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내 고향 설날
올 설날은 또 비가 오려나.......지난 성탄에도 비가 오더니......
내 고향의 설날에는 해마다 눈이 왔는데.......
한국의 설날을 알리가 없는 미국사람들은 아무런 감각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국에는 지금 교통체증으로 전국이 흔들거리고 있는데..... 변함없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그 나마 한국적 설날을 느끼고 싶어 뉴스도 보고 내마음의 노래에도 방문했다.
여러님들의 고향 이야기와 고향 사진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이 탓인가 왜 이리도 고향이 그리워 지는지.....(?) 20 년의 타향살이가 이렇게 가슴에 사무치도록 고향이 그리워질 줄이야......한국에 계시는 분들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찾아갈 고향이 있지 않는가...... 언제나 갈 수 있고... 물론 요즈음이야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 컴퓨터 앞에서 울고 있으니까 막내딸이 " 엄마, 왜 그래 " 한다. 고향의 설날이 그리워서 우는 이 엄마의 마음을 알리가 있겠나.....???
내 고향 뒷산은 칠보산이라고 (7개의 보석이 뭍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고향사람들은 아직도 그 말을 믿고 있음) --- 어릴적 개구장이 친구들과 보석 찾으러 간다고 산속 깊이 들어 갔는데
큰 동굴을 발견하고 그 동굴에 들어 갔다가 호랑이가 나올까봐 도망쳐 나왔던 기억이 있음 ----
* (주) 지금도 그 동굴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음.
멋진 산을 배산으로 하고 앞으로는 형산강을 배수로 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넓게 펼쳐진 논,들판
에 내린 눈을 밟으며 집집마다 세배 다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사남매였고 아버님께서
중간이셔서 새벽 일찍 일어나서 부모님께 세배하고 먼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할머니댁을
방문하고 제일 큰집부터 차례로 다녔다...... 동네 어르신네댁도 방문하고 한바퀴 돌고 나면
밤이 되었다. 그 때는 차도 잘 없었으니까 모두 걸어서 다녔다... 물론 어릴때니까 세배보다는
세뱃돈에 더 관심이 많았었다.... 누가 더 많은 집을 가느냐에 따라서 그 해 수입(?)이 결정 되었으니까....... 집집마다 맛있는 강정도 실컷 먹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요즈음이야 흔한 것이 과자 이지만 그 때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귀했는지......? 그래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지만......지금도 그 강정맛은 잊을 수없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도
세배의 의미를 가르치려고 세배를 하러 집집마다 해마다 데리고 다니는데 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세배보다는 세뱃돈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가 어릴적에는 왜 그리도 추웠는지....털장갑에 털모자, 털마후라를 해도 온몸이 꽁꽁 어는것 같았다.....그래도 세뱃돈 얻는 재미에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그 때는 따로 용돈 생기는일이 잘 없었으니까......어떤집에는 곶감도 주고, 식혜도 주었던 것 같다. 추운날에 먹었던 얼음 식혜가 어쩜 그렇게도 맛있었는지......지금도 입맛이 당겨진다....쩝쩝 (!!!)
설빔을 입으려고 설 전날은 잠도 설쳤던 기억이 새롭다. 요즈음처럼 옷을 아무때나 사 입을 수 있으니까 옷 귀한 줄도 모르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적지만, 그 때는 설빔이 크나 큰 선물이었다. 초등학교 설날에 입었던 빨간 쉐터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시골에 살았던 나는 도시에서 오는 이웃집 언니, 오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따라서
서울에 가고 싶었다. 지금 같으면 시골이 훨씬 더 좋겠구만......
아른한 내 기억속의 설날이 이 토록 그리워지는 것은 함께 할수 없는 외로움 때문일거다.
설날 아침에는 고운 한복을 입고 가서 미국사람들에게 한국의 설날을 알려줘야지...덜 외롭게...!!!
내 고향의 설날에는 해마다 눈이 왔는데.......
한국의 설날을 알리가 없는 미국사람들은 아무런 감각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국에는 지금 교통체증으로 전국이 흔들거리고 있는데..... 변함없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그 나마 한국적 설날을 느끼고 싶어 뉴스도 보고 내마음의 노래에도 방문했다.
여러님들의 고향 이야기와 고향 사진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이 탓인가 왜 이리도 고향이 그리워 지는지.....(?) 20 년의 타향살이가 이렇게 가슴에 사무치도록 고향이 그리워질 줄이야......한국에 계시는 분들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찾아갈 고향이 있지 않는가...... 언제나 갈 수 있고... 물론 요즈음이야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 컴퓨터 앞에서 울고 있으니까 막내딸이 " 엄마, 왜 그래 " 한다. 고향의 설날이 그리워서 우는 이 엄마의 마음을 알리가 있겠나.....???
내 고향 뒷산은 칠보산이라고 (7개의 보석이 뭍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고향사람들은 아직도 그 말을 믿고 있음) --- 어릴적 개구장이 친구들과 보석 찾으러 간다고 산속 깊이 들어 갔는데
큰 동굴을 발견하고 그 동굴에 들어 갔다가 호랑이가 나올까봐 도망쳐 나왔던 기억이 있음 ----
* (주) 지금도 그 동굴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음.
멋진 산을 배산으로 하고 앞으로는 형산강을 배수로 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넓게 펼쳐진 논,들판
에 내린 눈을 밟으며 집집마다 세배 다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사남매였고 아버님께서
중간이셔서 새벽 일찍 일어나서 부모님께 세배하고 먼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할머니댁을
방문하고 제일 큰집부터 차례로 다녔다...... 동네 어르신네댁도 방문하고 한바퀴 돌고 나면
밤이 되었다. 그 때는 차도 잘 없었으니까 모두 걸어서 다녔다... 물론 어릴때니까 세배보다는
세뱃돈에 더 관심이 많았었다.... 누가 더 많은 집을 가느냐에 따라서 그 해 수입(?)이 결정 되었으니까....... 집집마다 맛있는 강정도 실컷 먹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요즈음이야 흔한 것이 과자 이지만 그 때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귀했는지......? 그래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지만......지금도 그 강정맛은 잊을 수없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도
세배의 의미를 가르치려고 세배를 하러 집집마다 해마다 데리고 다니는데 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세배보다는 세뱃돈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가 어릴적에는 왜 그리도 추웠는지....털장갑에 털모자, 털마후라를 해도 온몸이 꽁꽁 어는것 같았다.....그래도 세뱃돈 얻는 재미에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그 때는 따로 용돈 생기는일이 잘 없었으니까......어떤집에는 곶감도 주고, 식혜도 주었던 것 같다. 추운날에 먹었던 얼음 식혜가 어쩜 그렇게도 맛있었는지......지금도 입맛이 당겨진다....쩝쩝 (!!!)
설빔을 입으려고 설 전날은 잠도 설쳤던 기억이 새롭다. 요즈음처럼 옷을 아무때나 사 입을 수 있으니까 옷 귀한 줄도 모르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적지만, 그 때는 설빔이 크나 큰 선물이었다. 초등학교 설날에 입었던 빨간 쉐터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시골에 살았던 나는 도시에서 오는 이웃집 언니, 오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따라서
서울에 가고 싶었다. 지금 같으면 시골이 훨씬 더 좋겠구만......
아른한 내 기억속의 설날이 이 토록 그리워지는 것은 함께 할수 없는 외로움 때문일거다.
설날 아침에는 고운 한복을 입고 가서 미국사람들에게 한국의 설날을 알려줘야지...덜 외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