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노래 부르기의 허와 실(경남신문)
노래방 노래 부르기의 허와 실 - 탁계석(음악평론가)
우리는 조상 대대로 가무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노래방 기기의 출현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노래방은 ‘가라오케’라고 불리는. 일본이 개발한 영상자막을 보고 노래 부르는 ‘가짜 오케스트라’다. 가장 손쉽고 편하고 값싸게 노래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푸는 현실의 탈출구다. 때문에 순식간에 전국토의 노래방화가 되어버렸다. 세계 어느 곳에 가서라도 노래방 간판이 보이면 일단 한국 사람이 있구나 할 정도다.
그간 우리의 노래방 문화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잃었는가. 노래방에 안 가면 몸이 안 풀린다는 사람도 있고 직장 동료들과 음주 후에 노래방에 함께 가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은 조직의 이탈자로 보는 경우마저 있으니 생활 깊숙이 젖어든 사교의 총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 어느나라 사람도 우리처럼 노래방을 즐기는 곳이 없다. 문화의 차이요 관습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생활이 업그레이드되고 최근엔 웰빙 바람마저 불고 있는데 노래방을 한 차원 높이면 어떤 노래 부르기가 될까. 다름아닌 라이브 콘서트다. 젊은이들은 록카페에서 라이브 음악에서 춤과 음악을 즐긴다. 많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손을 잡고 음악회에 간다. 일부 중년들은 동네 어머니 합창단이나 아버지합창단에 참여하고 백화점 문화센터의 가요교실이나 가곡 부르기 모임에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과 라이브 노래 부르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노래방은 분명 노래 못 부르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전 국민을 가수로 만들어냈다. 또 20~30년 전만 해도 마이크가 방송국 아나운서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사람들은 마이크를 들이대면 피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누구나 마이크 앞에서 쉽게 말문을 연다. 스피치의 장벽을 허문 것도 노래방 마이크의 공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노래방은 박자나 가사에서 개인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계에 순응해야 점수를 딸 수 있으므로 감정이 획일화되어 버렸다. 또 자막이 없으면 노래를 못 부르는 가사 맹(?)을 만들고 말았다. 또 노래방은 남을 존중하기보다 오로지 자기 목청만 높이는 이기적인 노래 부르기로 전락했다. 그리고 음주 때 노래를 부르면 성대가 부풀어져 목소리를 버리거나 과다한 음량에 청각이 손상될 수 있다. 마이크에 붙어 있는 각종 세균이 감기나 기타 병의 감염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기가 탁하고 어두침침해서 사고의 원인도 된다. 때문에 화음의 묘미를 느끼고 섬세하고 아름답게 감정을 나누는 열린 공간의 합창에 비하면 그 맛이 훨씬 덜하다.
룸살롱. 노래방. 전화방. 성인방 등 방이 많은 사회구조는 열린사회가 아니다. 자폐적 공간에서 욕망을 풀기보다는 건강하고 멋진 즐거움을 나눌 수는 없을까. 이제는 가난하고 억압받던 통제 시절의 비상탈출구 역할을 했던 노래방에서 한 차원 업그레이드해 즐기는 고급문화로 옮겨 갈 때가 되었다. 음주 문화 역시 폭탄주에서 부드러운 술로 바뀌고 있듯이 술자리를 옮겨가며 마시는 술 문화도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달 필자는 마산의 김경선 병원장이 열고 있는 ‘마산·영남 가곡 부르기’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인문과 교양이 물씬한. 멋을 아는 중년 부부 50여명이 가곡을 합창하고 있었다. 이들은 2시간 동안의 노래 부르기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뒤풀이에서 기타. 피아노. 아코디언 반주로 노래 부르며 즐겼다. 마치 헝가리나 유럽의 한 살롱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몰론 자막 가사도 없었고 중간중간 시인들이 즉흥시를 낭송했다. 벽면에 가득 걸린 그림들만으로도 취할 만큼 예술의 숙성감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물론 개인차에 의한 감정의 고저나 박자 템포도 감정을 자유자재로 풀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 산업화 시대에 시간은 없고 일시에 감정을 폭발하듯 풀려다 보니 노래방 구조의 힘을 빌려야 했다. 마음에 준비도 여력도 부족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제 질을 생각하는 때가 아닌가. 동네마다 문화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준비한 노후가 아름답다. 젊은 시절부터 고상한 아름다움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최근 노래방이 화근이 되어 젊은 고시생 여러 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 이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금 열린 노래문화를 생각해 본다.
탁계석(음악평론가)
우리는 조상 대대로 가무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노래방 기기의 출현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노래방은 ‘가라오케’라고 불리는. 일본이 개발한 영상자막을 보고 노래 부르는 ‘가짜 오케스트라’다. 가장 손쉽고 편하고 값싸게 노래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푸는 현실의 탈출구다. 때문에 순식간에 전국토의 노래방화가 되어버렸다. 세계 어느 곳에 가서라도 노래방 간판이 보이면 일단 한국 사람이 있구나 할 정도다.
그간 우리의 노래방 문화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잃었는가. 노래방에 안 가면 몸이 안 풀린다는 사람도 있고 직장 동료들과 음주 후에 노래방에 함께 가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은 조직의 이탈자로 보는 경우마저 있으니 생활 깊숙이 젖어든 사교의 총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 어느나라 사람도 우리처럼 노래방을 즐기는 곳이 없다. 문화의 차이요 관습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생활이 업그레이드되고 최근엔 웰빙 바람마저 불고 있는데 노래방을 한 차원 높이면 어떤 노래 부르기가 될까. 다름아닌 라이브 콘서트다. 젊은이들은 록카페에서 라이브 음악에서 춤과 음악을 즐긴다. 많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손을 잡고 음악회에 간다. 일부 중년들은 동네 어머니 합창단이나 아버지합창단에 참여하고 백화점 문화센터의 가요교실이나 가곡 부르기 모임에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과 라이브 노래 부르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노래방은 분명 노래 못 부르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 전 국민을 가수로 만들어냈다. 또 20~30년 전만 해도 마이크가 방송국 아나운서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사람들은 마이크를 들이대면 피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누구나 마이크 앞에서 쉽게 말문을 연다. 스피치의 장벽을 허문 것도 노래방 마이크의 공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노래방은 박자나 가사에서 개인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계에 순응해야 점수를 딸 수 있으므로 감정이 획일화되어 버렸다. 또 자막이 없으면 노래를 못 부르는 가사 맹(?)을 만들고 말았다. 또 노래방은 남을 존중하기보다 오로지 자기 목청만 높이는 이기적인 노래 부르기로 전락했다. 그리고 음주 때 노래를 부르면 성대가 부풀어져 목소리를 버리거나 과다한 음량에 청각이 손상될 수 있다. 마이크에 붙어 있는 각종 세균이 감기나 기타 병의 감염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기가 탁하고 어두침침해서 사고의 원인도 된다. 때문에 화음의 묘미를 느끼고 섬세하고 아름답게 감정을 나누는 열린 공간의 합창에 비하면 그 맛이 훨씬 덜하다.
룸살롱. 노래방. 전화방. 성인방 등 방이 많은 사회구조는 열린사회가 아니다. 자폐적 공간에서 욕망을 풀기보다는 건강하고 멋진 즐거움을 나눌 수는 없을까. 이제는 가난하고 억압받던 통제 시절의 비상탈출구 역할을 했던 노래방에서 한 차원 업그레이드해 즐기는 고급문화로 옮겨 갈 때가 되었다. 음주 문화 역시 폭탄주에서 부드러운 술로 바뀌고 있듯이 술자리를 옮겨가며 마시는 술 문화도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달 필자는 마산의 김경선 병원장이 열고 있는 ‘마산·영남 가곡 부르기’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인문과 교양이 물씬한. 멋을 아는 중년 부부 50여명이 가곡을 합창하고 있었다. 이들은 2시간 동안의 노래 부르기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뒤풀이에서 기타. 피아노. 아코디언 반주로 노래 부르며 즐겼다. 마치 헝가리나 유럽의 한 살롱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몰론 자막 가사도 없었고 중간중간 시인들이 즉흥시를 낭송했다. 벽면에 가득 걸린 그림들만으로도 취할 만큼 예술의 숙성감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물론 개인차에 의한 감정의 고저나 박자 템포도 감정을 자유자재로 풀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 산업화 시대에 시간은 없고 일시에 감정을 폭발하듯 풀려다 보니 노래방 구조의 힘을 빌려야 했다. 마음에 준비도 여력도 부족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제 질을 생각하는 때가 아닌가. 동네마다 문화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준비한 노후가 아름답다. 젊은 시절부터 고상한 아름다움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최근 노래방이 화근이 되어 젊은 고시생 여러 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 이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금 열린 노래문화를 생각해 본다.
탁계석(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