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정신을 죽음 문턱까지 지키다 가신 음악의 명인
바리톤 윤치호님이 2007년 6월 5일 다음 세상으로 가셨다.
칠순의 연세이셨다. 가시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암과 투병하다가 아마 합병증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언젠가 잠시 윤선생님께 배운 기억이 난다. 2, 3년 전의 일이다.
대단히 귀가 좋으셔서 섬세한 부분까지 잘 지도를 해 주셨다.
그 당시에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일하지 않으면 죽어.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도 하고,
이렇게 노래도 가르치고 해야 난 살 맛이 난단 말이야!'
정말 그러한 말씀을 마지막까지 실천하고 가셨다.
어제 어느 가곡 동호회 모임에서 윤선생님이 가르치시던
성악 수업의 반장을 맡으셨던 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네, 잘 지냈습니다.'
'저... 윤치호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네요?'
그분은 그 질문에 금방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가 잘
못 들어서 그런가 하고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쉬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머슥해 져서 다시 묻기가 어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물었다.
'윤치호선생님 언제까지 강의를 하셨어요?'
이 말에 그분의 눈은 금방 슬픈 기색을 띤다. '괜히 물었나'
하고 생각하자니 입이 떨어진다.
'5월22일까지요.'
이렇게 짤막한 한 마디를 뱉었다. 그 말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 보다. 항암제 주사를 맞고, 화학 치료를 하느라
가발을 쓰고 다니시던 윤치호선생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살이 다 빠져서 너무 보기가 안 되었던 윤선생님의 모습.
그 분이 암에 걸리시고 난 뒤 그분 수업을 청강하기 위해
갔을 때 보았던 그분의 모습이 내 맘에 강렬히 꽂혔였다.
'왜 저렇게 아프신데 아직도 강의를 하고 계시는 걸까.'
걸으시는 모습이 너무도 안되 보였었다. 매우 조심 조심
혼자서 압구정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며
말을 걸기도 힘들어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윤선생님과
같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강의를 하실 때만은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나이 많은 학생들을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게 하고,
지적해 주시고, 또 피아노도 직접 치시고......
돌아가시기 10여일 전까지 강의를 하시는 그 모습,
함께 그 자리를 지킨 50대, 60대, 그리고 70대 학생들..
모두가 승리자이다. 왠만하면 그렇게 아픈 분에게
강의를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이제 강의를 그만하시라고
권했을 법도 한데 '나 일하지 않으면 죽어!'하시는 말씀에
순종해서 마직막까지 함께 한 그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바리톤 윤치호선생님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음악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다 가셨다.
비록 마지막 1, 2년을 투병 생활을 하시느라 너무나도 힘드셨겠지만
그분은 장인 정신을 끝까지 실천하신 위대한 음악가이시다.
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도 고귀하게 생각된다.
그분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신 연세 드신 학생분들도 대단한 승리자이다.
칠순의 연세이셨다. 가시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암과 투병하다가 아마 합병증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언젠가 잠시 윤선생님께 배운 기억이 난다. 2, 3년 전의 일이다.
대단히 귀가 좋으셔서 섬세한 부분까지 잘 지도를 해 주셨다.
그 당시에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일하지 않으면 죽어.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도 하고,
이렇게 노래도 가르치고 해야 난 살 맛이 난단 말이야!'
정말 그러한 말씀을 마지막까지 실천하고 가셨다.
어제 어느 가곡 동호회 모임에서 윤선생님이 가르치시던
성악 수업의 반장을 맡으셨던 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네, 잘 지냈습니다.'
'저... 윤치호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네요?'
그분은 그 질문에 금방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가 잘
못 들어서 그런가 하고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쉬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머슥해 져서 다시 묻기가 어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물었다.
'윤치호선생님 언제까지 강의를 하셨어요?'
이 말에 그분의 눈은 금방 슬픈 기색을 띤다. '괜히 물었나'
하고 생각하자니 입이 떨어진다.
'5월22일까지요.'
이렇게 짤막한 한 마디를 뱉었다. 그 말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 보다. 항암제 주사를 맞고, 화학 치료를 하느라
가발을 쓰고 다니시던 윤치호선생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살이 다 빠져서 너무 보기가 안 되었던 윤선생님의 모습.
그 분이 암에 걸리시고 난 뒤 그분 수업을 청강하기 위해
갔을 때 보았던 그분의 모습이 내 맘에 강렬히 꽂혔였다.
'왜 저렇게 아프신데 아직도 강의를 하고 계시는 걸까.'
걸으시는 모습이 너무도 안되 보였었다. 매우 조심 조심
혼자서 압구정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며
말을 걸기도 힘들어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윤선생님과
같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강의를 하실 때만은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나이 많은 학생들을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게 하고,
지적해 주시고, 또 피아노도 직접 치시고......
돌아가시기 10여일 전까지 강의를 하시는 그 모습,
함께 그 자리를 지킨 50대, 60대, 그리고 70대 학생들..
모두가 승리자이다. 왠만하면 그렇게 아픈 분에게
강의를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이제 강의를 그만하시라고
권했을 법도 한데 '나 일하지 않으면 죽어!'하시는 말씀에
순종해서 마직막까지 함께 한 그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바리톤 윤치호선생님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음악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다 가셨다.
비록 마지막 1, 2년을 투병 생활을 하시느라 너무나도 힘드셨겠지만
그분은 장인 정신을 끝까지 실천하신 위대한 음악가이시다.
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도 고귀하게 생각된다.
그분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신 연세 드신 학생분들도 대단한 승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