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내린 날
2006. 1. 13. 출근길
겨울비가 축복처럼
넉넉하게 내리는 날 아침,
차에 시동을 걸고 익숙한 길을 따라
습관처럼 달리다가
역삼역 못 미쳐 멈춘 건널목쯤에서야
비로소 단풍잎 두 개가 비에 젖어
내차 앞 유리창 오른쪽에
바싹 달라 붙어 있는 걸 보았다.
"녀석들 예쁘기도 하지..."
어젯밤 주차했던 자리가 아마도
단풍나무 아래였었나 보다.
잎 모양이 멀쩡한 걸 보면
나무에서 막 떨어진 게 분명했다.
이리저리 땅 위를 구르는 신세 면할려고
여태 나무에 매달려 있었겠지.
"그래, 기념으로 사진 찍어 줄까?"
넌 지났지만 가을이야.
고마운 가을,
우린 네 덕택에 지난가을 무척 즐거웠어.
누구라도 생에 단 한 번밖에
누리지 못하는 그 2005년의 가을을
너는 우리에게 선물로 준 거야.
"실물보다 더 예쁘게 찍어 줄게..."
안세병원 앞 건널목에서
차를 멈추니 앞 유리창에 붙어 있던
다른 녀석이 눈에 띄었다.
이 녀석은 몸집이 너무 작아서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대어야 했다.
작은 단풍잎은 반쯤 오므린
아기 손가락 같은 고운 목소리로
길을 건너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나 여기 있어, 나 좀 쳐다봐 줘..."
못 들은 척, 아니 들었을 리가 없지.
그래서인지 소년은 무심코
길을 건너가 버렸다.
비는 쉬지 않고 마치 봄비처럼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 차를 세우고
언뜻 흘겨보니 차 트렁크 뚜껑 위에도
두 녀석이 가볍게 착륙해 있었다.
"너희도 기념사진 찍어 줄게."
내 차에 놀러 온 녀석이
더 있나 어디 보자.
"그랬구나..."
보닛과 앞 유리창에도
두 녀석이 있었다.
"아니 한 녀석이 더?
앞쪽에만 모두 합해서 셋이네..."
차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높고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기 있어요..."
"거기도 있었구나,
넌 차 지붕에서 미끄러졌나 보구나.
그래, 너도 찍어 줄게."
"저는 찍지 마세요...."
그때 숨찬 듯
헉헉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왜 그러고 있니?"
"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옷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어요."
"네 옷 아주 예뻐"
"아니에요, 저기 가게 안에 있는
옷들이 더 예뻐요..."
가게 쇼윈도 안쪽엔 빠른 박자의
노랫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고
눈부신 조명 아래 야단스런 옷들이
보란 듯 으스내고 있었다.
"그래서 납작 엎드려 있었구나"
"예, 힘이 빠졌어요."
"내 눈엔 네 옷이 훨씬 더 예뻐,
저 옷들은 사람이 만들 수 있지만
네 옷은 사람이 만들지 못하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옷이란다."
"어깨 펴고,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