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어머니의 기일을 앞두고
그날 내가 왜 한복을 입었을까? 집에 있는 자투리 천으로 한복 한 벌을 만들었는데 왜 내가 입어보았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누워계시던 엄마가 어눌한 말씨로 '이쁘구나' 하셨고 나는 내친 김에 큰 절을 해보였다. 다음날 아침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가뿐 숨을 몰아쉬다가 얼마 후 조용히 숨쉬기를 멈추셨다. 누워계신지 두 해째 봄 3월 27일이었다.
병석에 있는 사람에게 절을 하다니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예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마지막 인사를 드린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애간장이 끊어질 듯 슬프다는 표현을 실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괴롭게 몰아쉬던 숨이 멈추고 일순 찾아온 적막의 순간, 엄마의 얼굴은 아주 평온하고 깨끗하여 신산스럽던 주름도 다 펴지고 차라리 곱기까지 했다.
죽음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남아있는 가족들의 애통함은 극에 달해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데 엄마는 모르는 척 눈을 꾹 감고 아랑곳하지 않는 품이 무심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그날 밤 하얀 양말을 신고 있는 엄마의 발을 만져보았다. 이미 경직이 되어 딱딱한 발은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놀랄만큼 찬 기운이 전해져 왔다. 보통 생명이 없는 물체들, 가령 돌이나 나무들은 만지고 있으면 내 손의 온기로 조금 따뜻해지는데 엄마의 찬 발은 내 손을 오히려 시리게 했다.
나는 또 한 번 죽음을 실감하며 울었다.
엄마가 영영 집을 떠나던 날은 3월 하순치고 쌀쌀한 날씨에 하늘까지 흐렸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화장을 원하던 아버지의 뜻대로 엄마도 홍제동 화장장으로 향했다. 지금은 주택지가 되어버린 그 홍제동을 지나칠 때마다 어김없이 그날 생각이 나곤 한다.
관은 무정하고 거침없이 화구 안으로 들어가고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터져나오는 슬픔은 울음이라기보다 그저 온몸이 녹아내려 진액이 쏟아지는 것 같은 물리적 현상처럼 느껴졌다.
그후로 나는, 가끔 나도 그렇게 불에 타 한 줌 재로 강이나 산야에 뿌려지리라 싶어 상상을 많이 해보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살아서 어떻게 죽음을 체험한단 말인가. 그래서 생과 사는 그리도 가까운가 하면 또한 그렇게 먼 것이 아닐까.
스물 셋의 나이, 그 젊음은 슬픔으로도 가릴 수 없었던지 누군가 나를 보고 상복입은 모습이 이쁘다 했고 나는 허기가 져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문득 누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고개를 들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사촌오빠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제야 내가 지금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할 상주라는 데 생각이 미쳐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홍제동 화장장에서 진액처럼 쏟아내던 슬픔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처럼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고개를 들 수 없을만큼 부끄러웠다.
그리 오랜 기간의 와병은 아니라 해도 삼년 가까이 누워계셨고 소생할 가망이 없던 엄마의 병 때문이었을까, 혈기왕성한 젊음 탓이었을까, 어떤 이유로도 그 식욕을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 일은 그 후로도 생각날 때마다 내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우리 엄마는 딸이 그렇게 밥을 잘 먹는 걸 아시고 서운해 하셨을까 모르겠다. 아마 그 사람좋은 웃음을 여전히 웃으셨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는 내가 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가 멀어서 부지런을 떨어야만 지각을 면하는데 나는 태평하게 밥을 옴싹옴싹 떠먹고 있기 일쑤였다. 밖에서는 이웃 집 아이가 '학교 가자'고 소리쳐대도 밥그릇의 밥을 다 먹어야 일어났다고 한다.
'고만 먹고 가라. 학교 늦겠다' 보다못해 엄마가 채근을 하시면 '맛있는데 어떡해' 해서 그만 웃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두고두고 하셨었다.
다른 형제들이 마른 체형임에 비해 통통했던 내가 밥 잘먹어 그렇다고 좋아하셨으니 당신 떠났다고 딸이 밥도 못 먹기를 바라지는 않으셨을 것이라고 혼자 합리화를 시켜보기도 했던 것 같다.
엄마 떠나시고 비록 밥맛을 잃지 않은 우스운 딸이었지만 나는 늘 엄마를 생각하며 혼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것은 엄마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 여자로서 행복하지 못했던 엄마의 일생을 되짚어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씻을 수 없는 회한은 당연히 뒤따라와 좋아하시던 초밥을 한 번 밖에 못 사드린 일 하며 눈물 많은 엄마는 싫다고 왈순아지매처럼 좀 씩씩하면 안되겠냐고 들이대던 일 모두, 두고두고 가슴 아팠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은 언제나 몸살끼처럼 으슬으슬 춥고 어수선하다. 주위에서 오래 앓던 분들이 우리 엄마처럼 3월에 떠나시는 것을 종종 보았다. 3월은 그래서 봄이 온다고 기쁘기만 한 계절이 아닌 듯 하다.
어머니 떠나신 지 오래 되어 자주 잊고 살지만, 아니 잊고 사는 줄만 알았어도 살면서 새록새록 문득문득 생각나는 이런 저런 어머니의 모습, 습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의 언저리를 늘 맴도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기억으로 존재하며 죽음도 삶에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3월, 오래 전 그날을 생각하는 시간은 여전히 코끝이 매워지는 순간이다. 3월의 쌀쌀한 바람처럼 안으로 파고 드는 슬픔이다.
누워계시던 엄마가 어눌한 말씨로 '이쁘구나' 하셨고 나는 내친 김에 큰 절을 해보였다. 다음날 아침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가뿐 숨을 몰아쉬다가 얼마 후 조용히 숨쉬기를 멈추셨다. 누워계신지 두 해째 봄 3월 27일이었다.
병석에 있는 사람에게 절을 하다니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예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마지막 인사를 드린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애간장이 끊어질 듯 슬프다는 표현을 실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괴롭게 몰아쉬던 숨이 멈추고 일순 찾아온 적막의 순간, 엄마의 얼굴은 아주 평온하고 깨끗하여 신산스럽던 주름도 다 펴지고 차라리 곱기까지 했다.
죽음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남아있는 가족들의 애통함은 극에 달해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데 엄마는 모르는 척 눈을 꾹 감고 아랑곳하지 않는 품이 무심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그날 밤 하얀 양말을 신고 있는 엄마의 발을 만져보았다. 이미 경직이 되어 딱딱한 발은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놀랄만큼 찬 기운이 전해져 왔다. 보통 생명이 없는 물체들, 가령 돌이나 나무들은 만지고 있으면 내 손의 온기로 조금 따뜻해지는데 엄마의 찬 발은 내 손을 오히려 시리게 했다.
나는 또 한 번 죽음을 실감하며 울었다.
엄마가 영영 집을 떠나던 날은 3월 하순치고 쌀쌀한 날씨에 하늘까지 흐렸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화장을 원하던 아버지의 뜻대로 엄마도 홍제동 화장장으로 향했다. 지금은 주택지가 되어버린 그 홍제동을 지나칠 때마다 어김없이 그날 생각이 나곤 한다.
관은 무정하고 거침없이 화구 안으로 들어가고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터져나오는 슬픔은 울음이라기보다 그저 온몸이 녹아내려 진액이 쏟아지는 것 같은 물리적 현상처럼 느껴졌다.
그후로 나는, 가끔 나도 그렇게 불에 타 한 줌 재로 강이나 산야에 뿌려지리라 싶어 상상을 많이 해보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살아서 어떻게 죽음을 체험한단 말인가. 그래서 생과 사는 그리도 가까운가 하면 또한 그렇게 먼 것이 아닐까.
스물 셋의 나이, 그 젊음은 슬픔으로도 가릴 수 없었던지 누군가 나를 보고 상복입은 모습이 이쁘다 했고 나는 허기가 져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문득 누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 고개를 들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사촌오빠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제야 내가 지금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할 상주라는 데 생각이 미쳐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홍제동 화장장에서 진액처럼 쏟아내던 슬픔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처럼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고개를 들 수 없을만큼 부끄러웠다.
그리 오랜 기간의 와병은 아니라 해도 삼년 가까이 누워계셨고 소생할 가망이 없던 엄마의 병 때문이었을까, 혈기왕성한 젊음 탓이었을까, 어떤 이유로도 그 식욕을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 일은 그 후로도 생각날 때마다 내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우리 엄마는 딸이 그렇게 밥을 잘 먹는 걸 아시고 서운해 하셨을까 모르겠다. 아마 그 사람좋은 웃음을 여전히 웃으셨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는 내가 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가 멀어서 부지런을 떨어야만 지각을 면하는데 나는 태평하게 밥을 옴싹옴싹 떠먹고 있기 일쑤였다. 밖에서는 이웃 집 아이가 '학교 가자'고 소리쳐대도 밥그릇의 밥을 다 먹어야 일어났다고 한다.
'고만 먹고 가라. 학교 늦겠다' 보다못해 엄마가 채근을 하시면 '맛있는데 어떡해' 해서 그만 웃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두고두고 하셨었다.
다른 형제들이 마른 체형임에 비해 통통했던 내가 밥 잘먹어 그렇다고 좋아하셨으니 당신 떠났다고 딸이 밥도 못 먹기를 바라지는 않으셨을 것이라고 혼자 합리화를 시켜보기도 했던 것 같다.
엄마 떠나시고 비록 밥맛을 잃지 않은 우스운 딸이었지만 나는 늘 엄마를 생각하며 혼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것은 엄마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 여자로서 행복하지 못했던 엄마의 일생을 되짚어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씻을 수 없는 회한은 당연히 뒤따라와 좋아하시던 초밥을 한 번 밖에 못 사드린 일 하며 눈물 많은 엄마는 싫다고 왈순아지매처럼 좀 씩씩하면 안되겠냐고 들이대던 일 모두, 두고두고 가슴 아팠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은 언제나 몸살끼처럼 으슬으슬 춥고 어수선하다. 주위에서 오래 앓던 분들이 우리 엄마처럼 3월에 떠나시는 것을 종종 보았다. 3월은 그래서 봄이 온다고 기쁘기만 한 계절이 아닌 듯 하다.
어머니 떠나신 지 오래 되어 자주 잊고 살지만, 아니 잊고 사는 줄만 알았어도 살면서 새록새록 문득문득 생각나는 이런 저런 어머니의 모습, 습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의 언저리를 늘 맴도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기억으로 존재하며 죽음도 삶에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3월, 오래 전 그날을 생각하는 시간은 여전히 코끝이 매워지는 순간이다. 3월의 쌀쌀한 바람처럼 안으로 파고 드는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