 가곡 작품이냐?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가곡은 가곡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장스럽고, 드라마틱합니다.
극적인 오페라 아리아 같습니다.
그래서 피아노 반주에는 잘 어울리지 않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더 잘 어울립니다.
원래, 제대로 된 예술가곡은 피아노 반주로 해야 제 맛이 납니다.
그 유명한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나 [물 위에서 노래함]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하면 음악적 맛이 오히려 떨어집니다.
지성이나 인품이 없는 사람이 화려한 외모로 눈길을 끌듯이, 허술한 가곡일수록 화려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더 잘 맞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원래 독립된 하나의 가곡으로 작곡된 게 아니라,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에 삽입된 곡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단아한 피아노 반주에는 잘 맞지 않은 가곡일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리운 금강산이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될 때,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오히려 마음에 안 듭니다.
섬세하게 빼어난 금강산 분위기가 아니라 장엄한 지리산이나 백두산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리산이나 백두산보다는 험준한 알프스산 분위기에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노래는 원래 이념을 초월한 예술가곡으로 작곡된 게 아니라 반공을 주제로 한 가곡으로 작곡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인지 언제인지, 남북 회담을 계기로 가사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긴 했지만, 내용을 잘 살펴보면 반공주의적인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 가곡이 본격적으로 애창,애청곡이 된 데에는 1970년대 당시 정부 힘이 무척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무튼 한국 현대 가곡 중 최고의 히트곡 그리운 금강산은 작곡자 최영섭 선생에게 경제적으로 최고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영섭 선생님 자신도 저처럼 이 가곡을 최고의 명가곡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최영섭 선생님은 자신의 가곡 작품들 중에서 [추억-조병화 詩]을 좋은 가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을
언젠가 하셨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도 [추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최영섭 선생의 추억은 김성태 선생의 추억과 전혀 다른 형태의 가곡입니다.
음악적으로 조금 복잡합니다.
가락에 불편한 증2도 음정이 여러 번 나오고, 기본적으로는 단조의 노래인데, 조성감이 확실한 전형적인 단조가 아닙니다.
그러나 작곡자의 독창성과, 한국적 전통성과 서양적 현대성의 조화가 돋보입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작곡을 하면 대중들한테는 크게 인기를 끌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곡 전공자 입장에서 보면, 최영섭 선생의 추억은 그리운 금강산보다 훨씬 더 좋은 가곡입니다.
최영섭 선생님은 [그리운 금강산]보다는 [추억]이 더 히트되기를 기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내 마음의 노래 ]회원 분들이라도 그리운 금강산보다는 추억에 좀더 관심과 사랑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운 금강산 같은 가곡이 명가곡으로 대접받고 있는 현재의 우리 음악 현실은 사실 정상이 아닙니다.
저도 대학시절에는 그리운 금강산을 꽤 좋아했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좀더 깊고 넓게 공부면서 명가곡의 실체에 대해 조금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음악의 높은 경지에 아직도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이 더 이상 절절하게 불려질 이유가 없을 때는 바로 통일이 되었을 때이겠지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박을 한 분이 아직 없는 걸로 보아 저의 비판적인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서도 저의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졸저 [가곡작곡법-동진음악출판사]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는데, 옥에 티가 있는 명가곡이라고 [봉선화]에 비하면 무척 완곡하게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에 대한 저의 비판적인 생각은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가곡의 가장 큰 옥에 티는 가사 처리입니다.
가락과 가사의 강세와 장단이 완전히 따로따로 놀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그리운 만 이 천 봉'입니다.
'그리운/만 이 천 봉'이
'그리운만/이 천 봉'처럼 가사 처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곡은 음악적인 토속성이 전혀 없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음악적으로 제대로 표현하려면 금강산이 소재하고 있는 북강원도의 민속적인 음악 요소가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요소가 전혀 없이 서양의 전형적인 장조 7음 음계를 소재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사만 빼면 서양 노래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쇼팽의 마주루카를 비롯하여 로드리고의 그 유명한 [아랑훼즈 기타 협주곡]이 모두 그 나라, 그 지방의 향토적인 음악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음악들은 가사가 없는 기악곡이지만, 폴란드적이고 스페인적입니다.
물론, 요즘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동서양을 굳이 따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음악 그 자체만 좋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운 금강산이 서양음악적으로는 과연 훌륭한 가곡 작품이냐?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가곡은 가곡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장스럽고, 드라마틱합니다.
극적인 오페라 아리아 같습니다.
그래서 피아노 반주에는 잘 어울리지 않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더 잘 어울립니다.
원래, 제대로 된 예술가곡은 피아노 반주로 해야 제 맛이 납니다.
그 유명한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나 [물 위에서 노래함]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하면 음악적 맛이 오히려 떨어집니다.
지성이나 인품이 없는 사람이 화려한 외모로 눈길을 끌듯이, 허술한 가곡일수록 화려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더 잘 맞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원래 독립된 하나의 가곡으로 작곡된 게 아니라,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에 삽입된 곡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단아한 피아노 반주에는 잘 맞지 않은 가곡일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리운 금강산이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될 때,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오히려 마음에 안 듭니다.
섬세하게 빼어난 금강산 분위기가 아니라 장엄한 지리산이나 백두산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리산이나 백두산보다는 험준한 알프스산 분위기에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노래는 원래 이념을 초월한 예술가곡으로 작곡된 게 아니라 반공을 주제로 한 가곡으로 작곡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인지 언제인지, 남북 회담을 계기로 가사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긴 했지만, 내용을 잘 살펴보면 반공주의적인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 가곡이 본격적으로 애창,애청곡이 된 데에는 1970년대 당시 정부 힘이 무척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무튼 한국 현대 가곡 중 최고의 히트곡 그리운 금강산은 작곡자 최영섭 선생에게 경제적으로 최고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영섭 선생님 자신도 저처럼 이 가곡을 최고의 명가곡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최영섭 선생님은 자신의 가곡 작품들 중에서 [추억-조병화 詩]을 좋은 가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을
언젠가 하셨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도 [추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최영섭 선생의 추억은 김성태 선생의 추억과 전혀 다른 형태의 가곡입니다.
음악적으로 조금 복잡합니다.
가락에 불편한 증2도 음정이 여러 번 나오고, 기본적으로는 단조의 노래인데, 조성감이 확실한 전형적인 단조가 아닙니다.
그러나 작곡자의 독창성과, 한국적 전통성과 서양적 현대성의 조화가 돋보입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작곡을 하면 대중들한테는 크게 인기를 끌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곡 전공자 입장에서 보면, 최영섭 선생의 추억은 그리운 금강산보다 훨씬 더 좋은 가곡입니다.
최영섭 선생님은 [그리운 금강산]보다는 [추억]이 더 히트되기를 기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내 마음의 노래 ]회원 분들이라도 그리운 금강산보다는 추억에 좀더 관심과 사랑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운 금강산 같은 가곡이 명가곡으로 대접받고 있는 현재의 우리 음악 현실은 사실 정상이 아닙니다.
저도 대학시절에는 그리운 금강산을 꽤 좋아했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좀더 깊고 넓게 공부면서 명가곡의 실체에 대해 조금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음악의 높은 경지에 아직도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이 더 이상 절절하게 불려질 이유가 없을 때는 바로 통일이 되었을 때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