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풍경
앞뜰의 국화향이 가을바람에 퍼지는 언덕 남새밭에 배추밭 이랑에는 200여 포기의 새파란 배추와 몇 접의 무가 가지런히 잘도 자라서 적당하니 이젠 김장을 해야 한다.
밝고 예쁜 색으로 물드는 단풍의 계절이라 유난히 푸른색이 싱그럽다.
아직은 햇살이 맑고 투명한 늦가을인데 여행이라도 하고 싶은 날이라고 올해는 꽤가 좀 나서 식구도 없는데 꼭 이렇게 많은 김장을 해야 하느냐고 남편에게 물으니
며칠만 고생하면 한 계절 편하고 넉넉한데 이것 또한 살아가는 작은 재미가 아니겠냐고 되물으며
열심히 절이고 힘든 일들을 언제나처럼
회사에 휴가까지 내고 열심히 김장에 참여한다.
식구들이 많던 옛날 어머니들에 비하면 많지 않을지 몰라도 결혼 이후26년
동안 배추만 100포기가 넘는 김장은 우리 집 연례행사이다.
신혼 때부터 손님 대접이 일상이던 우리 집은 겨울이 오면 가지
수만도 10여 가지가 넘는 김장을 담가 왔다. 자주 3~40명의 손님에게
여러 종류의 김장과 밑반찬으로 별 어려움 없이 상을 차릴 수 있었으니
11월에서 12월 사이는 한 달 내 김장이 늘 한해의 숙제 같은 거였다.
기본적으로 싱싱한 시금치를 넣은 배추김치와 백김치 동치미, 총각김치, 겨울 깍두기, 고들빼기 김치, 무말랭이 김치, 파김치, 순무김치, 깻잎 김치, 늙은 호박을 넣은 섞박이 김치,봄에 먹을 짠 무김치, 푸른 배추만 모아 소금 간을 해서 항아리에 아예 파묻는 배추보쌈 김치는 채식위주의 우리 집 식단에는 이런 종류의 김장하는 일이 꽤나 큰 행사이기도 했다.
동서나 시누이가 없는 나로서는 아무리 시어머님이 도우셔도 김장일은 많았다.
열심히 장만한 김장이 예전에는 봄만 되면 도둑맞은 듯 어김없이 비어있었다.
겨우내 오는 손님들 대접하고 이집, 저 집 한 통씩 싸 주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다.
식구가 많지도 않은데 그리 많은 김장을 한다고 사람들이 말리고 이웃들은 늘 놀랍다고 한다.
도시에 살 때도 그러던 것이 시골생활을 한 다음부턴 아예 정성스레 텃밭에 김장을 심어 어릴 적처럼 김치 광을 만들고 옛날처럼 묻어가며 그야말로 재래식으로 옛날 항아리에 김장을 담근다.
올해는 큰 아들도 호주로 가고 나눠 먹을 동생도 이민을 가고, 찾아오는 손님이 예전처럼 많지 않아 조금만 담을까도 생각했지만 습관처럼 예년과 비슷한 양이다.
가지 수가 적어도 버릇처럼 배추만 150여 포기를 절이니 참 많기는 하다.
그러나 김장의 쓰임도 다양하다.
만두를 유난히 좋아해서 김장김치를 많이 소비하는 것도 많은 김장의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도 눈이 내린 길을 김치 통 들고 찾아오는 이웃들과 값비싸진 않더라도 나눠 먹는 기쁨이 며칠간의 노동보단 보람 있는 일이다.
요즘이야 김치 냉장고가 있어 굳이 11월에 김장을 하지 않아도 되니 11월 추위 시작에 김장할 이유도 없어져서 따뜻한 10월에도 김장을 하는 이들도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아직은 기계에 의존하기 보단 옛날 방식이 맘에 드니 내 아날로그식 방식은
때로 참 둔하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한 겨울 온도를 유지해주는 김치냉장고에 오래 보관되니 바쁜 사람은 편해졌어도
너무 오래 김장을 먹는데 불평하는 이들도 있으니 다양한 김장 조리법을 개발하면
더욱 유용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많아야 10포기 20포기도 안 되는 김장을 하고 또 얻어다 먹고 만들어
놓은 김치를 사먹는 분들도 있는데 참 현실적이란 생각도 든다.
우리 집 김장김치와 함께 동치미는 많은 분들의 인기다.
오래된 항아리에서 신선하게 숙성된 동치미는 큰 독에 두독이나 만들어도 빈 통 들고
오면 시원한 동치미를 퍼가지고 가니 (동치미는 김장하기 전에 미리 담그므로)김장하는 날은
김치공장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는데 담백한 우리 집 김치가 인기의 비결이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식당 등 다른 곳의 김치는 거의 먹지 않는다.
일본사는 친구가 오죽하면 일본서 김치장사를 하자고 해 웃은 적이 있다.
세계 적인 건강식품인 김치가 기무치에 치이고 중국산 대량 생산에 밀려 큰일이다,
현실적으로 환경적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낭비는 아니므로 안심하고
수출도 하면 정책적으로 김치산업을 발전시킨다면 싼 야채 값에 애써 지어놓은
무 배추 밭을 갈아 업는 농민들에게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올해는 유난히 싼 김장값으로 집집마다 김치 냉장고에 열심히 넣어놓으면 한 겨울이 풍성 할 것이다.
요즘 같이 분주하고 너 나 없이 바쁜 시대에 나 같은 사람은 참으로 비생산적인지도 모르겠다.
김장을 하는 기간은 며칠이지만 사실 김장은 장마가 끝난 폭염의 여름부터다.
정성 드려 심은 김장 손질하고 갖은 양념 준비하여 다하고 나서도 뒷설거지는 왜 그리 많은지 1년에 한번 쓰는 광에 있는 광주리들과 그릇들 정리는 김장휴가를 내는 남편이 다해주고 청소며 정리정돈도 잘 해주지만 여전히 김장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족의 건강한 겨울을 준비에 중요한 부분인 김장을 올해도 배추만 150포기에 무는 한 접이 넘는 분량을 다 하고 난 뒤의 마음은 역시 김장을 많이 하길 잘했다는 만족한 마음이다.
김장은 단순히 서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하는 기본 찬거리가 아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 처럼 김장은 한 겨울 양식이란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 땅의어머니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고 나누는 인정이고 추운
겨울을 푸근하게 보내는 한국인의 정서가 있고 정신이 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날 군고구마에 청량음료 같은 동치미 국물과
김장김치 한 그릇을 생각하면 늦가을 며칠의 수고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마당가득 속이 노란 배추를 절이고 한쪽에선 김이 나는 배추국의 구수한 냄새와 이웃들의 웃음이 있는 김장 하는 날의 풍경은 점점 사라져 흑백사진 같은 추억의 장면이 될 것만 같다.
시대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우리 집처럼 김장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도 하겠으나 몇 포기가 되든지 김장만큼은 가족들과 함께 하면 덤으로 얻는 것도 많을 듯싶다.
서울 사는 막내아들에게 보낼 김장이며 또 누구누구를 위한 몫으로 어떤 통에 얼만큼을 담을지 셈해보며 언 손을 녹인다. 아참! 남은 배추와 무우등은 또 어느어느 집에 보낼지도 생각해야한다.
그런데 점점 게을러지는 내가 내년에도 또 후년에도 많은 김장을 할런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 아들들이 가정을 이루면 며느리들과 함께 재미나게 김장을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아직 후일의 일이므로 당사자들은 어찌 생각 할지는 모르지만.......
김장은 추운 겨울을 포근히 날 수 있는 정성이라는 조미료가 들어간 어머니의 사랑이다.
김장을 다 하고 나니 복권에 당첨된것도 아닌데 부자가 된듯한 마음에
가을 여행은 다음주로 미뤄길 잘했다고 마주보며 웃는다
찬바람에 은행잎이 깨끗이 씻어서 쌓아놓은 배추위에 노랑나비처럼 내려앉는다